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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VS 제5공화국>

[서울의 봄]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5공화국]

[가택연금]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신한민주당]

[4.13 호헌조치]

[6.29 선언]

[김영삼 VS 김대중]

[여소야대]

[제5공화국 청문회]

[공산권의 붕괴]

[3당 합당]

[김영삼과 노태우]

[문민정부]

<라봉봉>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사망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직을 승계해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

 

1980년 2월에는

윤보선 , 김대중 등 687명이 복권조치되며

1980년 '서울의 봄' 이 시작됩니다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열망하며 서울역에 모인 10만 시민 , 서울의 봄

 

<김영삼이 회고한 서울의 봄>

정부도 국회도 정상을 유지했다.

정부는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인수하고 내각을 이끌어 갔다.

국회의 여당도 신민당 의원들이 의원 사퇴서 반대 결의를 했고

신민당 의원들도 모두 국회로 복귀했다.

정치권이 일은 유신 헌법을 민주 헌법으로 고쳐

국민이 선택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대행과 내각은 과도 정부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대세고 순리였다.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에

시민들은 민정으로 이양되고 민주화가 올 것으로 여겼고

박정희 사후부터 1980년 5월 18일 광주학살전까지의 

반년 안되는 짧은 기간을

 

'서울의 봄'

 

이라고 합니다

 

[5.17 쿠데타]

그러나 이미 박정희 사후부터

군부안의 신군부세력이었던 전두환 등은

자신의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1979년 12월 12일에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내를 장악하였고

 

12.12사태 주역들 , 가운데 전두환과 노태우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어 전두환 장군의 눈치를 보던 상황이었고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

 

시민들의 격렬한 민주화 요구에

전두환은 그것을 분쇄하고자

1980년 5월 17일 계엄확대조치를 발표하며

김대중은 용공혐의(용공=공산주의 용인 , 동조) ,

김종필은 부정축재자로 구속하고

김영삼은 가택에 연금합니다

 

가택연금 당시 김영삼 , 생애동안 꾸준히 가택연금이 있었음

 

 

주된 대권후보였던

거물 정치인 3김 ,

김대중과 김종필과 김영삼이 동시에 무력화된 것이었고

이는 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에 ,

다음날인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하던

광주시민들과 신군부 계엄군이 충돌하였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계엄군의 광주시민학살

 

광주 열사들

 

신군부 세력은 무자비한 무력유혈진압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였고

광주학살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 ,

광주학살과 이런 상황등에 완전히 무력화된 최규하대통령은

책임감을 느끼고 8월 16일 사임합니다

 

[제5공화국]

곧이어

9월 1일 전두환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81년 1월엔 신군부 세력 중심으로 민주정의당이 창당되고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은 다시금 자신이 개조한 5공화국 헌법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전두환으로 시작해 전두환으로 끝난 ,

대망의 80년대를 장식한

 

'제5공화국'

 

이 시작됩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이순자 대통령부부

 

 

그냥 1980년대나 전두환의 시대를 제5공화국이라 부르고 있고

줄여서 5공 , 5공시절 , 5공때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가택연금]

5공정권은 김영삼 총재를 가택연금한지 

1년만인 1981년 4월 30일 연금을 해제했지만

연금에서 풀린 김영삼이 곧바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제5공화국을 비난하자

곧바로 다시 가택연금을 했습니다

 

김영삼의 정치투쟁사를 상징했던 가택연금

 

 

<김영삼 국민에게 드리는 글 , 1983년 5월 2일>

나는 지금 ,

서울 상도동에 있는 울타리 안에 연금되어 있습니다.

내가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

외부인사가 나를 방문하는 것도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외부와 차단된 것입니다.

권력당국이 파견한 경찰과 정보원들이 물샐틈없이 집을 포위하고

집안에서의 나의 동태까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집은 창살이 없을 뿐 ,

나를 가두고 있는 감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국민 여러분께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김염상은 재연금이 된지 1년만인

1983년 5월 18일 ,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제5공화국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합니다

 

단식투쟁중인 김영삼 ,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1980년대 초반은 5공화국 ,

전두환 정권이 점차 안정세에 접어든 시기로서

민주화 열기도 꺼져가던 시기였는데

 

김영삼이 단식투쟁에 돌입하자

곧바로 국내외로 그 영향이 확산되었고

세계 이목이 김영삼의 사투에 쏠리기 시작했고

흩어져있던 재야세력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민주화를 위한 재결합을 다짐하게 됩니다

 

 

결국 국내외여론을 의식한 전두환은

김영삼 단식투쟁 12일만인 5월 30일

김영삼의 가택연금을 해제시켰고

김영삼은 6월 9일에 가서야

23일만의 단식투쟁을 마쳤고

단식투쟁 결과 세계인들의 충격과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지피게 됩니다

 

<6월 9일 김영삼 , 단식을 마치면서>

 국민여러분 !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하여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나는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정권이 나의 단식을 중단케 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그들이 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

나와 튼튼하게 연대하고 있는 민주국민의 결사적인 민주항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마리 곰의 죽음이 대서특필되면서도

나라 야당지도자의 오랜 연금과 단식투쟁 사실이 줄도 보도되지 않는 언론상황 속에서

입과 입 , 손과 손 ,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 단식사실의 전파와 더불어 ,

민주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연대를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언젠가 국민과 더불어 민주주의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을 것입니다.

 

[신한민주당]

김영삼은

광주민주화운동 4주년인

1984년 5월 18일 ,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고

1985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해금인사들과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했고

1985년 12대 총선(2.12 총선)에서는 창당한지 한달도 안된 신한민주당이

예상을 뒤없고 29.4% 득표율을 받고 67석 의석을 확보하며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민정당(파란색) 과 신한민주당(연두색)

 

<김영삼>2.12 총선은 정치의 물굽이를 돌려놓은 분수령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2.12 총선의 승리가 없었다면 6 항쟁은 없었고 ,

직선제 개헌도 없었고 ,

1990년대 정치의 대전환도 없었을지 모른다.

2.12 총선의 신민당 바람을 더러는

'김영삼의 작품'

이라고 말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민당 바람은 내가 만들어 아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한다.

그때 내가 일은 새벽이 오고 있다고 말한 것뿐이다.

 

그만큼 독재정권에 대한 대안으로서

신민당의 후예인 신한민주당에 몰표가 있었던 것이고

신한민주당의 실질적 지도부는

당 고문인 김영삼과 김대중이었습니다

 

12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직후 김대중과 김영삼 , 1985년 3월 6일

 

[4.13 호헌조치]

신민당은 1986년 2월 12일

기습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자는 내용의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했고

초강수로 나서는 신민당과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정면충돌을 하게됩니다

 

이로인해

침체되있던 학생운동도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고

당황한 전두환은 신민당사에 대한 강제수색을 감행합니다

 

이후 신민당에서는 내부분열이 있다가

김영삼과 신민당 소속의원 대다수는

따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했고

이시기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들의 끓어오르는 여론을 무시한채

대통령 간접선거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특별담화로 발표합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대통령 , 대한뉴스

 

<김영삼>4.13조치는 반민주적 폭거

 

[6.29 선언]

이에 민주세력은 잠깐 주춤했지만

곧이어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폭로되자

부도덕한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뜨거웠던 그해

1987년 6월이 되자

격렬한 '6월민주항쟁' 이 일어나며

시위대의 행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두고 시민학살에 대한 우려때문에

미국이나 국제여론도 이번만은 전두환 편을 들지 않아주었기에

전두환은 궁지에 몰린 쥐가 됩니다

 

이한열 열사

 

제5공화국 정부의 최루탄 진압

 

 

뜨거웠던 6월항쟁

 

1987년 6월 직선개헌투쟁에 나섰다 연행되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6월 10일 ,

전두환은 거센시위속에서도 민정당 대통령 후보지명대회에서

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같은날 직선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시위는 전국도처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고 있었고

시위가 계속 확산되자

결국 전두환은 시민들에게 항복했고

1987년 6월 29일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는

6.29 선언을 발표하며 

시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하고

그날 , 제5공화국 침몰하였고

6.29 선언은 민주화 선언임과 동시에

제5공화국의 항복선언이었습니다

 

6.29 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기뻐하는 시민들

 

[김영삼 VS 김대중]

6.29 선언이 발표되자 국민들은

정권교체와 군부통치 종식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전두환은 결국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된 이상

투표에서 노태우를 당선시켜야겠다는 전략으로 바꾸었고

 

김대중과 김영삼을 분열시켜서 따로 출마하게해

민주화세력을 분열시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는 꾀를 내게 되었고

첫번째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그렇게 전두환의 꾀대로 흘러가

민주화의 희망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각기 독자 출마를 선언하였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내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따로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하였고

김영삼은 그대로 통일민주당으로 출마 ,

 

1987년 서로 불편해진 관계가 된 김영삼과 김대중

 

결국 민주화세력의 표가 갈려서

1987년 12월 16일 국민직선으로 치뤄진 13대 대선은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 라는

사상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3대 대선 포스터

 

아이조아

 

통일민주당 김영삼 28% , 평화민주당 김대중 27% 였기에

민주세력 표가 55%였음에도 표가 거대하게 갈라져 두 인물다 낙선 ,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또다시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또한 ,

민주세력이 참패하자 국민들 역시 많이 실망감을 느꼈고

호남출신 김대중 , 영남출신 김영삼이었기에

지역감정도 심화되고 김영삼과 김대중 두 인물을 비난하는 여론도 들끓었고

또다시 민주화 열망은 보류되게 됩니다

 

[여소야대]

또한 불행히도

이시기부터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과 갈등이 시작되었기에

1988년 4월 26일의 13대 총선에서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 125석 ,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70석 ,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59석 ,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27석을 차지하게 되었고

 

13대 총선결과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민정당(하늘색)

 

이때 정치인들이 4파전 구도로 갈려져 복잡하게 돌아가며

저마다 고민이 깊었던 시기로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여당 민주정의당이

299석중 과반도 안되는 125석으로 나가는 

여소야대의 안습한 상황에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김대중과 김영삼 , 김종필 3김 거물정치인들 역시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거대 야당임에도

다들 분열이 심해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 시기 노태우 대통령은 국민들의 군부에 대한 혐오감이 컸던시기고

아무리 김대중과 김영삼이 갈라져있어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곳에서 나온 인물들이었기에

최대한 정국을 조심스럽게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제5공화국 청문회]

김영삼 , 김대중 민주세력은 비록 대선때문에 갈라졌지만

노태우를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같은 생각이었고

여소야대 정국이 되자

곧바로 5공청문회를 시작시켜서

5공시기 인사들을 조지고 있었고

 

제5공화국 청문회 , SBS

 

5공청문회 당시 분노하는 노무현 의원

 

그동안 권력비호속에서 부정부패와 전횡을 일삼던 인물들이

국민들에게 낱낱이 공개되고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노태우 대통령도 야당 눈치를 보며

자신의 보스였던 전두환과 결별하게 되었고

전두환은 그렇게 이빨빠진 사자가 되어

사과문을 발표하고 씁쓸히 마누라 손잡고 백담사로 유배가게 됩니다

 

[공산권의 붕괴]

이시기 ,

국내 외에도 세계 역시 역사적 대전환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소련은 개혁개방(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를 실시하며

닫았던 문을 열고 세계로 나왔고

동유럽에도 민주화 바람이 일어났고

냉전체제와 공산국가들은 하나둘 무너지고 있었고

집권세력이었던 노태우 , 군부정권의 전통적 통치무기였던

안보이데올로기의 효과도 크게 약화되었고

 

개방되기 시작한 공산국가들 , 한-소 정상회담 노태우와 고르바초프

 

야당 역시 이미 민주화가 됬고 거대야당이 되버린 이상

민주화 투쟁구호만으론 국민들을 더이상 결집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한민국은 그렇게 공산권이 연속적으로 붕괴하던 이시기

우리도 역시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급격히 커지게 됩니다

 

이미 민주화가 시작된 노태우 정부 시기부터

정치인 김영삼에겐

조국은 그에게 민주투사로서의 요구는 끝내게 되었고

민주투사가 아닌 국정 , 정책을 제시해야 하는 정치가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고

 

민주주의를 위해 반평생을 바친 김영삼에게

또다시 생애를 건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여당 민정당(128석)의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 공화당(35석) 김종필 총재와

야당 통일민주당(60석)의 김영삼 총재를 데리고

 

민주 , 번영 , 통일을 이루기 위한

 

'구국의 결단'

 

을 내걸며

3당합당을 단행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3당합당 , 구국의 결단치곤 셋다 적과의 동침마냥 떨떠름한 표정

 

 

노태우의 작은 여당이었던 128석따리의 민정당은

3당합당으로 개헌선인 217석을 확보하며

ㅆㅅㅌㅊ 초거대여당으로 불어나게 되었고

 

국민들 , 특히 민주세력들은

평생 민주투사로 독재와 군부독재에 싸워온 김영삼이

뜬금없이 신군부 출신이었던 노태우 , 구군부출신 김종필과 합당해버리자

그를 변절자로 몰아붙였습니다

 

김영삼은 김영삼대로 자신의 3당합당 결정은

공산권이 무너지는 세계적 격변과 변화하는 내외정세속에 대응하기 위한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하였고

 

또한 김영삼은 자신이 노태우와 손을 잡은 것은

실제론 전두환과 노태우를 조지기 위해 ,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을 들어간 것이라 합리화시켰습니다

 

<김영삼>합당 안했으면 쿠데타 났을지도...

 

[김영삼과 노태우]

곧바로 김영삼은 노태우의 부하가 되어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되었고

일단 그냥 정치야망과 이해집산으로 어중이 떠중이

신군부+구군부+중도보수민주세력이 몸집을 불리려 만든 당이었기에

민자당은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는 못했고

 

무근본 정당이었던 민주자유당

 

그럼에도 워낙 인구수가 많아서

힘은 ㅈㄴ게 쎘고

김대중은 이때부터 김영삼이 노태우에 붙어버리자

야합하지 않은 유일 민주계 정치가로 우뚝서게 됩니다

 

민자당 창당 이후부터는

김영삼은 정치적 야망으로 야합을 했다는 점 등으로

계속 궁지에 몰렸고

 

또 여당내에서도

일단 출신이 출신인지라

그나마 신군부 노태우와 구군부 김종필은

그래도 둘다 군인출신이며 박정희 장군의 부하 출신이자

2인자의 한같은게 서로 있었기에 서로 통하는게 있었지만

 

반대로 김영삼은 야당 대표로서

박정희정부시기 박정희랑 맞다이 뜨고 지냈던 김영삼이었기에

 

보수층이나 민자당 내에서도

인지도때문에 일단 데리고는 있는데

조직에 융화되기는 어려운 상당히 불편한 인물이었고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계속해서 김영삼이 다음 후계가 되지 못하게 견제를 합니다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은 참패하며

149석으로 쪼글아들며 다시금 과반학보에 실패하였고

 

김영삼과 달리 야합하지 않고

홀로 길을 걸은 김대중의 민주당은

97석을 얻으며 제1야당이 되어 홀로서기에 성공해

본격적으로 노태우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14대 총선 민자당(파란색)과 민주당(빨간색) , 본격적으로 2강구도로 진입한 한국정치

 

선거에서 참패한 민자당은

김영삼에게 괜히 화풀이를 했고

총선패배 책임을 김영삼에게 지우려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계속해서

김영삼에게 차기대권을 넘기지 않으려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그래도 같은 당인데

이전 전두환이 노태우를 괴롭힌 것처럼

거물 정치인을 치졸하게 견제한 것이며

김영삼도 이때 빡쳐서 이후 노태우 수감시킨듯)

 

그러나 김영삼은 그럼에도 인지도가 인지도였고

민주화운동가내에서는 그래도 급진적 성향이었던

김대중에 비해서 보수 , 우익적 성향도 있었기에

이전부터 박정희나 전두환도 함부로 갈구지는 않았던 인물이기도 했던 인물이라

노태우는 결국 김영삼이 떠오르는 것을 막아낼 수 없고

 

또한 여당내 다른 후보들은 김영삼에 비해

인지도도 떨어지고 파워도 약했기에

결국 김영삼은

'큰정치' 슬로건으로

67% 지지를 얻으며

경선에서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고

김영삼은 결국 떨떠름한 여당과 노태우의 지원사격을 확보하게 됩니다

 

김영삼은 자신의 3당합당은 야합이라기보다는

그래도 역사를 위해 안정적인 정국을 위해 합당한 것이며

이질적 세력을 통합하는 것이라 여기게 됬고

당총재가 되어 수권여당 대표로서 많은 정치현안에 관여하며

경험치를 쌓았습니다

 

[문민정부]

이후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서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

 

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김영삼은

김대중 후보를 꺾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14대 대선 포스터

 

이 시기부터 본격적 지역갈등 , 빈부갈등이 그대로 표심에 나타나게 되었고

호남은 김대중 몰표를 , 영남은 김영삼을 지원사격해주었고

특히 서울은 근소하게 김대중이 김영삼을 앞섰지만

부자동네였던 강남 , 서초 , 송파에서는

김영삼이 넉넉하게 김대중을 앞섰고

호남출신이 많고 저소득층 노동자가 많은

관악 , 구로 , 변두리 권역등에서는

김대중 몰표가 많아졌고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선거가 이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근데 지금은 서울집값폭등으로

서울도 ㅎㅌㅊ 동네가 다 10억이 넘어가는 부자동네로 변화해서

지금 서울은 ㅎㅌㅊ 동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이번에 미니대선이라 불리는

서울시장 선거에선 보수계의 오세훈이 민주계의 박영선을 전지역에서 찌발랐음)

 

오늘날같이 동서구도가 본격화된 14대 대선

 

하여튼 ,

김영삼은 그래도 여당이었던 노태우의 가호를 받고

부패한 액윽보수층과 경상도 , 중산층 이상 , 부자들의 지원사격을 철저하게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는 보수계와 야합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

김영삼은 엄연히 민주투사로서 국민들에게 스타정치인이 된 것이었으며

이런 그의 출신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그와 손을 잡았음에도

그를 계속해서 견제한 것이었고

 

김영삼은 태생이 부자출신으로서

이승만의 자유당으로 국회에 첫 입성한 인물이자

민주화운동가의 대표로서 군부독재정권에 맞선 투쟁가라는

이런 양극단의 성향 , 잘말하면 중도보수층 인물이었던 대통령이었고

 

잘 말하면 안정적인 인물이었지면

이런 기회주의 , 불분명한 모습으로

여당내에서는 신뢰를 잃었고

야당은 배신자라고 극렬 반발하게 되었습니다

 

<김영삼>1987 6.29 이래 야당의 영역은 넓어지고 있다.

박해니 봉쇄니 하는 것은 없다.

여당 자유와 마찬가지로 야당 자유도 넓게 열려 있다.

3 합당은 여당과 야당의 거리를 가깝게 했고 ,

나는 가깝게 재편성하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 ,

민주주의를 하려는 결의 ,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모든 정당이 기본적으로 같다는 믿음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는 자랑을 나는 간직하고 있다.

이제 내가 걸었던 가시밭길의 야당은 역사 속에 담기로 하자.

 

자유한국당(보수계 정당) 에 걸린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초상화 (이질감 굿)

 

김영삼을 추모하는 문재인 대통령(민주계 정당) , 땡삼 각하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걸까요 이것이 신한국(?)

 

하여튼 ,

어찌저찌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었기에

군부독재 32년만에 문민정부가 부활되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순수민간정치인 출신인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

아주 역사적인 것이라 여겼으며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

 

라 지칭하게 됩니다

 

<김영삼 취임사>우리 다 함께 신한국으로

 

<라봉봉>정치인들 자서전 보면

국민들이 보기엔 그냥 기회주의자 , 철새 , 내로남불이지만

다들 자기만의 논리와 변명이 있는데

사실 국민들의 시각으로 보는 역사관이 가장 정확합니다

 

김영삼 역시 자기딴엔 안정을 위해 막판엔 군부와 손잡았다지만

원래 뒷심에서 근본이 나오기에

결국 그역시 대통령병걸린 환자에 불과했고

 

그냥 차라리 전두환처럼 한쪽에서 일관된 모습이 있었다면

욕은 먹더라도 의의나 업적도 선명한 모습이 있는데

자신이 격렬하게 투쟁했던 군부세력과 끝무렵엔 손을 잡은것을 보면

뭔가 힘빠지는 느낌이고 참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김영삼은 인생 초중반까지는 간지폭발에 엄청나게 멋진모습이 많지만

결국 인생 최종성적표가 나오는 후반~말년은 참 찝찝한 구석이 많고

국민들의 그에 대한 평가가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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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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