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평왕 시기 인물들>
[진지왕과 전륜성왕]
[노리부]
[진지왕의 폐위]
[도화녀와 비형랑]
[부처를 낳고 싶었던 진평왕 일가]
[신라삼보 천사옥대]
[인물이 많았던 진평왕 시기]
[임금님 사냥좀 그만해 ! 간언왕 김후직]
[대세와 구칠의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세속오계 귀산과 추항]
[삼국통일전쟁의 방아쇠]
[서동과 선화공주]
[서동 VS 김용춘]
[임전무퇴 찬덕과 해론]
[임전무퇴 눌최]
[정혼자를 기다린 설씨녀]
[무의미한 충신과 의국지사들]
[아첨안해 ! 실혜]
[곡식 안훔쳐 ! 검군]
[끝판왕 김유신]
<라봉봉>
[진지왕과 전륜성왕]
이번 이야기는 진평왕 시기 인물들로
진평왕 시기는 아예 독립적으로 따로 다뤄도 좋을만큼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은 시기고 썰도 엄청 많은
신라 상고시대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설의 시대고
물론 이게 좋은 전설일 수도 나쁜 전설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진평왕 시대 이야기를 읽으면
뭔가 음산하거나 구름에 뒤덮힌 전설의 시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진흥왕이 사망했을때
진흥왕의 태자 김동륜이 일찍 죽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아들 김사륜이 왕위를 이어
신라 25대왕 진지왕이 되었습니다
진흥왕 아들들 이름에 바퀴 륜(윤) 자가 들어가는데
(첫째 김동륜 , 왕자 김사륜 , 김구륜)
이는 불교의 전륜성왕사상에서 가져온 것으로서
전륜성왕은 불교에서 황제 , 제왕을 의미하고
당시 신라 왕실이 자녀들 이름까지 불교식으로 지을 만큼
불교에 열성적인 상황이었다 보면 되고
이는 당시 옆나라 백제도 마찬가지라 진흥왕이 전사시킨 백제 왕이
바로 성왕일만큼 백제 , 신라 양국이 모두 불교에 심취한 상황이었습니다
진지왕은 즉위하자마자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신라 최고벼슬)에 임명하여
나랏일을 맡겼고
[노리부]
진지왕 2년 10월 겨울
백제가 서쪽변경을 침공하자
이찬 세종(노리부) 로 하여금 일선 북쪽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3천 7백명을 목베었습니다
이찬 세종은 세종대왕의 세종과 한자가 같으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세종대왕인데
이름이 김세종일 만큼 간지철철한데
금관가야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장남으로서
원래 가야태자였던 인물인데
구형왕이 신라에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자
순순히 항복한 덕분에 가야왕실은 신라귀족으로 합류할 수 있었고
특히 가야계는 장군쪽으로 활약하였고
김세종은 동생 김무력에 비해 묻히지만
신라 명장으로 활약한 인물이었고
이름이 세종 혹은 노리부라 불리는데
전혀 딴판의 이름같지만
세상의 순 우리말이 누리로서
누리는 굉장히 중요한 순 우리말이라
옛날 박근혜 새누리당이 이런 것때문에 누리를 가져와 사용한게 유명하고
옛날 우리나라는 한글이 없었던 시기에
중국한자를 가져와서 순우리말을 훈차하거나 음차해서 기록했기에
훈차하여 세종이라 쓰거나 음차하여 노종 , 노리부라 썼습니다
또 박혁거세 역시 삼국사기에 다른 이름이 '불구내' 라 하는데
붉은 누리의 준말로 여겨지고 있고
저는 붉은 세상은 무슨 북한이나 소련도 아니고 좀 이상하기에
박혁거세 불구내가 밝은 누리 , 밝은 세상이 아닐까 생각되고 하여튼
신라에 국조 , 시조 불구내를 시작으로 노리부까지도 누리라는 이름이 유행했고
밝은 세상을 꿈꾼 신라인이었다 생각되고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가 일본장교때 만주국 신천지나
경상도가 텃밭이라 신라 누리사상 영향을 골고루 받았기에
새누리당 칭호를 사용한게 아닐까도 싶고
정치색과 별개로 임금으로서도 가장 좋은 호칭이 태종(Big) , 문종(Book) , 성종(Success)도 아니라
세상 , 월클을 의미하는 세종(World)이듯이
새누리당은 한국 정당 이름중에 가장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튼 , 신라나 고대 한국이름은 훈차나 이런게 있어
이름이 여러개고 이런것 때문에 삼국유사에서는 이사부가 박이종이라 나오는데
성씨는 모르겠지만 이종이라는 뜻에서
이는 이사의 축약형이고 종은 부에 대응되기에
이사부는 한자로 이종 , 노리부는 한자로 세종이 되는 것이고
당시 거칠부도 있었고 당시 신라에 이름 끝에 부로 끝나는게 유행이었나 봅니다
하여튼 ,
김세종 노리부는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전에서도 참여해 공을 세웠고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내례부라 나와서
당시 이사부 , 노리부 , 김무력 삼총사가
신라에서 대활약하며 영토를 크게 넓히는 세 명장으로 활약하였고
이렇게 큰 공을 세운 덕분에
가야인들은 신라에서 크게 우대받았고
김세종의 조카손자 즉 김유신은 훗날 삼국통일 업적으로
신라 명예국왕에까지 추존되게 됩니다
[진지왕의 폐위]
이 외에 진지왕은 큰 기록은 없고
재위 4년만에 사망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술과 섹스) 에 빠져서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사람들이 폐위시켰다 나오고 (혹은 화백회의로 폐위)
진지왕이 폐위된후 진평왕의 즉위합니다
[도화녀와 비형랑]
이보다 앞서 사량부 어느 민가 여인의 얼굴과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 , =도화녀) 이라고 불렀고
진지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그녀를 범하려 하니
도화녀가 말하기를
<도화녀>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만승(황제)의 위엄으로도 마침내 얻지 못할 것입니다
했고
진지왕이 말하기를
<진지왕>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
라고 하자 ,
도화녀가 대답하기를
<도화녀>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어찌 다른 마음 가지기를 원하겠습니까
이에 (집착광공) 진지왕이 희롱으로 말하기를
<진지왕>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자
도화녀가
<도화녀>되겠습니다
했고 진지왕은 그녀를 놓아 보내주었습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는데
2년 후에 도화랑의 남편도 역시 죽었습니다
십 여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홀연히 진지왕이 평시와 같이 나타나
도화녀의 방에 들어와 말하길
<진지왕의 영혼>네가 옛날에 허락한 것처럼 ,
지금 너의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
라고 하자 도화녀가 쉽게 허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부모가 말하기를
<도화녀 부모>임금의 교시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하고 딸을 방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진지왕이 이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고
7일 후에 홀연히 종적이 사라졌고
도화녀가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할 때
천지가 진동하며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이라 했습니다
진평대왕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고
비형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집사라는 직책을 주었습니다
비형은 매일 밤 멀리 나가서 놀자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으나
매번 월성(신라왕궁)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에 경성의 서쪽에 있다가서
귀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놀았습니다
용사들이 숲속에 매복하여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에 각각 흩어지고
비형랑도 역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용사들은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왕이 비형을 불러 묻기를
<진평왕>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사실이냐
하자 비형랑이 대답하길
<비형랑>그렇습니다
하였고
진평왕이
<진평왕>그러하면 너는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아 보도록 하여라
했고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리는 귀교(鬼橋 귀신다리)라 이름붙었습니다
진평왕이 또 묻기를
<진평왕>귀신의 무리 가운데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조정을 도울만한 자가 있느냐
하자
비형이 말하기를
<비형랑>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국정을 도울만합니다
진평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했습니다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왕을 알현하니 진평왕은 길달에게 집사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
과연 충직한 것이 비길 자가 없었습니다
이때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진평왕이 명령하여 아들로 삼게 하였고
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였더니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 위에 가서 잤으므로
그 문을 길달문이라 했습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갔으므로
비형이 귀신들로 하여금 그를 잡아 죽였고
이후 그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신라 백성들>성스런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 뛰는 잡귀의 무리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라
이후 신라의 풍속에는 이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습니다
하여튼..
진지왕은 이렇게 유부녀를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쿠데타를 맞아서 폭망했고
신라가 골때리는 나라인게 성골이나 진골이니
골품제로 전국민 노예화 및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나라였지만
또 은근 박석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이으고
맘에 안들면 화백회의나 쿠데타를 일으켜 폐위(탄핵)시키는 형세라
은근 민주적 구석이 있었고
당시 왕실 , 귀족들도 골품제를 순순히 따르면서도
국법을 지키지 않거나 무도하면
왕이라 할지어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던
국가가 신라이고
이미 이전에 눌지왕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
실성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선례나
지증왕이 소지왕을 폐위시키고(지증왕 쿠데타설) 즉위한 선례가 존재하였으며
특히 지증왕 쿠데타설을 정설로 생각해본다면
지증왕때 지증왕과 지증왕과 결탁한 박씨세력들이
소지왕의 비행을 샅샅이 살펴서 대충 어떠한 무슨무슨한 죄를 만들어서
폐위시켰을 것이고
이런 풍조때문에
진흥왕때 신라장수 도도가 백제 성왕을 포획한 후 참수할때
성왕이
<성왕>왕의 머리를 노비(천한 자)의 손에 줄 수 없다
하자
<도도>우리나라(신라) 에서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실성왕 , 소지왕)이라 하더라도
노비(눌지왕 , 지증왕)의 손에 죽습니다
하였고 성왕의 목을 베었고
괜히 도도가 백제왕 목 치기전 멋있게 분위기 잡으려 한 말이 아니라
왠만한 전제군주정에서는
왕이 잘못해도 열심히 충언해서 고쳐야한다 가르치지
국가의 장수가 자기나라 왕도 잘못하면 목을 벤다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데
신라 장수인 도도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당시 신라왕실은 왕이라 할지라도 잘못한게 있거나
법령을 어긴다면 곧바로 노비(하급자)에게 목을 베인다고 여기는 풍조가 존재한 것이었고
진지왕이 무능하고 유부녀를 건들이려하자
당시 신라에서는 한창 전성기를 맞으며 백제 , 고구려라는 대국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할만큼 삼국패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며
신라 왕실을 성스러운 풍조로 여기며
자신들을 성골이자 부처의 일원이라 여기고 있어
자부심이 엄청나게 넘치고 있던 신라 왕실에서
매우 빡이 돌아서 빠꾸없이 진지왕을 바로 폐위시킨게 아닐까 싶고
마치 조선후기 전성기를 연 영조임금이
계속 살인과 비행을 일으키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에
임진왜란 , 병자호란으로 바닥을 찍다가
겨우겨우 다시쌓아서 회복시킨 조선왕실의 위엄이 흔들릴까 두려워
바로 죽여버린 것처럼
한창 당시 신라가 전성기로 자부심이 엄청나던 시기로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성스러운 임금의 피가 이어진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절대왕권을 행사하던 당시 신라왕실에서
성스러운 존재라 여겼던 임금이
유부녀나 겁탈하려는 필부의 행세를 보이자
성스러운 피가 흐른다는 성골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신라왕실 , 귀족들이 곧바로 칼을 빼들어 진지왕을 폐위시킨게 아닐까 싶습니다
[부처를 낳고 싶었던 진평왕 일가]
하여튼 ,
진지왕이 폐위되자
진흥왕의 태자 김동륜의 아들 김백정이 왕위를 이어
신라 26대왕 진평왕이 되었고
왕비는 마야부인 김씨입니다
여기서 백정과 마야라는 진평왕 부부의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신라는 불교에 심취하고 불교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기위해
자신들을 부처의 일가와 동일시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슈도다나로서
정반왕 , 백정왕이라 불리고 있으며
즉 아예 진흥왕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이름을 아예 싯다르타 아버지로 지어버렸고
더 웃긴게
싯다르타 아버지 백정왕의 부인이 마야부인인데
진평왕 김백정의 부인이 마야부인 김씨이라서
대놓고 신라왕실은 이름까지 석가모니 일가를 카피해버렸고
진평왕 김백정은 그렇게 마야부인과 결혼하였고
당시 신라 왕실과 백성들은 그렇다면
김백정과 마야부인 김씨가 아들만 출산한다면
곧바로 부처 , 싯다르타가 탄생하는 상황이라 (기도메타 ㅋㅋ)
신라 왕실에 엄청난 기대를 하던 상황이었고
요즘식으로 치면
차마 아들 이름을 대놓고 김예수 , 박지져스 라고는 못짓고
손자대에 예수같은 인물이라도 태어나라는 의미로
김요셉(예수 친아빠) , 김마리아(예수 친엄마)로 지어버렸고
대놓고 김요셉과 김마리아를 결혼시켜서
아들은 예수같은 위대한 성인이 태어나겠지 하며 미신적 요행을 바란 격이고
지금도 김예수 이런식으로 예수님 이름을 감히 자식이름으로 짓기는 너무
광오하고 부담감이 엄청난 이름이기에
(연진이 같은 일진애들이
햄버거와 임연수 튀김을 100개로 만들라거나 물 위를 걸어보라며 괴롭힐수도..;;)
기독교 가정에서는 그냥 무난하고 기독교 느낌 풍기기 좋은
김요셉이나 김마리아 이런 식으로 이름짓는게
요즘도 흔하고
진짜 학교다닐때도 김요셉 이런 이름들은 몇 명 있었던 것 같은데
김예수는 한 명도 없었던 느낌입니다
하여튼..
당시 순장폐지로 성인영역까지 갔었던 지증왕이 만들어준 버스를 타며
개꿀빨며 대전성기를 맞던 신라 왕실에서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지증왕만한 약발이 안나오자
한번 더 지증왕 같은 성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예 이름을 대놓고 부처님 엄마 , 아빠 이름으로 지으며
한 번 더 좋은 임금이 나오길 바라며 기도메타를 올리며
진평왕 김백정 , 마야부부를 결혼시킨 것이었고
불행히도 혹은 운명의 장난마냥
그런 광오하고 심오한 기도메타와는 달리
진평왕과 마야부부는 딸만 셋 낳어버려서
아들(부처)을 못봅니다..
근데
왠만하면 아들 한 명 낳을 것 같기도한데
이런게 진짜 운명의 장난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처럼
옛날 고대에는 현대와 달리 신이 직접 개입한게 아닌가
막 별별 생각이 다들정도로 기가막힌 운명의 장난같이
딸만 셋 태어났고 (아들 딱 한명만 태어나면 부처인데 딸만 3명 가챠 ㅋㅋ)
결국 첫째딸 김덕만이 싯다르타 포지션이 되어버렸고
덕만 , 선덕여왕을 신라에서는 최초의 여왕으로 올리고
선할 선 , 덕 덕 자 시호를 붙여서 신라 왕실에서는
이름만으론 신라에서 손꼽힐만한 최고의 시호를 여자임금에게 바치게 됩니다
[신라삼보 천사옥대]
당시 신라는 한창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지증왕때 국력이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법흥 , 진흥왕때 국토가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왕실에서 정치를 잘하자 국민들이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진 상황이라
이로인해 한창 신라백성들에게 여러 환상과 호기심이 신라 왕실에 씌여지며
진평왕때 신라는 부귀영화 , 금은보석과
신비주의 이야기가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원래 옛날 무서운 이야기보면
귀신들도 가난한 집에 안붙고 부잣집만 달라붙음ㅋㅋ)
유독 진평왕때 여러 초자연적인 설화 , 전설 이야기가 많고
대표적인 예가 '천사옥대' 전설입니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최초의 임금 태조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항복한 뒤
경순왕은 금을 새기고 옥을 두른 허리띠 한 벌을 바치니
길이는 10뼘[圍]이고 과(銙 장식으로 늘어뜨린 고리)는 62개이며
이것이 진평왕의 천사대(天賜帶) 라 하며
태조가 그것을 받아 내고(왕실창고)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데
천사옥대에서 천사는
하늘에서 온 날개달린 사자인 천사 Angel 가 아니라
하늘 천 하사할 사 자로서 하늘에서 내려준 옥 허리띠라는 뜻이며
진평왕과 천사옥대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26대 백정왕 시호는 진평대왕이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고
옛날에 구척장신이란 말이 있어
키가 9척이나 된다하면 보통 1척당 23cm 으로 잡아
207cm 나 190~210cm 라 여겼으니
11척은 일단 진평왕 키가 2미터가 넘었을 것이고
지증왕도 왕체홍대라는 기록이 있어 왕의 체격이 컸고
성기 사이즈가 엄청나게 컸다하니
성골이라 불리던 당시 지증왕계 직계 후손들의 체격이 엄청 컸을 확률이 높고
진평왕 역시 농구선수들마냥 키 2미터의 장신 임금이었을 수 있어서
여러 전설들이 많은 임금일 수 있습니다
하여튼 2m 키의 진평왕은 내제석궁에 행차하였는데
돌계단을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고
진평왕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도록 하라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중의 하나가 됩니다
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전의 정원에 내려와 말하기를
<천사>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했고
진평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으니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무릇 교묘(천지에 제사)와 대사(임금에 제사)에는 항상 이것을 허리에 찼고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 정벌을 도모하면서 말하기를
<고구려왕>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신하가 말하기를
<고구려 신하>
황룡사 의 장육존상이 그 첫째요 ,
그 절의 구층탑 둘째이며 ,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그 셋째입니다
했고 고구려왕이 이 말을 듣고 계획을 그치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 일연>
찬하여 말한다.
구름 밖의 하늘이 준 옥대를 두르니
임금의 곤룡포에 아름답게 어울리네
우리 임금의 옥체 이제부터 더욱 위중해지니
다음에는 쇠로써 섬돌을 만들어야 마땅하네
신라는 황금의 나라 및 삼국통일을 한 나라답게
왕실창고에 신라삼보나 백제 , 고구려에서 쏟아져 온
수많은 보물들이 엄청났던 나라인데
역시 한반도는 몽골의 침략이나 중국과 왜구 등 여러 침략으로
온전한 보물들이 별로 없고 돌이나 비금속으로 된 유물 위주로만 남았고
반대로 일본은 현재까지도 일본왕실창고가 전해져서
엄청 옛날 고대 유물들이 그대로 온전히 보전되있습니다 (부럽..)
현재까지도 하늘에서 주었다거나 평화를 불러온다는
천사옥대 , 만파식적 피리 같은 것은
워낙 전설적이고 역사성이 깊은 유물이라
만약 남아있더라면 숭례문을 제치고 국보 1호는 그냥 했을 것이며
특히 진평왕의 천사옥대는 중국 전국옥새처럼
한국에서는 천명을 상징하는 전설의 물건이었고
조선시대까지 보관했다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천사옥대는 진짜 초자연적인 전설의 유물이지만
장육존상은 일본 동대사 대불처럼 진짜 있었던 한국 대불이라
조선시대 동경잡기에 오직 장육존상만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어서
조선시대까지 확실히 존재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머리 파편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물이 많았던 진평왕 시기]
하여튼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는 모두
진평왕의 체격이 장대했다 기록되어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이 지식도 깊고 의기가 활달했다 합니다
진평왕은 마지막 신라의 전성기 왕이자 최초의 삼국통일전쟁 왕으로서
진평왕 이후부터는 두 여왕 이후 곧바로 태종 무열왕시대가 시작되며
통일신라시대가 시작되기에
사실상 마지막 상대 신라 임금이라 보면 됩니다
진평왕은 즉위하자마자
역시 가야계인 노리부(김세종) 을 중용해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다음해인 진평왕 2년 봄
진평왕은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는
지증왕의 증손자인 이찬 김후직을 병부령(국방부장관) 에 임명합니다
재밌는게
삼국사기 열전인물이 52명이고
백제 5명 , 고구려 8명인데
신라만 39명이라는 압도적인 수고
이중 진평왕만 유독 개인인물들 기록이 많아
귀산 , 해론 , 눌최 , 설씨녀 , 실혜 , 검군 , 김후직이
모두 진평왕때 활약하여서
진평왕때 인물만 7명으로서 백제 700년 총 인물기록보다
진평왕 52년 재위동안 인물이 더 많고
거의 고구려 700년 인물들과 양이 비슷할 정도고
신라의 위엄이자 진평왕시기 한창 삼국통일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때 대백제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들이 많아 그런 면도 있습니다
또 선조시대 이순신 , 유성룡 , 이항복 , 권율 , 김시민 , 논개 등
엄청난 수의 위인들이 출현했지만
그렇다고 선조가 유능한 임금이라 여겨지진 않고
조선전기 세종이 구축한 태평성대를 깬 임금이라 이야기되듯이
만약 진평왕이 더 유능했다면 진평왕시기 인재들이 전쟁에 투입되지 않고
과학기술 발전이나 문화발전에 투입됬을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임금님 사냥좀 그만해 ! 간언왕 김후직]
하여튼..
진평왕때 활약한 신라충신 김후직 이야기를 해보면
김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자로서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고 병부령(국방부 장관) 에 전임되었고
진평왕이 자못 사냥을 좋아하므로
김후직이 간하였습니다
<김후직>
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직간을 받아들이면서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하게 놀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미친 사냥꾼과 더불어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리어
스스로 그치시지 못합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하였고 ,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
그 중의 하나가 있어도 혹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
안으로 마음을 방탕히 하면 밖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십시오
진평왕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
김후직은 또 간절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고
후에 김후직이 병들어 죽을 즈음에
그는 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김후직>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
능히 임금의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이 놀이를 그치지 아니하면 패망에 이를 것이니 ,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이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주려 생각하니
모름지기 내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 가에 묻으라 !
아들들이 모두 그대로 따랐습니다
후일에 진평왕이 출행하여 반쯤 갔을 때 소리가 먼 데서 나는데
<김후직>가지 마시오 !
하는 것 같았고 진평왕이 돌아보며
<진평왕>소리가 어디서 나는가 ? 물으니 ,
시종하던 사람이 고하기를
<시종>저 것이 이찬 후직의 무덤입니다
하고 ,
후직이 죽을 때 한 말을 얘기했습니다
진평대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진평왕>그대의 충성스러운 간함은 죽은 후에도 잊지 않았으니 ,
나를 사랑함이 깊도다
만일 끝내 고치지 아니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을 들겠는가 ?
하고 ,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평왕도 살아있을때 김후직 말 안들은거 보면
골때리긴 하는데
보통 신하가 사냥좋아하는 왕에게 하지말라 조언하면
사냥 좋아하는 왕들은 곧바로 분노하며 신하 목치거나 하는데
의외로 죽이지는 않았고
김후직도 깡다구가 강해서
말 안듣는 진평왕에게 계속 대놓고 사냥하면 망한다 조언했고
이는 김후직이 지증왕 증손이라는 혈통이 있어서
김후직이 일반적 신라 신하가 아니라 같은 신라왕실 일원이라
진평왕도 함부로 못해서 그렇다 생각도 듭니다
[대세와 구칠의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
진평왕 시기는
역시 수많은 인물들이 활약했고
신라는 이전 진흥왕대부터 한강유역을 장악하며
본격적으로 중국과 직접교역을 하며
한창 경상도 내부 마을국가를 넘어서 세계국가들과 교류하게되며
세계적인 호기심이 강해지던 시기였는데
진평왕 9년 7월 가을
대세와 구칠이라는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대세는 내물왕의 7대손이자 이찬 동대의 아들이었고
그는 자질이 뛰어나서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고
담수라는 중과 사귀면서 말했습니다
<대세>신라 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속의 물고기가 바다의 크기를 모르고 ,
새장의 새가 산림의 넓고 한가함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나라 월나라(중국 남부)로 가서 스승을 찾아 ,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어서
광활한 하늘 밖에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노닒이요 ,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라가지 않겠는가 ?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해서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고
그러다가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구칠은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고
드디어 더불어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서
정원 앞에 고인 물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습니다
<대세>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게 되었고
대세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대세>내가 먼저 가네 !
이에 구칠이 불끈 성을 내며 말했습니다
<구칠>나도 또한 사나이다
어찌 나는 갈 수가 없으리 !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 ,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고 구칠은 호응하며 대답했습니다
<구칠>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어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습니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대세와 구칠의 행방불명..)
대세와 구칠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진평왕때부터 신라는 중국과 한강유역으로 직접 교류하며
신라 밖 세계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러면서 점차 중국과 다른
고구려 , 백제 , 신라 세 나라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의복과 풍습을 공유하는 하나의 조선민족임을 느끼게 되며
외부로는 세계와 교류 ,
내부로는 삼국통일의식이 한창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비록 대세와 구칠은 실패해서 풍랑을 만나
남해 바다에 수장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남중국 , 오키나와 , 대만 , 동남아 , 태평양 섬 ,
인도 등 여러 남방지역을 탐험하다
섹시한 훌라춤 잘추는 남방 미녀와 결혼해
달달한 코코넛과 망고 따먹으면서
코끼리도 타고다니며 행복하게 잘 살았을 수도 있는데
신라로 귀환하진 못했고
대세와 구칠의 무모한 모험의식은 훗날에도 계속되어
원효가 당나라로 가려다 해골물 먹고 귀환한 이야기 ,
신라 골품제에 불만을 품은 설계두가 당나라로 가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거나
장보고가 당나라에가서 장수가 되어
신라로 귀환해 청해진을 세운 뒤 한중일 바다의 패자가 되었다거나
최치원이 당나라로 가서 토황소격문을 써서 큰 공을 세우고
신라로 귀환해 대학자가 되었다거나 등
내부적으로 태평성대를 맞던
신라인들은
대세와 구칠 외에도 한창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져
실패하던 , 성공하던지 간에
계속해서 해외유학 , 국제교류를 활성화시키고 있었고
삼국통일 이후부터는 이런 국제교류가 더 활발해졌고
비단 신라 뿐만 아니라 옆나라 왜나 중국인들 역시
한창 서로 교류가 엄청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로서
한중일 세 나라는 신라가 삼국통일한 이후부터는
비슷한시기 통일신라 황금시대 , 발해 전성기 ,
당나라 황금시대 , 야마토-나라-헤이안 시대 견당사 등
똑같은 시기에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되고
어찌보면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시작된 불안한 국제정세속에
앞으로 한중일(+북한)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이런 고대 동아시아 황금시대의 재현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진평왕 11년 3월 봄에도
원광법사가 진나라로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였고
원광법사가 한창 중국에 유학가서 이름나있자
신라 화랑들은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 그 부친은 무은 아간이었고
귀산은 어렸을 때 사량부 사람 추항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귀산과 추항>우리들은 군자와 교유하기를 기약하였는데
먼저 마음을 바르게 아니하면 장차 치욕을 면치 못할까 염려된다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올바른 도리를 묻지 않겠는가 ?
하였고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하다 돌아와
운문산에 있는 가실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귀산과 추항은 원광국사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귀산과 추항>속세의 우리들은 어리석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 가르쳐 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
원광국사가 말하기를
<원광법사>불계로는 보살계가 있어
그 조항이 열 가지가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된 몸이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에 알맞은 오계(五戒)가 있으니 ,
첫째 ,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일 사군이충(事君以忠).
둘째 , 효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일 사친이효(事親以孝).
셋째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는 일 교우이신(交友以信).
넷째 , 싸움에 임하여 물러나지 아니하는 일 임전무퇴(臨戰無退).
다섯째 ,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 살생유택(殺生有擇).
이니 그대들은 이 일을 실천하여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귀산 등이
<귀산과 추항>다른 것은 이미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만
이른바
'생명을 죽이되 가려서 죽인다'
는 말씀은 유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라고 물었습니다
원광이 말하기를
<원광법사>여섯 재일과 봄 , 여름철에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요
(전통적으로 봄=임신의 계절이며 보릿고개시기고 가을=수확의 계절이라
봄여름엔 전쟁을 꺼렸고 이성계도 사불가론에서 여름에 전쟁하면 안된다함)
가축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 , 소 , 닭 , 개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하찮은 것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생물을 가리는 것이고
(현재도 어업에서 수산자원 보존과 지속가능한 어업을 위해
새끼들은 바로 풀어주거나 금어기가 존재함)
죽이는 것 또한 그 소용되는 것만 하지 ,
많이 죽이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세속의 좋은 경계이다
라고 했습니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귀산과 추항>지금부터 말씀을 잘 받들어
실천에 옮겨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세속오계 귀산과 추항]
진평왕 건복 24년 8월 가을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아막성을 포위하므로
진평왕은 장군 파진간 건품 , 무리굴 , 이리벌과 급간 무은 , 비리야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를 막게 하고
귀산, 추항도 아울러 소감으로 삼아 나가게 했습니다
백제군은 패하여 천산의 연못가에 물러나서 복병을 하고 기다렸는데
신라군은 진격하였으나 힘이 다하고 곤궁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섰습니다
이때 귀산의 부친 무은은 후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맨 뒤에 돌아오는데
백제군은 갑자기 복병을 내어 치며 갈고리로 끌어내려 무은을 떨어트렸고
귀산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귀산>내 일찍 원광국사에게
'용사는 싸움 마당에 임해서 물러서지 않는다'
는 말을 들었거늘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
하고 달려들어
적 수십 명을 쳐 죽이고 자기의 말에 부친을 태워 보내고는
추항과 더불어 창을 휘두르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니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분격하여 적을 쳐부수었습니다
이에 시체가 들에 가득히 깔리고
한 필의 말과 한 짝의 수레바퀴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 귀산과 추항은 온 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는 길에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평왕은 군신들과 함께 마중을 나가서
귀산과 추항의 시체를 보고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그들에게 벼슬을 추증하며 영령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진평왕은 귀산에게는 나마를 , 추항에게는 대사를 각각 추증해주었습니다
귀산과 추항은 원광국사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후퇴하는
신라군의 사기를 돋우어 승전으로 이끌고 자기들은 희생했고
이때부터 세속오계는 바로 화랑정신의 근본이 되고
당시의 젊은이들의 생활신조가 되어
통일신라의 터전이 다져진 것이고
마치 대한민국 국군의 복무신조와 비슷한게
신라 세속오계였고
원광법사 , 귀산과 추항은 신라 화랑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게 됩니다
[삼국통일전쟁의 방아쇠]
이렇게 602년인 진평왕 24년
백제의 아막성 공격 , 아막성 전투가 시작되며
삼국통일전쟁이 시작되었고
백제 병력 4만명이 투입된 백제의 본격적인 복수전 시작인데
이전 백제는 554년에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목이 따이고 29600명이 모조리 전사하며
대참패를 겪으며 엄청난 침체에 들어가게 되었고
50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회복하고 무왕이라는 명군이 등장하며
다시 신라에 칼을 뽑게 된 것이었고
진평왕대부터 본격적인 대회전이 시작되며
이전 영토확장전쟁과는 전혀 다른
수도함락 , 병합을 목표로 하는
국가 총력전 , 멸망전이 시작되며 삼국통일전쟁이 시작됩니다
원래 백제의 국시이자 제1목표는 백제 500년 수도였던
위례성 , 한성 탈환이었지만
무왕은 신라의 한강방비가 삼엄함을 알고 허를 찔러
아막성을 공격해 신라 서라벌로 진군하려 했고
무왕의 대공세에도 신라는 중국과 교류하고 비옥한 한강을 포기할 수도 없어서
병사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어 무왕의 전략은 맞아떨어졌고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며 한반도 남부의 영향력을 강화하자
위기를 느낀 백제는 이전 성왕의 복수 및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압박했고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의 움직임에 대비하느라
남쪽을 신경쓸 힘이 없었고 왜국은 내부사정이 어려워서
백제 무왕은 단독으로 신라를 침공한 것이고
신채호 선생님은 조선상고사에서
이 전쟁을 '동서전쟁' 이라 표현하며
더 흥미로운 원인이 있다 서술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백제와 신라의 영토전쟁이 아니라
'왕위쟁탈전' 이었다합니다
[서동과 선화공주]
백제 무왕은 위덕왕을 낳았고
위덕왕의 증손이던 백제왕손 서동은
당대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중에 크게 이름난 상황이었고
진평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었는데
이중 둘째딸 선화가 삼국중 가장 이름난 어여쁜 아가씨였던 상황으로서
그렇게 당대 백제 왕실과 신라왕실은
당대 킹카와 퀸카를 보유하고 있었던 상황인데(오그리 토그리)
진평왕은 항상 말하기를
<진평왕>신라의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버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
하며 늘 선화를 위한 사윗감을 구했는데
비록 무왕과 진흥왕이 악연이 있지만
한때는 신라 진흥왕조차도 백제 성왕의 딸을 왕후로 맞이한 전례가 있고
이전에도 백제와 신라의 결혼동맹이 꾸준히 있어왔기에
점차 미운정도 고운정도 들며 가까워지던 백제와 신라였던 상황이었고
이에 진평왕과 위덕왕은 각각 자신의 이름난 딸과 증손을 위해
둘을 결혼시키려 희망하였고
그러나 이전 성왕의 목을 사위 진흥왕이 베어버리며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고
또한 신라는 이전부터 박 , 석 , 김씨 세 성만이 서로 결혼하여
폐쇄적으로 왕위를 돌려먹던 상황이었고
또한 신라는 아들이 없을 시
성이 다르더라도 사위가 왕위승계가 허락되는 국법이 존재하여서
아들 없던 진평왕에게
백제 왕실인 부여씨가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고
딸밖에 없던 진평왕이 만약 딸을 부여씨에게 혼인시키면
곧바로 다음대에 백제에게 신라 왕위를 넘기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었고
백제는 신라처럼 골품제는 없어서
이런 것에서는 자유로웠지만 이전 성왕이 죽은 것 때문에
위덕왕도 증손 며느리를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후손이자
장인을 죽인 괴악한 사위의 손녀를 맞이할 수 없었기에
서로의 사정이 맞지 아니하였고
그럼에도 무왕 서동은 총명한 인물이었는데
서동은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에
머리를 빡빡 깎고 승려로 위장해 신라로 잠입해
신라 민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공주는 걸레년이라는 헛소문을 노래로 부르게 시켜서
심리전에서 승리해 진평왕이 혼란해진 틈을 타 선화공주를 따먹었고
당시 걸레년로 몰린 서동과 선화공주 커플도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같이 죽기로 계획하였는데
결국 눈물겨운 서동과 선화의 노력에 진평왕 역시 감격하여
'핫 쵸 ~ 서동이 이쉐끼 참 대단한 새끼군..
넌 내 사위로 인정한다 이기야 캬캬캬'
를 시전하였고
위덕왕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잊고
둘의 결혼을 허락해 두 나라는 다시 새사돈 사이가 되어
이로인해 백제와 신라 양국은 전쟁을 멈추고
매우 친밀하게 지내고 서동 역시 처가의 도움으로
백제 왕위를 이어 백제 마지막 명군인 무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당시 백제와 신라 국민들은 전쟁을 잊고
두 나라가 하나로 된다는 평화통일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고
서동선화 결혼후 10년간 두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는데
당시 진평왕은 딸만 셋이었는데
첫째 덕만은 싯다르타마냥 출가해서 여자승려가 되었던 상황이라
둘째 선화와 결혼한 둘째사위인 무왕이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승계한다'
라는 신라국법에 따라 진평왕 사후 왕위를 잇게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신라 국법은 왕조차도 법을 안지키면 목이 베이는
매우 엄격한 국법이 있던 나라였기에
백제와 신라인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역시 600년간 신라 왕실에서는
박 , 석 , 김씨만이 왕위를 이었고
뜬금없이 장가든 부여씨 그것도 수백년간 전쟁을 해오던
백제 왕실에서 결혼한번 했다는 이유로 왕위를 내놓으라 하자
600년간 나라에서는 극심한 반대가 일어나게 되었고
두 나라 신하들은 이 결혼연합 , 결혼병합을 반대하는데
가장 반대한 이는 바로 진평왕의 셋째딸 문명과 결혼한
진평왕의 셋째사위 김용춘이었습니다
[서동 VS 김용춘]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서 서라벌이 아니라 소부리벌(사비성) 에 있으니
진평왕 역시 자연히 애정을 셋째 문명에게 쏟았고
당연 옆나라 임금이 되어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첫째사위 무왕보다는
둘째사위인 용춘에게 마음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김용춘은 곧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로서
진평왕의 셋째사위가 되어서 큰 권세를 얻은 인물이고
신라왕은 못됬지만
왕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 인물로 신라 정계의 큰 실력자였습니다
김용춘은 왕위가 무왕에게 돌아가지만 않으면
곧 자기에게 올 것임을 알았기에
더욱 극심한 반대를 하였고
신라국법이 아무리 지엄해도 진평왕 역시
나라를 뜬금없이 사위란 이유만으로 신라와 600년간 전혀 다른 나라였던
백제에게 넘겨주기도 부담이 너무 컸기에
결국 김용춘의 말을 듣기로 하였고
대신 나름 생각이 있었던 진평왕은
무왕과 김용춘 두 사위를 달래기 위해
둘 다에게 왕위계승권을 주지 않고
결혼하지 않고 출가한 첫째딸 덕만(선덕여왕) 에게 왕위를 주어
왕태녀로 삼되 나라 실권은 김용춘에게 주어
서동과 용춘을 달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명한 서동은 그런 수에 속지 않았고
즉위후에 용춘을 죽이려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며
아막성 전투 , 동서전쟁 , 백제와 신라의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되며
서동과 선화의 사랑(서동요) 혹은
서동과 용춘 두 사람의 왕위에 대한 이기심에서 시작된 다툼은
삼국통일전쟁의 첫 방아쇠를 당기게 됩니다
용춘 역시 처음엔 진평왕 뒤에 숨어 참모가 되어있다가
백제 무왕의 공세가 심각해짐을 느끼고
내성사신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직접 전선에 나타나
악전고투가 해마다 계속되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 이었습니다
동서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백제 양국은 서로를 치고 막고 죽이고 죽이며
수없이 많은 생명과 재산을 버리고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참극을 연출하기에 이르렀고
<신채호>이 전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동서 사이의 신라 왕위의 쟁탈전이었으니 ,
두 사람의 비열한 이기주의의 충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지마는
명의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걸어
피차 그 나라 안의 인심 을 고동하고 명예와 벼슬로 결사의 군사를 동원하니 ,
한편에 비애에 우는 인민이 있음에 불구하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여지승람 합천 부자연의 고적에 의하면
신라가 전쟁이 지루하게 오래 가서 민가의 장정들이 전쟁에 가면
몇 번을 돌아올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했는데 ,
어떤 늙은 아버지가 여러 해 만에야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마중나가 이 소 위의 바위 위에서 부자가 서로 껴안고 울며불며
오래 그리던 자애의 정희와 생활의 곤란을 하소연하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서 이 소에 장사지냈으므로
부자연(父子淵 )이라 이름하였다고 했고...
수많은 희생자가 나타났고
삼국사기 열전 진평왕대 열전인물들이 대부분 이때 희생된
장수와 병졸들이었습니다
귀산과 추항이 아막성전투때 선발로 죽어 열전에 기록되었고
두번째로는 찬덕과 해론이었습니다
[임전무퇴 찬덕과 해론]
찬덕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가 있었고
진평왕32년(610년) 에 가잠성주가 되었는데 ,
이듬해 10월 겨울에 백제가 공격해와서 포위당한 지 백여 일이 되었습니다
진평왕이 상주 · 하주 · 신주의 군사 5 만 명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고
찬덕이 분개하여 군사들에게
<찬덕>세 주의 군사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못하고 ,
성이 위태로움을 보고도 구원하지 못하니
그것은 의리가 없는 것이다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이듬해 정월에 다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찬덕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외쳤습니다
<찬덕>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여 이 성을 되찾게 하겠다 !
하고는 팔뚝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뜨고
머리로 느티나무를 들이받아 골이 깨져서 죽었습니다
이에 성이 함락되고 군사가 모두 항복했습니다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이니 ,
괴산은 찬덕이 머리로 괴목(느티나무 괴)을 받은 까닭으로 하여 생긴 이름입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로서
20여세 때 아버지 찬덕의 공로로 대나마가 되었고
진평왕 40년(618년)에 금산당주로 임명되어
한산주 도독 변품과 함께 가잠성을 회복하려고 하였고 ,
싸움이 시작되자 해론은
<해론>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전사하신 곳이다,
내 지금 이곳에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는 하고 짧은 칼을 가지고 달려나가서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습니다
진평왕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남은 그의 가족들 돕기를 매우 후하게 했고
당시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시인들이 장가를 지어 그를 조문했습니다
친구였던 귀산과 추항 ,
부자였던 찬덕과 해론 외에도
눌최 역시 동서전쟁에 희생되는데
[임전무퇴 눌최]
눌최는 사량부 사람으로서
진평왕 건복 41 년(624년)에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속함 · 앵잠 · 기잠 · 봉잠 · 기현 · 용책 등
여섯 성을 포위공격하므로
진평왕이 상주 · 하주 · 귀당 · 법당 · 서당 의 5군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했습니다
5군은 백제의 진영이 당당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그 중의 한 장군이 말했다
<신라장수>대왕께서 오군을 우리 여러 장군에게 맡기시어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달려 있지마는
가능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나라는 것이 병가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이제 적의 형세가 저렇듯 강성하니
만일 나아갔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모두들 그 말이 옳다하여 돌아가기로하였는데
너무 면목이 없어서 노진성을 쌓고 돌아갔고
이에 백제는 더욱 급히 공격하여 속함 · 기잠 · 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눌최는 앵잠 · 봉잠 · 기현 세 성을 굳게 지키다가
다섯 장군이 다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분개하여 군사들을 돌아보고
<눌최>봄이 되면 초목이 다 무성해지지마는
겨울이 되면 소나무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이제 구원병은 없고 세 성이 심히 위태로우니 ,
이는 지사와 의부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 ?
사졸들이 다 눈물을 뿌리며 함께 죽기를 맹세했습니다
<사졸들>감히 죽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
오직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이 함락될 무렵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못 되었지만
그들끝까지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고 힘써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눌최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습니다
어떤 자가 전에
<어떤 사람>소인배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니 ,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고 말하였으나 눌최는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 성이 함락되고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이 활을 당겨 화살을 끼운 채
눌최의 앞에 버티고 서서 활을 쏘았습니다
그 화살은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백제군들이 이를 무서워 하여 앞으로 접근하지 못하였고
한 백제병이 뒤로 돌아가 눌최를 도끼로 쳐서 쓰러뜨리자
그 종은 돌아서서 그와 싸우다가 함께 죽었습니다
진평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며 눌최에게 급찬 벼슬을 추증했습니다
[정혼자를 기다린 설씨녀]
이 시기
이렇게 수많은 장군들이 명분없는 싸움에 희생되었지마는
이들은 장군으로 이름나 죽고나서 벼슬이라도 받았지
이름없는 , 병사로 동원되던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팠는데
당시 동서전쟁때 희생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대표한 설씨녀라는 여인도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있고 다음과 같습니다
설씨 여자는 율리에 사는 백성 집안의 딸이었고
설씨녀는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품행이 얌전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에 반하였지만
감히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진평왕 때 그의 아버지가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정곡에서 곡식을 지키는 당번을 서게 되었고
(젊은청년들이 전쟁터 나가니 남자가 부족해지자
노인남성들도 결국 동원됨..)
딸은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어 차마 멀리 보낼 수 없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도 없어서
고민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량부 소년 가실은 비록 가난하고도 궁핍하나 의지를 곧게 기른 남자로서 ,
일찍이 설씨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설씨녀가 아버지가 늙어서 종군하게 되었음을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설씨녀에게 말했습니다
<가실>내 비록 일개 나약한 사나이지만
일찍이 의지와 기개로 자부하던 터이니
원컨대 불초(하찮은)의 몸이 부친의 일을 대신코자 하오
설씨가 매우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들어가 이 말을 고했고
설씨 아버지가 가실을 불러서 보고 말하기를
<설씨 아버지>공이 이 늙은이의 행역을 대신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만약 공이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을 주어 받들게 하고 싶네
라고 하니
가실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가실>감히 바랄 수는 없으나
원하는 바였습니다
라 했습니다
이에 가실이 물러 나와 혼인할 기일을 청하였고
설씨녀는
<설씨녀>혼인은 인간의 대사이니 ,
함부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방위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뒤에
날을 받아 혼례를 치루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
거울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한 쪽씩 지니며 말했습니다
<설씨녀>이것을 신표로 삼아 뒷날 맞추어 봅시다
가실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고
가실은 설씨에게 말했습니다
<가실>이것은 천하의 양마라오
훗날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가고 나면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 두었다가 쓰기 바라오
가실은 드디어 설씨와 작별하고
설씨녀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에 나섰고
공교롭게도 나라에 일이 있어서(동서전쟁이 너무 길어지니깐..)
기한 내에 교대를 시켜주지 않는 바람에
가실은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설씨 아버지>처음에 3년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지금 이미 기한이 지났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겠다
하니
설씨가 말하기를
<설씨녀>전일에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억지로 가실과 약속을 하였고
가실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무에 종사하여 춥고 배고픔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의 국경에 접근하여 손에 병기를 놓지 않고 있으니
이는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지라 항상 물릴까봐 염려되는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어기는 것이 어찌 사람의 정의이겠습니까 ?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으니
다시는 말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늙고 정신이 맑지 않아
딸이 장성하도록 짝이 없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몰래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여 날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을 맞아 들였습니다
설씨가 굳이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때 가실이 교대되어 돌아 왔는데
그의 형상이 초췌하고 의복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도 알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가실이 앞으로 나아가 깨어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이것을 받아들고 맞추어보고는 둘은 얼싸안고 소리내어 울었고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가실아 미안행 ㅠㅠ)
마침내 둘은 서로 결혼하고 해로(부부가 한평생 같이 살며 함께 늙음) 했습니다
설씨녀 이야기는 정상적이고 클래식한 사랑이야기로서
고무신을 정확하게 신고 꽃신신고 전역했다는 희망찬 이야기이자 실화로서
원조 춘향전마냥
남친 군대갔는데 소식 없음에도 기다리고 모진 고문(?) 에도 버티고 버티다
남친이 허름하고 남루한 상태로 돌아오자
눈물흘리며 결혼하고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로서
한편 가실녀석도 3년이 넘도록 편지 한 통 없었는지 아니면
그당시 가난한 백성들은 편지 한 통 쓸 환경이나 형편도 안됬는 지도 싶고
다행히 가실이 군대에서 죽어 돌아오지않고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며 설씨 역시 끝까지 시집안가고 버틴 상황이었고
만약 여기서 가실이 군대에서 죽었고 설씨는 시집안가고 버티다 노처녀로 죽거나
가실이 살아왔는데 설씨는 시집가서 애가 벌써 둘이라거나 하면
이야기가 갑자기 불쾌해지고 씁쓸해지게 되는 것이고
죄수의 딜레마처럼 서로 단절된 상황에서
만약 가실과 설씨녀 한쪽이 배신하면
곧바로 둘다 폭망하며 별볼일 없는 이야기로 남거나
역사에 기록조차 안되게 되는데
참 이런 모든 조건이 다 올바르게 성립되고 백년해로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 확률입니다 (찡-긋)
참 행복과 불행도 있지만
신라 백제 양국이 전쟁없이 평화기였다면
설씨녀와 가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연애하며
뽕밭과 보리밭에서 행복하게 뒹굴며 행복하게 결혼했을 것인데
설씨녀 이야기는
당시 신라 동서전쟁시기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무의미한 충신과 의국지사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근대역사학자 신채호 선생 역시
이렇게
설씨녀와 가실 ,
귀산과 추항 ,
찬덕과 해론 ,
눌최
등 진평왕 시대 수많은 장군들이 출동하고 희생한
충신과 의사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그럼에도 무왕 서동과 김용춘이라는 두 개인의 이기주의(신라 왕위) 를
성취하기 위해 수많은 인민을 죽이는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 의사들은 또한 가치없는 충신 의사라 했습니다
(애초에 신채호 선생은 삼국통일전쟁을 해야할 전쟁이 아니라 보셨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평화적으로 조선민족의 기치로 연합 할 수 있었다 여기셨음)
이외에도 진평왕시대 김유신 장군의 데뷔전이 시작되는데
삼국통일 주역이자 한국위인 김유신 장군은
기록이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있으며
기록이 너무 광범위하고 왠만한 왕들보다 몇배나 길기에
따로 서술해야겠고
진평왕대에는 이렇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름난 장수외에도
김후직같은 충신들이 많았는데
무왕과 김용춘의 동서전쟁으로 전국시대가 시작되며
본격적으로 신라 백성들이 전부 총동원되어 전쟁터에 끌려가며
국법이 삼엄해지고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이 당대 신라에 형성되고 있었고
의국지사 , 이름난 장수 외에도
김후직같은 충신들도 엄청나게 나오게 됩니다
[아첨안해 ! 실혜]
진평왕대 충신은 김후직 , 실혜 , 검군이 열전에 기록되는데
먼저 실혜는 대사 순덕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로써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진평왕 때 실혜는 상사인이 되었는데 ,
당시 하사인이었던 진제는 아첨을 잘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진제는 비록 실혜와 동료로 있었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서로 시비를 다툴 때가 있었는데
진제는 똥꼬를 오지게 빨았고
실혜는 정도를 지키고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진제가 이를 시기하고 원망하여 누차 진평왕에게 참소하기를
<진제>실혜는 지혜가 없고 담기가 많아서 곧잘 기뻐하거나 화를 내어 ,
비록 대왕의 말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분을 참지 못합니다
만약 이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난을 일으킬 것인데 왜 그를 내쫓지 않습니까 ?
그가 굴복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때 등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진평왕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진평왕도 선대왕들이 만들어준 강대국에서 왕위에 올랐을 뿐이지
계속 난리를 자초하는 어이없는 임금이고 혼란기에 왕됬으면 그냥 폭군임ㅋ;;)
실혜를 영림으로 귀양보냈습니다(ㅠㅠ)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그대는 조부 때부터 충성과 나라의 재목감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
이제 아첨 잘하는 신하의 참소와 훼방을 입어
멀리 죽령 밖의 황폐하고 궁벽한 곳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니 통탄스럽지 않은가 ?
왜 바른 대로 말하여 사실을 밝히지 않는가 ?
(형님은 원래 충신집안인 부분 인정 ?
근데 똥꼬 오지게 빠는 진제가 모함해서 형님 나락보냈쥬 ?
개킹받쥬 ?
바른대로 말하면 진제 민심나락가는거 한순간이쥬 ?
근데 형님은 왜 가만히 있쥬 ?)
실혜가 대답했습니다
<실혜>옛날 굴원은 고고하고 충직하여 초왕에게서 쫓겨났고
이사는 충성을 다하다가 진의 극형을 받았다
그러므로 아첨 잘하는 신하가 임금을 미혹케 하여
충신이 배척 당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
실혜는 마침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서 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노래했습니다
(인정하쥬 진제 나락보내는건 쌉파서블이쥬 ?
근데 옛날에도 빨대꽂는 모기들은 흔해서 아무렇지 안쥬 ?
하나도 안슬프쥬 ? :) )
[곡식 안훔쳐 ! 검군]
이번엔 진평왕대 충신 검군 이야기입니다
검군은 구문 대사의 아들로 사량궁 사인이 되었고
건복 49년(627년) 정해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죽이는 바람에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공모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는데 ,
검군만은 홀로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인들이 말했습니다
<사인들>여러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거절하니 무슨 일인가 ?
만일 적어서 그렇다면 더 주겠다
검군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검군>나는 근랑의 문도에 이름을 두었고 ,
풍월도의 마당에서 수행을 하였으니,
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천금의 이익이라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 때 대일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검군은 그곳을 나와 근랑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사인들이 은밀히 의논하기를
<사인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말이 누설될 것이다
(지 혼자만 고결한 학이고 우린 어둠의 까마귀인거노 ?
검군이 죽여버리자노 ~)
하여 드디어 그를 불렀습니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줄 알고
근랑에게 하직하며 말했습니다
<검군>오늘 이후로는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다가 ,
재삼 묻자 그 이유를 대략 이야기했습니다
근랑이 말했습니다
<근랑>왜 유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 ?
검군이 말했습니다
<검군>자기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죄에 걸리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근랑이 말했습니다
<근랑>그러면 왜 도망하지 않느냐 ?
검군이 대답했습니다
<검군>저들이 잘못되고 내가 바른데
도리어 내가 도망한다면 이는 장부의 행동이 아닙니다
검군은 말을 마치고 마침내 사인들에게 갔고
여러 사인들이 술을 대접하며 사죄하면서
검군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습니다
검군은 이를 눈치채고도 꿋꿋하게 그것을 먹고 죽었습니다
군자가 말하기를
<군자>검군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었으니 ,
이는 태산같이 소중한 목숨을
기러기 털보다 가벼이 여긴 것이라 하겠다
[끝판왕 김유신]
그렇게 다사다난하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 진평왕시대였고
진평왕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시대가 시작되며
백제와 멸망전 + 삼국통일전쟁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진평왕대는 진평왕대 나온 모든 인물들을 섞어놓은 대장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김유신이었고
김유신은 장군이면서 얍삽한 정치인 구석이 있어서
논란이 있긴 있는데 한국위인이자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뒤에서 화랑들 자살돌격시키며 사기를 올리는 잔인한 장군 이미지가 있지만
막상 김유신 역시 젊은시절엔 직접 돌진해서 세 번이나 적진 속에 들어갔다 나오며
그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 '살아 돌아와서' 군사들의 기세를 올렸고
(나는 돌진해도 사는데 반굴이랑 관창이 왜 너는 죽노 ? ㄷㄷ;;)
김유신은 그렇게 직접 돌격할만큼 귀산과 추항 , 찬덕과 해론 , 눌최의
임전무퇴의 용맹함이 있었고
좀 알페스느낌으로 손흥민X케인마냥 (흥민이형님 죄송 ㅎㅎ;;)
김유신X김춘추 사이의 그라운드 와이프 , 오피스 와이프 같은 그런게 있었기에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한테 속박플 당하고있을때
그라운드 와이프 구하러 1만 정예병 데리고 북진하는 모습은 마치
설씨녀와 가실의 눈물겨운 사랑과 비슷하며 (좀 다른가 ? ㅎㅎ;;)
아첨 안하고 곡식 안훔치는 실혜와 검군의 모습은
왕에게도 할말 할 수 있을만큼 강직한 장군이자
삼국통일전쟁시기 믿을 수 있는
청렴한 쌀배달꾼이었던 김유신의 모습으로 발현되고
참고로 군량수송 , 쌀배달은 아무나 못시키는게
제갈량이 쌀배달꾼이었고
나폴레옹도 군대에서 보급이 제일 중요하다 울부짖고
박정희가 청렴한 박태준은 일부로 5.16 정변때 빼고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이후에도 박태준에게 가장 중요산업인 철강을 맞겨
포스코를 만들게했고
쌀배달 , 자원관리는 한 치의 횡령과 오차도 있으면 안되서
보통 나라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청렴도와 지능지수가 가장 높은 인물들이
재정관리나 쌀배달을 맡게되어서
(반대로 청렴도 낮은 인물이 쌀배달하면 임오군란이나 국민방위군 시즌 2 남)
김유신은 귀산과 추항 , 찬덕과 해론 , 눌최 , 설씨녀와 가실 , 실혜 , 검군의
장점을 모두 떼려박은 신라 전설의 명장이었고
또한 왕실 일원으로서 김후직처럼 임금님에게 대놓고 직설 날리거나
계속 동맹풀고 지저분하게 나오던 당나라 짜장새끼들
뚝배기 깰만큼 깡다구도 ㅈ되던 인물이었고
이번 이야기에서 다룬 신라 열전 인물들의 총집합체가 바로 김유신이었고
김유신이 화랑들 자살돌격 시킬만큼 잔인하고 야비한 인물이 아니라
본인도 자살돌격했기에 억울한 면이 있고
대충 국무총리급 고위정치인 자녀 출신으로서
신라 금수저였던 김유신은
옛날에 엄마한테 혼나서 다니던 오피녀(천관녀)랑 눈물의 이별하고
자율주행으로 이전 자주간 오피 찾아가던
스포츠카에 정병도져서 혼자 빡돌아 스포츠카 부수고(말모가지 치고)
눈물의 오열하면서 수련에 초집중했던 김유신이라
무예가 뛰어나서 본인은 자살돌격해도 살아돌아왔을 뿐
사실 반굴과 관창이 살아돌아오지 못할만큼 수련이 딸렸던 것이고 ;;
(거의 즐라탄 급 ;; 김유신이 죄송하면 군생활 끝난다 ;;)
하여튼 김유신 장군이 포켓몬 지우레기마냥 인성논란이 있는 쉨이지만
코에이 삼국지식 스텟으로 치면 무력 95 , 정치력 95이상 넘어가고
실전멤버 꽉꽉채워서 월드 챔피언십 우승시킨
말이 필요없는 레전드는 레전드라
주몽(고구려) ,
계백(백제) ,
김유신(신라) ,
강감찬(고려) ,
이성계(고려말) ,
이순신(조선)
은 각각 한국사 레전드 무인출신으로
펠마호메 , 차박손마냥 무지성으로 그냥 쓰면 무조건 이겨서 돌아오는
무력 95 이상은 꼭 넘길만한 인물들이고
당시 신라인들은 진평왕대부터 김유신이라는
불세출(다시 나오지 않음) 영웅이 등장하자
김유신 그리고 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김춘추의 깃발 아래로
똘똘 단결하였고
옛날 지증왕-법흥왕-진흥왕이라는 명군아래
똘똘 단결한 신라인들은
진지왕-진평왕이라는 혼군을 거치며 오열하고 방황하다가
김유신X김춘추라는 대단한 게이커플의 등장에
피랑 똥이 같이 묻어나오고 좀 기분 불쾌하지만 다시 똘똘 단결하게 됩니다
김유신 이야기는 다음에 쓰겠고
김유신은 진평왕때는 화려하게 데뷔하고
본격적으로 선덕-진덕여왕 두 여왕을 거치며
순진한 두 여왕시기동안
김춘추를 왕위에 올릴 설계를 전부 해놓았고
계획대로 김춘추가 즉위하자 같이 연합정국을 형성하며
무열왕 김춘추-문무왕 김법민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됩니다
결론은 진평왕 역시 그냥 운좋게 할아버지가 진흥왕이라
강대한 시기에 운좋게 신라 왕이 됬을 뿐이지
신하들 말 오지게 안듣고 나라 위기에 빠트리는 폐급 찌랭이 왕이었고
수많은 남녀들이 진평왕때 무고하게 희생됬는데
아스팔트 위에 핀 꽃마냥
그 중 한 명 김유신만이 기적같이 살아남아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라능
<라봉봉>진평왕때 인물이 엄청나게 나오는데
명심해야할게 진평왕이 뛰어나서 나온게 아니라
이미 당시 신라 국력상 백제가 대반격을 가한다 한들
선대왕때부터 쌓여진 신라국력이 너무 강해서
계속 인재가 튀어나오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고
(노벨상 후보 한명 나오면 호들갑 떠는 우리와 달리
마치 미국에서 매년 처음 들어보는 과학자들이 노벨상 가져가듯이)
그럼에도 저 역시 조선상고사 학설에 신빙성이 높다 생각하기에
신채호 선생님 처럼 삼국통일전쟁은 무고하고 의미없는 동족상잔의 전쟁이었고
좀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낭만 쩌는 짜장영웅들의 소설인 삼국지도 그렇고
난세에 영웅나듯이 전쟁기간때 영웅들이 나지만
실상은 국력 절반 이상 증발하고 농토 파괴되고
16살 되자마자 징집되서 개같이 굴려지다 사망하고
강간놀이가 일상인 살육도가 펼쳐지는 것이고
신라 역시 전쟁이 아닌 평화기가 더 길어졌다면
위에서 나온 인재들이 전부 연구나 학문 , 예술에 힘썼을 수 있지 않나 싶고
임진왜란기 조선영웅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라는 당시 기술력은 삼국중 최상이었지만
약점 중 약점이 인구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고
이때 전쟁으로 소모된 국력 + 백제의 계속되는 물량공세때문에
신라도 진평왕 다음 선덕여왕 , 진덕여왕때에 이르러서는
진짜 국가 멸망 위기까지 몰리게 되어
외세 중국의 힘을 빌리는 굴욕까지 겪게 되고
삼국통일 이후 동아시아는 나름 오랜기간 찬란한 평화기를 맞지만
그 직전인 삼국통일전쟁기때는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그런 심리로
극도의 상무적인 기풍이 삼국 전체에 팽배해지며
고구려 , 백제 , 신라인들이 처절한 전쟁을 벌였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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