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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 마립간시기 인물들>

[내물 이사금과 내물 마립간]

[근친왕 김신라]

[왜의 침공]

[근초고왕에 맞선 내물이사금의 깡다구]

[구해줘 고구려 !]

[실성이사금의 복수]

[김실성 VS 김눌지]

[눌지마립간과 마립간]

[한국위인 왜에서 죽은 충신 박제상]

[구우일모]

[왜국에 간 박제상]

[계림의 신하 박제상]

[박제상의 아내 치술신모]

[눌지마립간의 나제동맹]

[집안에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 !]

[자비마립간의 백제구원]

[한국위인 떡방아 노래 백결선생]

[마지막 마립간 소지마립간]

[소지마립간의 결혼동맹]

[정월대보름의 유래]

[소지왕과 벽화부인]

<라봉봉>

 

[내물 이사금과 내물 마립간]

신라 마지막 석씨 임금인 흘해 이사금이

아들없이 죽자

김내물이 왕위를 이어 신라 17대왕 내물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내물 이사금은 최초의 마립간으로서 내물 마립간이라 하지만

일단 삼국사기에서는 실성왕까지 실성이사금이라 하고

최초의 마립간이자 최초의 김씨왕조를 연 김씨 임금이라 보면 됩니다

이때부터 신라는 멸망직전 잠깐 박씨왕조가 잠깐 나온거 빼면

쭉 김씨로 통일됬고 김씨를 국성으로 하는 김씨들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날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성이자 가장 많은 한국인성 '김씨' , 김씨표류기

 

이전 미추이사금 김미추가 최초의 김씨임금이었지만

곧바로 다음대부터 다시 석씨가 왕을 이어서

왕조까진 못열었고

보통 내물마립간 , 내물이사금때부터 김씨독점이 시작되기에

내물이사금은 굉장히 중요한 왕이고

여기선 삼국사기 기록대로 내물이사금 칭호를 사용하겠습니다

 

[근친왕 김신라]

내물 이사금은 신라최초 김씨임금 미추 이사금 김미추의 동생

김말구의 아들이었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 김씨였습니다

 

(즉 큰아빠의 딸이랑 결혼 , 역시 근친왕 김신라 ;;)

 

이런것 때문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내물왕 이야기를 쓰며 곧바로 불쾌한 심경을 드러냅니다

 

<김부식>아래와 같이 논한다

부인을 얻을 때, 같은 성의 여인을 얻지 않는 것은

동성과 타성의 구별을 철저히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공이 오나라 왕실에서 아내를 얻고 ,

진후가 성이 같은 네 명의 첩을 가진 것을

진 사패와 정 자산은 몹시 비방하였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

사촌이나 , 고종 , 이종 누이들까지도 아내로 삼았다

 

若新羅則不止取同姓而巳(약신라칙불지취동성이사)

兄弟子姑姨從姉妹(형제자고이종자매)

皆聘爲妻(개빙위처)

 

(개족보란 소리 ㅋㅋ)

 

비록 외국과 우리 나라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예법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오랑캐들이 어미나 자식을 간음하는 것은

또한 이보다도 더욱 심한 경우이다

 

킹받는 진흥왕의 성골가계도 , 법흥왕은 친동생에게 딸을 주었고 아빠가 큰아빠 딸이랑 결혼해서 태어난 진흥왕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근친(어질어질 , 조선 재평가)

 

[왜의 침공]

당시 신라는 왜와의 관계가 꼬일대로 꼬인 상황이었는데

먼저 내물이사금 전 임금인 흘해이사금은

마지막 석씨임금이자 신라 명장 석우로 태자의 아들로서

아버지 석우로 장군과 어머니 명원부인의 아들이고

석우로 장군은 예전 술취해서 왜 사신접대때 왜국왕을 노예로 삼겠다 모욕하다

전쟁을 일으켜버렸는데

이에 석우로 장군은 죄책감을 가지고 왜군에 홀로가서 자결했고

 

석우로 부인 명원부인은 이 일을 참고 참다가

후에 왜사신이 올때 자기가 접대한다하고는 왜 사신을 잡아 불태워 죽여버렸고

흘해 이사금대 역시 왜왕이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오고

공격해오던 혼란의 시기였고

 

내물이사금 9년 4월 여름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고

내물 이사금은 대적할 수 없다 생각해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해

토함산 아래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킵니다

 

왜군은 병력이 많다는 것만 믿고 진격해오다

신라 복병들에게 허를 찔리니

대패하여 도주했고

우리 군사들이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습니다

 

[근초고왕에 맞선 내물이사금의 깡다구]

내물 이사금대 백제와 충돌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내물이사금 18년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00명을 이끌고 투항해오자

내물이사금이 이들을 6부에 나눠살게 했고

 

백제 최전성기 임금이던 근초고왕은 분노하여

 

<근초고왕>두 나라가 화목하여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왕은 우리 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

대왕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기를 바란다

 

이에 내물 이사금은

 

<내물 이사금>백성이란 항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왕이 그들을 돌보아 주면 오고 ,

힘들게 하면 가나니 ,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대왕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 ?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백제가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백제 최전성기 임금 근초고왕이 신라에게 백성 내놓으라 요청한 것이었음에도

내물왕이 요리조리 거절한 것을 보면

내물왕도 깡다구가 ㅈ됬고 

이런 약소국 신라의 깡다구는

훗날 신라를 보호해주던 고구려에 대한 반격 ,

나당동맹을 파기하고 당나라와의 전쟁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애증의 라이벌 신라와 백제

 

백제 명검 칠지도

 

신라 목재 명검(명기)

 

[구해줘 고구려 !]

백제 근초고왕은 백제+가야+왜라는 연합동맹을 맺어

신라를 압박해왔고

신라 내물이사금은 삼중압박에 고립되다 결국 북쪽의

고구려에게 줄을 대기로 결심하였고

 

내물이사금 37년 정월 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내물 이사금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김실성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내물이사금 38년 5월 여름

왜인이 와서 신라수도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자

신라 모든 장병이 나가서 싸우기를 요청했고

내물이사금은

 

<내물이사금>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하고 성문을 닫았고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습니다

 

이에 내물이사금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해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내물이사금 45년(400년)

백제+왜+가야 세나라의 대대적 신라침공이 벌어졌고

내물이사금이 동맹국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자 광개토대왕의 5만군대가

실성과 함께 내려와 신라를 구원하고

퇴각하는 연합군을 가야 종발성(양산 , 김해)까지 쫓아

왜군을 격퇴했고

이로인해 신라는 이때부터 완전한 고구려의 속국이 되고

주신고군 (주신라고구려군 , 주한미군 느낌) 이 신라 금성을 보호하게 됩니다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원래 우리 약소국 찐따 신라는

그림도 못그리고 예술도 못하고

돈도 없고 인구도 없는 찐따중의 상찐따 , 그지중의 상그지 친구였지만

따뜻한 응디찾는 능력 하나는 기가막혔고 !

 

동아시아 예술 게임끝내러온 백제 금동대향로 피규어

 

안습하고 천박한 신라 피규어 ;;

 

위대한 백제 왕실 장난감 목화자단기국

 

안습한 신라 왕실 장난감 , 신라 월성궁궐에서 출토된 여성용 장난감 각좆(돌기 ;;)

 

원래 건국초부터 백제(마한) 를 상국으로 섬기며 백제 응디에 붙어

중국 문물 받아먹고 가야랑 왜한테 성희롱당하다가

고구려의 강성함을 느끼자 북쪽 고구려 응디가 더 따스함을 깨닫고

곧바로 백제 손절때리고 고구려응디에 찰싹 붙어버렸고

 

분노한 백제가 가야와 왜친구들을 데려와 신라를 짓밟으려 했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응딩이는 너무 단단해서 뚫을 수 없었고

신라는 광개토코인에 탑승해 한동안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나라의 멸망을 막고 수십년동안 공짜로 고구려안보에 무임승차에 성공합니다

 

비록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신세로 전락했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 역시 완전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킬 국력은 안됬기에

신라와 동맹을 맺어 남방의 맹주였던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맞았고

 

(백제가 영토는 작아도 인구가 고구려보다 많고

백제 부용국인 왜까지 합치면 인구가 저그수준이었기에

군사력강하고 땅은 넓지만 인구가 백제보다 딸렸던

프로토스수준인 고구려도 백제를 함부로 멸망시킬 수가 없었음 ,

신라는 이도저도아닌 테란인듯 ㅋ)

 

신라역시 수도에 고구려 군사를 주둔시키고

굴욕적인 종속을 선택지만 나라의 멸망을 겨우겨우 막은 상황에

갑자기 고구려 속국이 된 신라 내물이사금 역시 충격을 받고 몸져누웠고

 

시무룩해진 내물이사금

 

하여튼 , 결국 백제 근초고왕에 이어 삼국의 두번째 패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돌아갔고

내물이사금이 죽자

신라는 내물이사금에게 눌지 , 복호 , 미사흔이라는 아들이 있었음에도

주신라고구려군의 통제를 받는 이상

고구려에서 볼모생활을 했으며

고구려영향을 받은 김실성을 차기 임금으로 올리게 됩니다

 

[실성이사금의 복수]

내물이사금이 죽자

고구려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김실성이 왕위를 이어

신라 18대왕 실성이사금이 됐고

 

실성이사금은 고구려에서 돌아온지 불과 1년만에

내물이사금이 승하하자마자 왕위를 이었고

9년간 고구려생활을 했던 김실성이 신라에 세력도 없음에도

곧바로 왕이 된 것은

바로 고구려의 입김때문이었고

신라도 고구려의 보호국이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친고파(친고구려파)인 실성을 왕위에 올린 것이었습니다

 

실성이사금은 마지막 석씨왕실의 불꽃이었는데

몰락하고있던 석씨왕실은

어머니가 석등보 아간의 딸이었던 김실성을 적극 지원사격했고

훗날 실성왕이 몰락하자 석씨들도 같이 몰락하게 됩니다

 

실성이사금은 즉위하자마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셋째아들 김미사흔을 인질로 보냈고

 

말이 우호관계를 맺고 인질로 보내는 것이지

실제론 실성이사금이 선왕 내물이사금의 아들들을 전부 제거하려고

영악한 수를 써서 보낸것이었고

 

아무리 옛날이어도 왕위를 이을 후사는 항상 있어야하기에

일반적으로 인질은 왕자가 아닌 고위귀족 자제들을 보내는게 매너인데

실성이사금은 옛날 위기상황에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내물이사금에게

어떤 앙금이 있었고

즉위하자마자 복수하려 내물이사금의 아들들을 외국에

화친이라는 명목으로 보내버렸고

한때 왕자였던 사람들을 숙청하려는 ,

당시사람들이 봐도 너무 속내가 뻔히 보이는 눈꼴시려운 짓을 해버립니다

 

미사흔을 왜국에 보냈음에도

왜인들은 미사흔을 살려두고 미사흔에게 밥은 주며

계속 신라를 침공해왔고 (이럴거면 왜보낸거냐 ;;)

 

실성이사금 7년 2월 봄

실성이사금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신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려했고

 

서불한 미사품은

 

<미사품>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라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 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

 

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

 

이에 실성이사금이 의견을 따랐습니다

 

실성이사금은 

실성이사금 11년

내물이사금의 둘째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보냈고

 

셋째아들 미사흔에 이어 둘째아들까지

외국에 화친을 이유로 보내버린 실성해버린 실성왕입니다

 

겉보기엔 화친이라는 의도가 좋아보이나

사실상 선대임금의 아들들을 외국에 넘겨버린

실성이사금의 흉계였습니다

 

(이전 석우로의 죽음을 방치한 첨해이사금과 유사)

 

[김실성 VS 김눌지]

실성이사금은 예전 고구려에서 인질로 갔다 돌아온 후

왕이 되고나서 내물이사금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며

내물의 아들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했고

이렇게 내물이사금의 셋째아들 미사흔 , 둘째 복호까지

왜와 고구려에 보내버린 실성이사금은

마지막 첫째 눌지까지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고지내던 사람을 불러와

은밀히 그에게

 

<실성이사금>눌지를 보거든 죽여라

 

고 말했고

그는 자객으로 눌지를 죽이러 갔는데

 

그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가 쾌할하고 정신이 고상해

군자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고

그가 도리어

 

<고구려 자객>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했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다

 

고 말하며 돌아갔고

 

 

눌지가 이를 원망해 실성이사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때 실성이사금의 모계였던 석씨왕실도

같이 몰락했던 것이라 학계에선 보고 있습니다

 

석씨왕실은 이후에도 신라에 왕은 못 되어도

계속해서 왕비족으로 참여한 박씨왕실에 비해

폭군이었던 실성왕에게 가담한 죄 때문인지

신라 왕실에서 완전히 나가리 되었고

이후부터는 신라는 완전한 김씨시대로 전환됩니다

 

[눌지마립간과 마립간]

이로인해 김눌지는 신라 19대왕 눌지 마립간이 되었고

눌지왕때부터 신라는 이사금칭호를 버리고

마지막 신라 왕칭호 고유방언인 마립간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내물마립간이 시초라고도 함)

 

마립은 방언으로 '말뚝' 인데

말뚝은 함조로서 직위에 따라 놓고

왕말뚝이 중심이 되고 신하 말뚝은 그 아래에 나열하는데

이를 가져와 왕명으로 삼았다하고

조정에 신하들이 대충 직위 순으로 자기 이름박힌 말뚝이 있었고

 

조선시대 사극보면 직위순으로

왕이 의자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앞에 영의정 , 좌의정과 우의정이 대충 서있고

짬밤낮은 신하들이 뒤에 서듯이

 

신라시대에는 조정에 말뚝이 박혀있고

그 자리로 신하들이 순서대로 서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 자기 이름 명패 비슷한듯)

 

또한 오늘날에도 집안 가장을 기둥이라 하고

기둥 , 말뚝이 남성의 성기 ,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기에

마립간이 이런것에서 따온 명칭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임금컨셉 미치겠다ㅋ

 

[한국위인 왜에서 죽은 충신 박제상]

그렇게 눌지마립간 김눌지는 우여곡절끝에 자기를 죽이려한

실성이사금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외국에 인질로 간 자신의 둘째 , 셋째동생 복호와 미사흔이 마음에 걸렸고

이에 변사(변호사의 그 말씀 변자와 같음) ,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구하여

그들을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눌지마립간은 수주촌 간 벌보말과 일리촌 간 구리내와

이이촌 간 파로 세 사람이 어질고 지혜롭단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눌지마립간>나의 아우 두 사람이

왜국과 고구려 두 나라에 인질로 가서

수 년 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인 까닭에

보고 싶은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지라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세 사람>신들이 듣건대 삽량주 간 제상은

사람이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다 하니 ,

그가 족히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눌지마립간은 박제상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세 신하의 말을 전하며 고구려로 가주기를 요청하니

박제상이 대답했습니다

 

<박제상>신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나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

 

 

[구우일모]

제상은 드디어 빙례(조공품)를 갖추고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말했습니다

 

<박제상>제가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합니다.

만일 인질을 서로 주고 받는다면

이는 오패(춘추시대 다섯패왕)만도 못한 것이니

실로 말세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우리 임금은 척령(할미새)이 들판에 있는 듯이

영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 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아홉마리 소 가운데서 뽑은 털 하나) 격으로서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

 

우리 임금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함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유념하여 주소서 !

 

고구려 장수왕은 

 

<장수왕>좋다

 

하면서

그들이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왜국에 간 박제상]

그들이 신라로 귀국하자

눌지마립간은 기뻐하고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눌지마립간>나는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두 팔과 같이 하는데 ,

이제 다만 한 팔만 찾았으니 어찌 해야 하는가 ?

 

박제상이 대답했습니다

 

<박제상>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도 역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우칠 수 있었지만 ,

 

왜인들은

말로써 달랠 수 없으니

속임수로써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합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반역하였다는 죄를 씌우고

이 소식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소서

 

박제상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이 소문을 듣고

포구로 달려가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며 말했습니다

 

<박제상 아내>잘 다녀 오시오 !

 

박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박제상>내가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라 하고

드디어 그 길로 곧장 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마치 모반하다가 그곳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왜왕이 그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얼마 전에 백제인이 왜국에 가서

 

<백제인>신라와 고구려가 모의하여

왕의 나라를 침공하려 한다

 

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왜국에서는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염탐하게 했습니다

그 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염탐꾼을 모두 잡아 죽였고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으며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가족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박제상이 정말 배반자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왜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수 겸 향도(앞잡이)로 삼았습니다

 

행렬이 바다에 있는 산으로 된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신라를 멸한 뒤에는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오자고 은밀히 의논하였고

박제상이 이를 알고도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 같이 행동하니

왜인들은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좋아했습니다

 

이 때 ,

박제상이 미사흔에게 슬며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고

미사흔은

 

<미사흔>내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돌아가겠습니까 ?

 

라고 대답했고

박제상이

 

<박제상>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에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안고

울면서 하직하고 몰래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박제상은 방안에서 혼자 자다가 늦게야 일어났고

이는 미사흔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멀리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국의 여러 사람들이 박제상에게

 

<왜인들>장군은 왜 늦게 일어나느냐

 

고 묻자

박제상은

 

<박제상>전 날 배를 탔더니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고 했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왜인들은 마침내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고

박제상을 결박해 놓은 채

배를 풀어 추격했고

때마침 안개가 대단히 짙게 끼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인은 박제상을 왕의 처소로 돌려보내고

곧바로 목도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습니다

 

[계림의 신하 박제상]

원래 왜왕은 박제상의 됨됨이를 높게 여겨

죽이기를 아깝게 여겨 그에게 신하가 되기를 회유했습니다

 

<왜왕>너는 어찌하여 너희나라 왕자를 몰래 보내었느냐 ?

 

<박제상>나는 오로지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나는 단지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했던 것뿐이오

어찌 당신에게 말할 있었겠소

 

이에 왜왕은 노하여 이르기를

 

<왜왕>이미 너는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다섯가지 형벌 모두 것이나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필히 후한 녹을 상으로 것이다

 

<박제상>차라리 계림의 돼지가 될지언정 ,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다

 

충신 박제상

 

이에 왜왕이 노하여 박제상의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위를 걷게 했습니다

 

<일연>지금 갈대의 붉은 빛깔이 나는 것은 제상의 피라고 한다

 

왜왕은 다시 

 

<왜왕>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라고 하자

 

<박제상은>나는 계림의 신하다

 

이에 왜왕은 쇠를 달구어 위에 제상을 세워 놓고 묻기를

 

<왜왕>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라고 하자

박제상은

 

<박제상>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박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에서 태워 죽였습니다

 

눌자마립간은 이 소문을 듣고 애통해 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물건을 하사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함으로써

은혜에 보답케 했습니다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눌지마립간은 6부에 명령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게 하였으며 ,

그를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습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겼으며 ,

눌지마립간이 가무를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향악 가운데의 우식곡이

그것이었습니다

 

[박제상의 아내 치술신모]

박제상의 부인도 그지아비에 그아내였는데

처음 박제상이 왜국으로 출발해 떠날 때에

박제상의 부인이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남쪽의 모래 언덕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부짖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래 언덕을 장사라고 하며

친척 사람이 부인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쳐 일어서지 않으려 습니다

 

이에그 땅을 벌지지라 불렀고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 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주었습니다

 

별개로 이런것 때문에 박제상의 박씨일족들은

신라에서 왕비족으로 높게 여겨져 계속 살아남았고

반대로 실성왕에게 줄을 잘못댄 석씨일족들은 몰락한 것이고

박제상이 김씨라는 말도 있지만 하여튼

이런것때문에 박씨일족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게 됩니다

 

한국충신시조 박제상 사당 , 영조때 지어진 치산서원(울주군 두동면)

 

[눌지마립간의 나제동맹]

눌지마립간은 그동안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화 된 것을 경계하며

점차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당시 위기에 몰린 백제역시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라와의 동맹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눌지마립간 17년 7월 가을

백제가 사신을 파견해 화친을 요청하자

눌지마립간이 이에 응했습니다

 

눌지마립간 18년 2월 봄

백제왕(비유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왔고

9월 가을

다시 백제왕이 흰 매를 보내왔습니다

 

10월 겨울

눌지마립간에 황금과 명주로

백제에 답례했습니다

 

나제동맹

 

눌지마립간 34년 7월 가을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 벌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군사를 보내 그를 습격하여 죽였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이를 듣고 분노하여

사신을 보내

 

<장수왕>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였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

 

라고 말하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했고

눌지마립간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그들이 돌아갔습니다

 

[집안에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 !]

고구려의 간섭에 점차 신라내에 반고구려 감정이 폭발하던 상황에

이 사건까지 일어나자

눌지 마립간은 이를 계기로 고구려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고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부터 신라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했는데

고구려군 1명이 교대하고 고구려로 돌아가며

말몰이 심부름하던 신라사람에게

 

<고구려군>너희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고 말했고

이 말을 듣고 신라인 말몰이는 배가 아프다 거짓말하고 빠져나와

신라에 사실을 알렸고

눌지마립간은 고구려가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켜준다는게 거짓말임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사람들에게 이와같이 말했습니다

 

<눌지마립간>백성들이여 ,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 !

 

고구려인들은 머리에 새깃털을 꽂는 관모 조우관을 즐겨 사용했고

이에 신라백성들은 눌지마립간의 뜻을 알아듣고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인들을 모두 몰살시켰고

 

이에 장수왕은 격노해 신라를 침공했지만

신라는 가야왕에게 원군을 청해 고구려군을 물리쳤고

한반도는 그렇게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남북구도가 형성되게 됩니다

 

[자비마립간의 백제구원]

눌지마립간이 사망하자

눌지마립간의 맏아들 김자비가 왕위를 이어

신라 20대왕 자비마립간이 되었고

 

자비마립간때도 역시

왜인들이 신라에 자주 침략해왔고

더해서 이젠 적이 되버린 고구려가 남진해왔는데

자비마립간은 나라 안에 여러 성들을 쌓으며 방어했습니다

 

자비마립간 17년 7월 가을

고구려 장수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해오자

백제 개로왕이 태자 부여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였고

자비마립간은 군사를 보내 구원토록 했는데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백제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고

또한 개로왕은 고구려 군사들에게 죽었습니다

 

[한국위인 떡방아 노래 백결선생]

자비마립간 시대에는

신라에 한국 음악위인 백결선생이 살았습니다

백결 선생은 어느 곳 사람인지는 알 수 없고

그는 낭산 밑에 살았는데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는 백 군데나 기워 마치 메추라기를 달아맨 것 같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리(동쪽마을) 의

백결(백개의 기운옷)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일찍이 영계기(춘추시대의 은자) 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쁘고 성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과 불평스러운 일을

모두 거문고로써 풀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이웃에서 곡식을 찧으면

그의 아내가 방아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백결선생 아내>남들은 모두 찧을 곡식이 있는데

우리만 곡식이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쇠리오 ?

 

하니 

백결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기를 

 

<백결 선생>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가도 좇을 수 없는 법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 아파하는가 ?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하겠소

 

라 하고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소리를 내었습니다

세상에 이것이 전하는데

그 이름을 방아타령(대악 碓樂 , 방아 대 음악 악)

이라 했습니다

 

백결선생

 

[마지막 마립간 소지마립간]

자비마립간이 사망하자

자비마립간의 맏아들 김소지가 왕위를 이어

신라 21대왕 소지마립간이 되었고

소지마립간은 신라 마지막 마립간이며

소지마립간 다음왕인 지증왕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라는 국호를 신라로 통일시키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 으로 바꾸었고

 

신라 지증왕때부터 한국은 마지막 왕국 조선 고종왕까지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기에

소지마립간은 한국 마지막 전통고유방언으로 불린 임금입니다

 

소지마립간은 신라에 우역 , 출장관리의 숙박편의 등을 위한

지역 거점 숙소 겸 우편소 , 역망 같은 시설을 설치했고

 

[소지마립간의 결혼동맹]

소지마립간 15년 3월 봄

백제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고 (결혼동맹)

신라 소지마립간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내

백제 동성왕은 자비마립간의 손녀와 결혼하며

신라와 백제왕실은 결혼동맹으로 하나로 이어집니다

 

소지마립간 17년 8월 가을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했고

소지마립간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케했고

고구려 군사가 궤멸하자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했습니다

 

 

[정월대보름의 유래]

소지마립간 10

소지마립간이 천천정에 나들이하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우는데 ,

쥐가 사람말로 이르기를

 

<쥐>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

 

했습니다

소지마립간이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하여

남쪽의 피촌에 이르렀는데 ,

돼지 마리가 싸우고 있어 이를 한참 살피다가

홀연히 까마귀가 곳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변을 배회하는데 이때 늙은이가 연못 가운데서 나와 글을 바쳤습니다 

겉봉의 제목에 이르기를

 

<종이봉투>열어보면 사람이 죽을 것이요 ,

열어보지 않으면 사람이 죽을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고

기사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니 ,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느니 오히려 열어보지 않고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했습니다

 

일관(日官 , 관측관 겸 궁실점쟁이) 나서서 말하기를

 

<일관>두 사람은 서민이요 , 사람은 왕입니다

 

라고 했고

소지마립간이 놀라 열어 보니(둘이 죽을지언정 내가 죽는건 못참지 ㅋㅋ) 편지 가운데

 

<편지>거문고 갑을 쏘라

 

적혀 있었고 소지마립간 궁에 들어가서 거문고 갑을 쏘았습니다 

곳에서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승려가 왕비 은밀하게 간통을 하고 있었고

사람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해마다 정월 상해일,  상자일,  상오일에는

모든 일을 조심히 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고

15일을 오기일로 삼아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 이를 행했습니다

향언으로 이것을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려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15일 오기일이 바로 오늘날 정월 대보름이며

정월 대보름은 이후 조선시대까지 천년 이상을 오늘날까지

귀신쫓으려 찰밥(찹쌀밥) 에 나물먹는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고

현재도 우리가 별 생각없이 정월 대보름에

팥죽 , 고사리나물에 찰밥먹고 그러는데

한국 고유 민속명절이고

어찌보면 설날보다 더 중대하게 여길정도로

한국인들에겐 성대하게 놀면서 치르는 큰 명절이 됐고

신라 소지마립간때부터 고려 , 조선에 이어 대한민국과 북한에까지

이어지는 한국인들의 고유행사입니다

 

맛있는 정월대보름 음식

 

또한 ,

이 기록이 중요한게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들여왔는데

가뜩이나 반고구려 , 나제동맹으로 반고구려정서가 심화된 당대신라였고

이런 상황에서 신라내에 승려들은

대부분 포교를 위해 고구려에서 오는 승려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왕비와 승려가 떡가지 쳐버리자

NTR에 상처입은 소지마립간은 반불교를 다짐해

법흥왕이전까지 신라는 반불교국가가 되었고

법흥왕때도 신라는

승려에게 왕비 NTR+고구려 승려들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불교를 무탈하게 들여온 고구려 , 백제와 달리

엄청나게 큰 진통을 겪으며 불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소지왕과 벽화부인]

소지마립간 22년 9월 가을

소지마립간이 날이군(경북 영주로 추정)에 행차했는데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고

파로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 했습니다

 

(벽에 그리는 그림 벽화가 아니라 이름이 벽화임)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소지마립간에게 바쳤습니다

 

소지마립간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고

소지마립간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고

 

소지마립간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고

어느 날은 역시 평복으로 변장해 민가에 나온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소지마립간이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변장한 소지마립간>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

 

노파는

 

<노파>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

 

소지마립간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 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신라인의 사랑토기

 

소지마립간 22년 겨울 11월

소지마립간이 사망했습니다

 

소지마립간은 여러 상황속에 자식도 없이 사망했고

벽화 뱃속에 아들이 있을때 사망한 것이었는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고 있던 소지마립간의 6촌형 김지대로는

소지마립간이 왕비 빼앗김+아들없음에

자신이 다음왕이 될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가

뒤늦게 소지마립간이 소녀 벽화를 임신시키는데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마누라 박씨일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도 있고

 

소지마립간 말년이 의문사라서 이야기가 많은데

또한 하필 벽화 출신지가 영주-봉화지역으로

신라 영토지만 고구려의 실질적 지배를 50년 이상 받은 지역이라

신라 중앙왕실에서는

소지마립간이 충성심이 의심되는 지역 호족딸을 별실에 데려와

은밀하게 후궁으로 삼은 소지마립간의 행실을 크게 문제삼고

소지마립간이 의문의 승하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됬다는 얘기도 있고

저는 지증왕이 굉장히 그냥 좋은 백성을 사랑한 왕으로 보았는데

최근들어서 지증왕 쿠데타설도 주의깊게 읽었고

 

실제로 지증왕이 실력 , 인성 , 꿈과 야망 등 여러 면에서

한국사 세종대왕급의 투톱 성군이자

신라 아웃풋중 최고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옛날 민주주의도 아니라 혈통제 왕실상황에서

더더욱 엄격한 신라골품제로 왕이 아들을 출산하면

능력이 있어도 왕이 될 희망을 품기 어려웠던

신라 왕실 , 왕조국가내 상황상

어느덧 60대에 다다르며 급해진

지증왕 김지대로와 지증왕비 연제부인 박씨 일족이

능력이 매우 뛰어남에도 왕위계승이 어려워지는

답답함에 보다못해 쿠데타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겠고

일단 여기까지 신라 고대고유왕호인 마립간시대였고

소지마립간 시대로 마립간칭호는 끝나고

지증마립간 , 지증왕은

마지막 신라마립간이자 최초의 신라왕이 됩니다

 

<라봉봉>신라가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

김씨임금시대 이야기였고

신라는 라이벌 백제를 상대하긴 커녕

백제 오른팔인 왜국한테도 빌빌댈 수준으로 초기 신라가 굉장히

안습하고 국력이 약한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백제+가야+왜 삼중연합에 다구리맞다가

겨우 고구려에 빌붙어 목숨을 연명하던 상황의 신라가

끝내 삼국을 통일할 줄은 아무도 생각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이야기까진 삼국통일 주인공 김신라의 고난의 행군시기였고

다음이야기부터 본격적으로 신라는 꽃을 피워내게 되는 것이고

백제 , 고구려는 이미 이 시기에 일찍 꽃을 피워

동아시아의 강대국 , 문명국으로 자리잡은 상황이었고

신라는 굉장히 느렸지만 지증왕의 등장으로 새국가건설을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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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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