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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전성기 인물들>

[5천년 한국사 유이의 천재임금]

[지증왕의 가계도]

[지증왕의 성장과정에 대한 건에 관하여]

[지증왕과 거근설화]

[지증왕의 순장폐지]

[시조묘와 신궁]

[지증왕의 개혁]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

[울릉도 독도 정복 이사부]

[한국의 링컨 지증왕]

[법흥왕의 율령반포]

[이차돈의 순교]

[상대등]

[금관가야의 항복]

[신라 최전성기왕 진흥왕]

[거칠부의 국사편찬]

[승려+장군+재상+역사학자 만능엔터테이너 거칠부]

[우륵과 가야금]

[황룡사]

[관산성 전투]

[대가야정복 화랑 사다함]

[새들이 나무인줄 착각할정도로 그림 잘그린 솔거]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화랑제도]

[승려가 진흥왕]

<라봉봉>

 

[5천년 한국사 유이의 천재임금]

신라 마지막 마립간인 소지 마립간이 사망후

소지마립간의 재종아우(재종=6~7촌) 인 김지대로가 왕위를 이어

지증 마립간이 되었습니다

 

신라 22대왕 지증왕

 

지증 마립간 , 지증왕은

신라 최후의 마립간이자 최초의 왕으로서

신라의 게임 체인저로 이야기 되는 인물이며

이때를 기점으로 신라는 약소국에서 벗어나

삼국중 마지막으로 문명이 꽃피게 되어

삼국통일로 가는 기반이 닦아졌고

지증왕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한국사 세종대왕과 더불어

업적이 매우 뚜렷한 유이(단 두명)의 성군이라 생각합니다

 

지증왕 순장폐지

 

세종대왕 한글창제

 

한국역사 5천년에는 뛰어나고 훌륭한 명군 , 성군들이 많지만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 지증왕의 순장폐지 같은

뚜렷한 업적이 있는 왕들은 흔치 않고

다들 링컨이 노예해방을 했다고 극찬하지만

왜 우리는 정작 중국에서 근세인 청나라때까지 지켜온 악습인

노예제보다 잔혹한 악습인 순장을 폐지한 지증왕에 대해서는

존재감없이 묻혀가는지 참 안타까울뿐이고

 

중국 순장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소현세자와 효종을 포획한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 , 도르곤 엄마도 순장됨(;;)

 

 

 

MBC 사극 김수로에서 재현한 순장 , 지배층이 죽으면 피지배층을 같이 묻는 악습

 

 

옛날일본에도 역시 있었던 순장(헬 동아시아) , 불새 야마토편 1987

 

현대 정치권에도 이어지는 순장

 

지증왕은 일반적인 신라 왕실의 일원이 아닌 방계출신 임금이었고

매우 뛰어난 업적이 있다는 점에 굉장한 신라 지능캐였던 인물임이 분명하며

혈통이 아닌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신라 임금이 된 인물로 여겨지고 있고

태종 이방원 , 고려 현종마냥

기구한 운명을 살았단 점에서 온갖 드라마로 쓰기도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또 저도 역사를 연구하며

여러 인물들을 봐왔지만

참 세종대왕과 더불어 지증왕이 깨끗하고 고결한 성인의 영역에

있는 임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순장폐지 외에도 여러 잔가지 업적들도 굵직굵직해서

저나 많은 사학자들도 평상타만 쳐줘도

대부분 왠만해서는 립서비스로 대충 명군이니 성군이니 하는데

 

(ex : 유약했지만 나름 평상타는 쳐줬던 조선 성종 , 조선 현종)

 

이 인물은 진짜 한국의 링컨같은 인물이라

제가 세종대왕처럼 진짜 진심으로 존경스러운 인물입니다

 

[지증왕의 가계도]

먼저 당시 신라혈통 가계도를 살펴보자면

최초의 김씨 '왕조' 를 연 내물마립간의 후손들이 이후

신라 왕위를 계속 잇게 되는데

22대 지증왕 이전 21대 소지 마립간도 둘다 내물마립간의 후손들이고

 

내물마립간은 눌지마립간을 낳았고

눌지 마립간은 자비마립간을 낳았고

자비마립간은 소지마립간을 낳았고

소지마립간은 말년에 아들하나를 낳았지만 아들이 뱃속에 있을때 죽어서

 지증마립간이 잇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증마립간의 가계를 살펴보면

 

내물 마립간은 첫째인 태자 김눌지 외에도

김복호 , 김미사흔을 낳은 이야기를 제가 저번 이야기에서 했고

복호와 미사흔은 신라충신 박제상이 목숨을 걸고 구해온

내물 마립간의 왕자들이자 눌지마립간의 형제들이었습니다

 

박제상이 인질로 잡혀간 고구려에서 구해온 복호왕자는

파호 갈문왕으로 추증되었으며

갈문왕은 신라의 명예왕 호칭이었습니다

 

여기서 파호 갈문왕(복호)은

습보 갈문왕을 낳았고

습보 갈문왕은 김지대로를 낳았으며

김지대로는 그렇게 박제상이 목숨걸고 고구려 장수왕에게 구해온

복호의 손자였고

 

일반적 충신설화로 이야기되는 박제상이지만

복호를 구해온 것은 나비효과가 되어

신라 성군 지증왕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었고

만약 박제상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조선시대까지

순장을 이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증왕은 내물마립간의 증손이자 복호의 손자로서

어느덧 신라 왕실 주류에서 밀린 방계출생 왕족이었고

이로인해 지증왕의 킹스로드는 분명 일반적 신라 , 한국 임금들의 길과 달랐으며

그렇다고 이방원마냥 대놓고 피의 킹스로드를 걸은 인물은 또 아니여서

여러 호사가들의 상상력이 자극되는 부분입니다

 

지증왕 역시 근친으로 태어난 인물인데 (;;)

할아버지 복호는 눌지마립간의 친동생이었고

어머니는 눌지마립간의 딸 김씨 조생부인이었으며

즉 지증왕의 아버지는 역시 큰아빠 딸이랑 결혼한

근친충이었고 좀 역겨운데

근친혼이 원래 장애나 기형아를 낳는다는데

지증왕은 그럼에도

신라 1000년 역사 GOAT , 신라 1000년사 최고지능자였고

이런 이례적인 상황 + 지증왕이 너무 뛰어났던 것 때문에

신라왕실들은 근친이 똑똑한 아이를 태어나게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지증왕의 성장과정에 대한 건에 관하여]

하여튼 지증왕은 성장과정에서

외할아버지 눌지왕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또한 눌지왕의 아들인 태자 김자비에 비해

월등히 뛰어남을 비교받으며 성장했을 수 있고

 

(라봉봉's 라노벨)

 

눌지왕의 고민

 

이제부터 픽션과 상상력을 곁들여보면

그러다 점차 총명하고 뛰어난 김지대로가 성장하며

수많은 신라청년들이 김지대로를 따르며

수백명의 화랑의 원류가 되는 집단이 형성됬으며

김지대로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 수백명의 화랑들이 나서서

같이 쌀을 모아서 구휼했으며

김지대로와 청년군사집단은 산과 들에서 호랑이를 사냥하여

백성들의 호환을 없앴고 시장을 열어 부와 실력을 축적하는 상황이었고

 

청년시절 지증왕

 

점차 성장하던 김지대로는

살아있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은 왕과 지배층을 위해

그들의 무덤에 순장되는 것을 보고

가여움을 깊게 느껴 마음속 깊이 언젠간 신라국왕이 되어

그 폐정을 없애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고

 

김지대로의 괴로움

 

이미 중앙왕실에서 멀어진 박씨 구 왕족들은

차기 왕권을 총명한 김지대로에게 걸었고

이찬 박등흔은 이미 신라 왕실은 김씨왕과 김씨왕비만 배출함에

막혀있던 중앙정계로 가는 길을 트기위해

총명한 방계왕족인 김지대로에게 미리 줄을 대서

딸 박연제를 시집보내며

김지대로는 박씨일족의 전폭적 후원을 등에 업게 되었고

 

김지대로는 그렇게

신라 김씨왕실의 일원으로서 신라 국정 ,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자비마립간이 죽고

한참 어린 자비마립간의 아들 소지마립간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사부를 비롯한 주변 낭도일당들에게 찬탈 제의를 여럿 받았지만

생각이 깊고 평화주의자였던 김지대로는

소지마립간이 아들이 없었고

민심과 신하들 역시 김지대로를 따르던 상황이었기에

일단  60대가 넘어가도록 묵묵히 참고 인내하고 있었고

그러다 소지마립간이 외부출신의 처녀를 임신시키자 

예상치 못한 변수에

신라 중앙왕실과 민심이 깊게 술렁이기 시작하였고

소지마립간 역시 자기 자식이 뱃속에서 자라는 순간부터

자신의 육촌이자 어느덧 왕실 큰어른이 된 김지대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며 김지대로를 제거하려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어느덧 장성한 김지대로의 아들 김원종(훗날 법흥왕)은

위기감을 느끼고 태종 이방원에 빙의해

어머니 박연제부인과 몰래 모의하여

아버지 김지대로 몰래 혈기왕성한 또래청년동지 이사부와 함께 칼을 뽑았고

 

원종 법방원 (또종 또방원)

 

어느덧 태조 이성계 포지션이 되버린 김지대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들 태종 이방원 포지션인 김원종에 의해

갑자기 반역이 시작되버리자

궁내 패거리들을 진압하고

인사권 , 병권 , 언론을 장악하고 소지왕은 방에 감금하였고

소지왕은 얼마 후 사망했고

이로인해 신라 왕실은

김지대로의 사람들과 박씨가문으로 채워지게 되고

 

실권을 장악한 김원종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아버지 김지대로를 왕위로 올린 후

신라 태자가 되어 강도높은 내정개혁을 실시하였고

자신의 아버지를 성스러운 임금인 성골로 칭하고

이제부터는 오직 성골 출신만이 신라왕위를 이을 수 있다 공표하게 됩니다

 

김지대로는 그렇게 왕위에 올라

지증왕으로 즉위하여

지증왕-태자 김원종(+박씨일가)의 연합정국이 형성되었고

문무백관과 백성들 역시 지증왕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기에

신라는 큰 희망을 꿈꾸기 시작하였고

 

여러 격변속에 64세에 즉위하게 된 신라국왕 김지대로는

자신이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음을 직감하고

청년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지증왕 즉위식 (Feat 선덕여왕 OST 달을 가리운 해)

 

여기까진 제가 그럴싸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시나리오 , 픽션을 한번 써보았고 (Labongbong's fiction)

 

 

[지증왕과 거근설화]

하여튼..

삼국유사에서는 왕이 된 지증왕이 왕이 된 이후

꼬츄가 너무커서 배필을 찾지 못하다 (왕자지증왕)

어떤 신하가 엄청나게 큰 똥을 싼 여인을 발견하고 그를 신부로 맞이해

그녀가 박씨 연제부인이라하는데

지증왕은 64세에 즉위해 11년 재위하고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에 아들 낳기도 쉽지가 않고

다음왕 법흥왕이 갑자기 강력한 왕권행사를 하기에 무리가 있어

지증왕과 연제부인은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에 혼인을 해서

김원종(법흥왕) 을 낳았을 것이라 이야기하고있고

 

즉 지증왕의 꼬츄가 매우 크고 연제부인의 똥이 매우 크다는 것은

그시절 신라에 남근숭배사상이 있었다고 보면 되고

실제로 경주 월성 신라왕궁터에서 여러 각좆(나무딜도) 가 출토 되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에도 일본에 남근축제가 존재 하듯이

신라 역시 고대시대답게 강한 힘과 생산력을 상징하는 남근을 숭상하는 사상이 있었고

 

황룡사 활석 남근석 (극사실주의 ;; , 풍요와 다산 기원용)

 

안압지 출토 남근목 각좆 (돌기가 있기에 이건 실전용 ;;)

 

남근과 똥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남녀의 권력과 힘이 강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지증왕과 연제부인이 단순히 큰 성기를 가진게 아니라

지금도 남녀가 급이 안맞으면 매칭될 확률이 떨어지고

막 노래나 영화에서 '감히 니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 ?' 이런 대사가 있듯이

이 큰 성기와 큰 똥의 비유는 대충 심리적으로도 공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기남(빅꼬츄) 는 결국 인기녀(존예) 와 매칭 된다는 냉혹한 현실

 

지증왕 거근설화는 실제론 이런느낌일것

 

하여튼 대체적으로 박씨부인과 법흥왕은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기전 얻은 가족들로

이야기되고 있고

지증왕 시기 연로한 지증왕을 보필해 태자 법흥왕이 국정을 지휘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증왕의 순장폐지]

지증왕은 그렇게 소지 마립간 다음 64세의 나이로 신라 왕위를 이어

신라 22대왕 지증 마립간이 되었고

지증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습니다

 

지증왕 3년

3월 봄 ,

지증왕은 순장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 순장했는데

이 때에 와서 폐지했습니다

 

신라 지증왕과 너무도 닮아있는 노예해방령에 싸인하기 위해 고뇌하는 미국 링컨 대통령 , 영화 링컨

 

난 자네들을 믿네

 

 

순장을 폐지한 직후 지증왕은

직접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시조묘와 신궁]

이전 신라국왕들은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신라 시조는 박혁거세로써 박씨임금이었고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전제왕권이 공고화 된 신라는

시조묘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통합체가 필요했고

 

이전 소지마립간때 신궁을 설치했는데

신궁설치를 청년시기의 지증왕이 주도했다는 설이 있고

 

종래 박혁거세라는 비현실적 , 추상적 인물(알에서 태어난 '전설') 에게

시조묘에 제사지냈던 신라왕실과 달리

실질적 조상 혹은 김씨 내물왕계 집단결속을 위한

종교적 상징으로 신궁이 설치되었다는 해석이 있고

 

혹은 시조묘가 단순한 조상 , 사람에 대한 제사로서

박혁거세 , 박씨만을 모셔야했기에

김씨로 굳어진 김씨왕실에서 언제쩍 박씨냐며

굉장히 탐탁치 앉아했을 것이고

신궁 神宮 을 설치함으로서 박씨 특정씨족인물이 아닌

모든씨족이 모실 수 있는 '신' 을 모시며

 

박씨 , 석씨 , 김씨들도 모두 납득이 가는

신에 대한 제사로 좀더 확장되었을 수도 있고

 

또한 종래의 박씨나 김씨 가족집단 , 왕국수준에서

신라가 신을 모시는 황제국으로 격상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동양사회에서 제후국은 하늘(신)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기에

신궁을 설치했다는 것은 신라사회의 확장과 통합 , 지위 격상을

의미한다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박씨묘에서 신궁으로 세계관 확장 무한 광야유니버스시킨 지증왕

 

[지증왕의 개혁]

또한 지증왕은

주주와 군주에게 일일이 명령하여 농사를 권장토록 했고

신라에서는 이때부터 처음으로 소를 이용해서 밭을 갈기 시작합니다

 

소를 이용한 우경 , 조선 김홍도 밭갈이

 

지금보기엔

소를 이용해 밭을 갈면 굉장히 원시적이고 구식 , 쉰세대의 미개한 방식이고

트랙터를 이용해 밭을 갈아야 굉장히 첨단적이고 MZ 스타일에 과학적 방식인데

지증왕 이전시절까지만 해도 신라는

사람이 밭을 갈았고

지증왕은 외국에서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 첨단(그시절 기준) 과학농법을 신라로 들여와

신라를 풍요롭게 만들었고

우경 , 소로 농사짓는 것도 아주 고대엔 최첨단 과학기술로 여겨지는 것이었고

지증왕은 여러 첨단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지증왕 4년

10월 겨울

여러 신하들은

 

<여러 신하들>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한 채

사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

사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는 신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

'라(羅)'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를 살펴보면 ,

모두 '제(帝)'나 '왕'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방언으로 왕호를 삼았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지증 마립간이 이를 따랐고

지증 마립간은 이로인해

최후의 신라마립간이자 최초의 신라국왕이 되었습니다

 

지증왕 5년 4월 여름

지증왕은 상복법을 제정해 반포 , 시행했고

 

9월 가을

일할 사람을 징발해 12개 성을 쌓았습니다

 

지증왕 6년 2월 봄

지증왕은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고

 

11월 겨울

처음으로 소판 부서에 명해서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석빙고)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하여 신라가 해양강국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됩니다

 

10월 정월 봄

지증왕은 서울(서라벌) 에 시장을 설치했고

 

3월

나무 울타리와 함정을 만들어

맹수의 피해를 없애게 합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

지증왕 13년 6월 여름

우산국이 귀순해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했고

우산국은 울릉도에 있었던 한국 고대국가였는데

동해바다 한가운데 있는 울릉도와 독도였기에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다가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자

이사부는

 

<이사부>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합니다

 

하고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도착해 외쳤습니다

 

동궁과 월지 신라 사자향로

 

이사부는 거짓말로

 

<이사부>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 !

 

했고

우산국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했습니다

 

이사부

 

이사부는 독도이야기에 꼭 나오는 한국 신라장수로서

지증왕대부터 활동한 신라 명장이고

우산국 정복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정식으로 한국 영토에 편입시켰고

 

(독도 한국땅이다 우기지 마라 왜놈들아 !!)

 

[울릉도 독도 정복 이사부]

이사부의 이름은 태종이라고도 불리며

성은 김씨로 내물왕의 4대손이었습니다

 

이사부는 지증왕때 연해 국경지역 지방관이 됬는데

거도의 꾀를 답습해 (이전에 쓴 신라인물)

말타기 놀이를 한다며 군사들을 광대로 분장시킨 후

가야국을 속여서 취했습니다

 

이때(지증왕 13년 , 512년) 역시 

이사부는 꾀를 이용해 우산국을 병합하였고

 

 

진흥왕 11년(550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고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하자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게 해서

두 성을 취하여 증축하고

갑사(정예병) 을 머물게 해서 지켰습니다

 

이때 고구려에서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때

이사부가 추격해서 크게 이겼습니다

 

이사부는 지증왕부터 진흥왕때까지 활약한 백전백승 승리의 신라 명장이었고

그가 전략이 뛰어났던 것도 있지만

좋은 임금 , 좋은 시대를 잘 타고난 행운의 명장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의 링컨 지증왕]

지증왕 15년 정월 봄

지증왕이 붕어했습니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고

신라의 시호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증왕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한국사에 최초로 나올법한 굉장히 굵직굵직한 기록들이고

방계출신 + 60대 나이로 어렵고 늦게 왕이 된 지증왕이지만

그만큼 60년의 응축된 세월을 10여년간의 짧은 재위에 녹여냈다고 생각되고

 

아무리 성기가 커도 한국인들은 흑인이 아닌 이상 다 거기서 거길텐데

왜 신라인들이 지증왕의 성기가 거대하다 생각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이 노예해방의 링컨을 위대하다 생각하는데

실제로 링컨은 노예해방이라는 위대한 업적 외에도

남북통합으로 하나의 연방정부를 유지시킨 업적 및

대륙횡단철도건설 등 여러 미국의 근간사업을 구축한 인물이었고

그냥 위대한 업적 외에도 잔가지 업적도 엄청난 인물이 링컨이었고

 

지증왕 역시 순장폐지라는 위대한 업적 외에도

 

우경도입(농업생산량 증가) , 시장설치(부국) , 석빙고(유통) ,

선박제도화(해양강국)

 

등 여러 압도적인 굵직한 업적을 많이 남겼고

특이한 점은 지증왕시기 신라는 전쟁기록이 뚝 끊겨있단 점이고

유일한 전쟁기록인 우산국(울릉 , 독도) 정벌 역시

피를 흘리지 않고 뻥카로 무혈정복이었고

 

지증왕때 신라는 모든 전쟁을 중단하고

강도높은 내정개혁에 집중하였고

이때부터 신라인들은 어떠한 크고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하게 되고

지증왕의 뒤를 이어서부터는 신라인들도 점차 강국이 되었다는

자신감이 붙게 되었고

이때부터 점차 삼국통일의 열망이 신라에서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링컨이 너무 뛰어났기에

링컨 후임 공화당원들은 별다른 능력이 링컨만큼 없었음에도

링컨 이후 해방된 흑인들이 50년간 공화당에 몰표를 주며

공화당 독재가 시작되듯이

 

지증왕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지증왕의 후손들은 별다른 능력이 지증왕만큼은 없었음에도

지증왕의 씨를 받고 태어난 '성골' 임을 자처하며

태종 무열왕 등장전까지 강력한 전제왕권을 행사하며

끝내 최초의 여자왕까지 배출시키게 됩니다

 

[법흥왕의 율령반포]

지증왕이 사망하자

태자 김원종이 왕위를 이어

신라 23대왕 법흥왕이 되었고

 

법흥왕은 지증왕과 연제부인 박씨의 맏아들로서

모처럼만에 근친이 아닌 김씨아버지와 박씨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고

지증왕때부터 박씨들은 점차 자신감을 얻어

법흥왕비도 배출해냈고

법흥왕의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였습니다

법흥왕은 성품이 관대해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다하고

 

법흥왕 7년 정월 봄

법흥왕은 법령을 반포해 처음으로 관리들의 공복을 제정했고

붉을 빛과 자줏빛으로 등급을 표시했습니다

이 기록때문에 법흥왕은 신라의 율령(법령) 을 반포한 임금으로

시험에서 단골로 나오게 되고

 

[이차돈의 순교]

법흥왕 15년

신라에 처음으로 불법이 공인되었습니다

 

이전 신라는 눌지왕때부터 고구려 승려 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도입된 상황이었지만

여러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 않고 반대가 많았으므로

 

(불교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불교가 고구려에서 수입됬기에

반고구려 정서가 강했던 당시 신라사회 분위기상 어쩔 수 없었음)

 

법흥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 이차돈은 법흥왕에게

 

<이차돈>청컨대 소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분분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소서

 

라고 했고

 

이차돈

 

법흥왕은

 

<법흥왕>본래 불도를 흥하게 하려는 것인데 ,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대답했고

이차돈은

 

<이차돈>만약 불도가 시행된다면

소신이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이리되자

법흥왕은 신하들을 불러보아 의견을 물었고

신하들은 모두

 

<신라대신들>요즘 중의 무리를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 이는 영원히 진실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들을 방치한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까 염려되오니

저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이에 이차돈은 홀로

 

<이차돈>지금 여러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들어보면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미리 이차돈과 말을 맞췄던 법흥왕은

이차돈에게

 

<법흥왕>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강경하여 이를 꺾지 못하겠고 ,

너만이 혼자 견해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두 편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형리로 하여금 그의 목을 베도록 했습니다

 

이차돈이 죽음을 앞두고

 

<이차돈>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의 영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나서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우유빛처럼 희었습니다

 

이차돈 순교비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했고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정식 종교 , 국교로 공인됩니다

 

[상대등]

법흥왕 18년 4월 봄

법흥왕은 이찬 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국정을 총괄케 했는데

상대등이라는 벼슬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상대등은 신라 최고벼슬로서 영의정 , 국무총리 개념입니다

 

이렇게 나라 내부의 체제를 정비한 법흥왕은

이제 시야를 국외로 넓혔고

 

[금관가야의 항복]

법흥왕 19년

금관가야왕 김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아들

첫째 김노종 ,

둘째 김무덕 ,

셋째 김무력과 함께

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고

법흥왕은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며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고

금관가야 마지막왕의 셋째아들 김무력은 신라에서 출세해

벼슬이 각간(상대등과 더불어 신라 최고위직) 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김무력의 손자가

바로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한국위인 김유신장군으로서

백제계가 신라에서 예술가를 계속 배출한 것과 달리

가야계는 신라에서 장군들을 계속 배출하며 큰 활약을 하게됩니다

 

[신라 최전성기왕 진흥왕]

법흥왕 사후

17살의 김삼맥종이 왕위를 이어 신라 24대왕 진흥왕이 되었고

진흥왕은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입종의 아들로서

역시 지증왕의 손자였고

특이한게 어머니 김씨부인이 바로 법흥왕의 딸이었고 (ㅡㅡ ;;)

즉 근친으로 태어난 임금이었습니다

 

불행중 다행히

진흥왕은 박씨에 장가들어 박씨 사도부인을 왕비로 맞았고

진흥왕 재위초는 진흥왕이 어렸기에

왕태후가 섭정했습니다

 

사극 화랑속 진흥왕 , KBS 2TV 월화 드라마 화랑(2016~2017)  Hwarang: The Poet Warrior Youth

 

진흥왕은 신라 최전성기를 대표하는 임금으로서

신라가 지증왕때부터 본격적으로 내부적으로 쌓여온 국력이

진흥왕때 폭발 , 급속히 팽창하게 되어

영토가 뻥튀기수준으로 갑절로 늘게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신라는

순식간에 고구려 , 백제를 제압할 수준으로

동아시아 일찐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신라 정복군주 진흥왕

 

[거칠부의 국사편찬]

진흥왕 2년 3월 봄

진흥왕은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일을 맡게 했고

 

진흥왕 6년 7월 가을

이찬 이사부가 진흥왕에게

 

<이사부>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

 

라고 말했고

진흥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 편찬하게 했습니다

 

 

[승려+장군+재상+역사학자 만능엔터테이너 거칠부]

거칠부는 황종이라고도 하며

성이 김씨(김거칠부) 로서

내물왕의 5대손었고

 

거칠부는 젊었을때 사소한 일에 거리끼지 않았고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했습니다

 

문득 고구려를 정찰하려고 그 땅에 들어갔다가

혜량법사가 절을 개창해 불경을 설법한단 말을 듣고

그곳에 나아가 강경을 들었고

혜랑이 묻기를

 

<혜량법사>사미(사미승 , 수행자)는 어디서 왔는가 ? :)

 

묻자

거칠부는

 

<거칠부>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그 날 저녁

혜량법사가 거칠부를 불러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하길

 

<혜량법사>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자네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사람이 아니다

아마 다른 마음을 가졌지 ?

 

 

이에 거칠부는

 

<거칠부>저는 변방에서 태어나 

아직껏 불도의 원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법사님의 덕망과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으니

법사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

 

혜량법사는 

 

<혜량법사>노승은 불민한 데도 

능히 그대를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나라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잡힐까 염려하여 

은밀히 충고하여 주는 것이니 

빨리 돌아감이 좋을 듯하다 !

 

거칠부가 돌아가려 할 때 

혜량법사가 또 말하기를 

 

<혜량법사>그대의 상을 보니 제비 턱에 매의 눈이라

장래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라

 

했습니다

거칠부가 말하기를 

 

<거칠부>만일 법사님의 말씀과 같이 

법사님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저 밝은 태양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거칠부는 환국하여 

관직에 나갔는데 

직위가 대아찬에 이르렀습니다

 

진흥왕 6년 을축(545) 에는 

거칠부는 왕명을 받아 여러 문사(文士 , 문인)들을 모아 

국사(國史 나라 역사 혹은 신라 역사책이 국사라는 두가지 해석이 있음)를 편찬하였고 

파진찬으로 승진했습니다

 

진흥왕 12년 신미(551)에 

진흥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 ,

각찬 비태 , 잡찬 탐지 , 잡찬 비서 , 

파진찬 노부 , 파진찬 서력부 , 대아찬 비차부 , 아찬 미진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습니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신라와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 

고현 이내의 10군을 취했습니다

 

이 때에

혜량법사가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길거리로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거칠부>전일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니 

어떻게 보은하여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고 하니 

법사가 대답했습니다

 

<혜량법사>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라건대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기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수레에 혜량법사를 태워 함께 돌아와서 

진흥왕을 뵙게 하니

진흥왕이 법사를 승통(가장 높은 승려관리)으로 삼았습니다

이때 비로소 백좌강회와 팔관의 법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지왕 원년 병신(576)에 

거칠부는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맡았다가 

늙어서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습니다

 

[우륵과 가야금]

진흥왕 12년 3월

진흥왕이 순행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초청했습니다

 

한국위인 우륵

 

진흥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했고

두 사람은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서 연주했습니다

 

이전에

가야국 가실왕이 12현금을 만들어

열 두 달을 음률로 상징하게 했고

가야사람이었던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고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순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했고

 

망국의 한이자 가야 마지막 유산이었던 '가야금'

 

우륵은 가실왕과 같이 가야금을 만든

한국의 음악위인이며 한국의 악성(음악성인)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진흥왕 13년

진흥왕이 계고 , 법지 , 만덕 세 사람에게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고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계고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은 춤을 가르쳤습니다

 

신라 H.O.T. 를 만드는 우륵수만

 

학업이 끝나자

진흥왕이 그들로 연주하게 하고는

 

<진흥왕>전일 낭성에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

 

라고 말하며 후하게 상을 주었습니다

 

[황룡사]

진흥왕 14년 2월 봄

진흥왕이 관청으로 하여금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했는데

그 터에서 황색의 용이 나타났고

진흥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궁궐을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황룡사는 불국사와 더불어 신라를 대표한 신라에서 가장 거대한 절이었고

일반적 절이 아닌 신라 왕실이 국론통합 , 주변국 제압 , 삼국통일 , 국력과시 등

여러 염원을 담아 짓고

복속국 , 피지배층과 주변국가들 기죽이려는 등 여러 의도로

일부로 압도적인 거대함과 웅장한 규모로 조성됬기에

신라를 넘어 한국을 대표한 가장 거대한 메이저 절 중 하나였는데

훗날 이곳에 신라 전설의 보물이었던

장육존상과 황룡사 구층목탑이 조성됬고

황룡사는 온갖 전설들이 머문 전설의 절이였고

 

신라 서라벌 한복판에 세워진 고대한국대표사찰 황룡사

 

안타깝게도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시대때 재가 되버려

오늘날 후손들은 그 실체를 기록으로만 아는 전설의 절이 되었습니다

 

[관산성 전투]

진흥왕때 신라는 엄청난 정복을 하며

영토가 계속해서 배로 불어나던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점차 신라의 압도적 성장에 두려움을 느끼던 백제 성왕은

19살의 어린 신라 정복군주 진흥왕에게 자신의 딸을 주며 신라를 달래려했고

 

진흥왕 14년 10월 겨울

진흥왕은 성왕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습니다

 

결혼동맹으로 잠깐사이에 신라와 백제는 평화를 맞이하는 듯 보였지만

곧바로 백제는 다음해인

 

진흥왕 15년 7월 가을

백제는 관산성을 공격했고

 

그렇게 관산성에서

백제왕 성왕과 아들 부여창 , 좌평 여럿 , 장병 3만여명 등

백제 왕 , 왕족 , 귀족 , 병사들이 총출동한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대회전이 펼쳐지는데

 

당시 신라는 막 전성기가 시작되며 한창 일어나는 초승달같은 나라였고

이미 전성기가 지난 대국 백제는 이미 다 찬 보름달같은 나라였는데

백제가 마지막 역량을 다해 일어나는 신라를 쥐어박으려 한 것이었고

 

신라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이들과 싸웠지만 불리하게 되었고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했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해서

백제 성왕을 죽였습니다

 

신라와 백제 양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관산성 전투'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성왕은 원래 선봉장으로 참여한게 아니라

아들인 백제 태자 부여창이 선봉장으로 참여한 것에

응원하러 보병과 기병 50명만을 이끌고

아들의 군진에 잠깐 행차한 것 이었는데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모든 병력을 모아서

구천 혹은 고리산에서 성왕을 사로잡았고

 

신라장수 도도가 사로잡은 성왕에게 두 번 절하고는

 

<도도>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하니

백제 성왕은

 

<성왕>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

 

하니

도도는

 

<도도>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군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라고 하고

성왕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성왕>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습니다

 

삼국시대 명장면 , 당시 한창 강성하게 일어나던 신라와 달리 백제는 내부사정이 안좋아서 성왕이 죽기 전 매우 괴로워했음

 

성왕이 참수당하자

백제군은 혼비백산에 빠졌고

신라군은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했습니다

 

관산성 전투로 백제 좌평(백제최고귀족) 4명과

백제장병 2만 9천 600명이 참살당했고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고

이때의 패배로 백제는 멸망때까지

엄청난 침체를 겪게 됬고

멸망직전 백제는 잠깐 무왕이라는 중흥군주가 등장하나

전쟁이란건 단순히 게임처럼 몇만 죽으면 막사에서 군사를 또 뽑고

다시 보충하고 그러면 되는게 아니라

현실전쟁에서는 3만명이 죽으면

3만명 병사들의 6만부모 , 3만명 병사들의 9만 가족이

일단 국가에서 마비상황이 되는 것이고

 

스타크래프트랑 다른 실제 전쟁

 

당시 백제인구가 76만호니 76만가정 X 5명이라 계산하면

380만이니 대충 400만이라 치면

순식간에 나라인구 100분의 1이 증발한 것이고

 

현재 5천만인구의 대한민국 수능보는 인구와 한국국군 규모가 50만명인데

이 50만 인구라는게 총인구의 100분의 1이기에

그냥 한세대의 청소년 인구가 전부 증발하거나

국군 병사가 전멸한 수준과 다름없는 백제의 대참패이고

이미 이때를 기점으로 천하의 판세는 신라로 굳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이후 백제에 중흥군주이자 명군인 무왕이 나라를 되살리려 노력했어도

삼국지에서 삼국지덕후들은 제갈량이 백날 북벌하려해봤자

예전 촉나라 유비가 죽기전에 이릉대전에서 오나라에 죽은 아우

관우에 복수하려 75만대군을 일으키다 오나라의 방어에 막혀

전부 증발시켰고 

이게 실제 역사론 4~10만명이라 하는데

당시 촉나라 인구에서 착출할 수 있는 장병의 대부분이라

촉나라는 이때 젊은 인재풀을 전부 리셋시켜서

유비사후 제갈량이 백날 북벌하려해도

이때 이릉대전의 패배가 너무 커서 다들 회의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백제도 관산성 전투 패배 후에도 기본짬밥이 있어서 바로 망하진 않지만

겉은 멀쩡한데 속은 빈사상태인 딱 이런 상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대가야정복 화랑 사다함]

진흥왕 16년 10월 겨울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국경을 정했습니다

 

진흥왕때 한강(북한산)을 확보하며 고구려 백제 사이에 끼고 중국과 접하게 된 신라

 

진흥왕 23년 9월

가야가 모반했고

진흥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했습니다

 

사다함은 진골이며

내물왕의 7대손 이었습니다

 

사다함은 원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모가 수려하고 지기가 방정하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삼아 받들기를 청하니

사다함은 마지못해 응했습니다

 

신라 미소년수련집단 화랑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명에 달했고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습니다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명해 가야를 공격케 할때

이때 사다함의 나이가 15~16세였는데

사다함이 종군하길 청했고

 

진흥왕이 나이가 어리다고 허락치 않았지만

그 청하는 태도가 정성스럽고 뜻이 확고하므로

그를 귀당비장으로 삼자

따르는 무리가 또한 많았습니다

 

사다함이 가야 국경에 당도하자

사다함은 원수에게 청해서 부하병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양(가야 성문) 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야사람들은 갑자기 신라군사가 쳐들어오자

놀라 방어할 능력이 없었는데

신라 대군이 기회를 타

드디어 가야를 멸망시켰습니다

 

신라군이 돌아오자

진흥왕은 공을 평정해 가야사람 3백명을 노비로 사다함에게 주었지만

사다함은 받는 즉시 모두 놓아보내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풀어주어 양만을 만들고 받은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자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습니다

 

또 토지를 줬지만 굳이 사양하므로

진흥왕이 강제로 권하니

하는 수 없이 사다함은 알천의 쓸모없는 땅을 청해서 받았습니다

 

사다함이 처음에 무관랑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매우 슬퍼하다 7일만에 죽었습니다

그때 사다함의 나이 겨우 17세였습니다

 

[새들이 나무인줄 착각할정도로 그림 잘그린 솔거]

진흥왕 27년 2월 봄

황룡사가 준공되었습니다

이 해 황룡사가 완성되자 솔거라는 자가

황룡사벽에 그림을 그렸는데

 

신라사람이던 솔거는 출생이 한미해서

그의 씨족의 계보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솔거가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리자

줄기에는 비늘처럼 터져 주름졌고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서리어

까마귀 , 솔개 , 제비 , 참새들이

가끔 바라보고 날아들었다가

그림에 부딪혀 허둥거리다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린 지 오래되어 색이 바래지자

그 절의 중이 단청을 보수했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솔거는 또한 경주 분황사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 유마상도 그렸고

세상에 전해져서

사람들은 솔거를 신화(신의 화가) 로 여겼습니다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진흥왕 35년 3월 봄

황룡사 장륙상의 주조가 끝났고

장륙상에 사용된 구리의 중량은 3만 5천 7근이었고

도금한 금의 중량은 1만 1백 9십 8푼이었습니다

 

신라는 전설의 보물이 여럿 있는데

신라 삼보라 불리는 유물로서

천사옥대(허리띠) , 황룡사 구층목탑 ,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이렇게 세 개고

여기에 만파식적(평화를 부르는 피리) 도 있고

외적의 침입이 없어 여러 전설의 보물들을 온전히 보관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외적의 침입과 여러 상황때문에 신라삼보는 안타깝게도

다 오늘날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일단 장륙삼존불상은

진흥왕때 만들어졌으며

 

인도 아소카왕이 철 5만 7천 근과 금 3만 분으로

석가의 삼존불상을 만들다 실패하자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고

이 배가 바다를 떠돌아 다니다 신라 땅에 닿았고

신라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삼존불상을 만들었다 하고

조선시대까지 전해지다 조선말기 소실되었고

1976년 황룡사지 발굴때 거대한 크기의 장육존상 머리카락 파편이 발견되며

실존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장육존상 머리파편

 

장육존상 크기

 

일본 도다이지 대불 청소모습 , 고대 거대사찰과 거대불상이 유행했는데 섬이어서 안전했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외침으로 파괴됨(ㅠㅠ)

 

[화랑제도]

진흥왕 37년 봄

신라에 처음으로 원화제도를 두었고

처음에 신라조정에서는 인재를 알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 생각해

이에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게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 본 후

적절한 자를 천거해 임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선발했고

그녀의 이름은 남모와 준정이었습니다

 

그녀들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는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술을 강권했고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 그녀를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이에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해 해산되었습니다

 

그후 진흥왕은

다시 얼굴이 잘 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

 

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하고

그를 떠받들게 했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KBS 사극드라마 '화랑'

 

화랑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 유람하며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습니다

 

<김대문 화랑세기>

(신라의)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화랑)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화랑의 중심사상)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집밖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

 

무위의 일에 처하며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요 ,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

 

<당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

(신라는) 귀인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

 

[승려가 된 진흥왕]

당대 유행한 전륜성왕(불교의 제왕)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라 진흥왕은 어린시절에 즉위해

재위기간 내내 정복 , 정복을 하며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지만

잦은 전쟁으로 말년이 들어 고뇌가 깊어졌고

 

(인도의 전륜성왕이라 불리는 아소카왕과 비슷)

 

진흥왕은 말년엔 아예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고

자신을 법운이라는 법명을 스스로 지어 부르며

생애를 마쳤습니다

 

 

왕비 역시 진흥왕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습니다

 

황룡사도 창건했던 진흥왕은 이렇게 불교를 정치에도 여럿 활용했고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하고

 

'왕은 곧 부처'

 

라는 '왕즉불' 관념을 도입해

신라 왕실을 부처의 집안으로 ,

신라를 이상적인 불국토로 여기는 사상을 널리 유포시키고

불교를 크게 융성시키며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삼국 최전성기왕이라 하면

고구려 광개토대왕 ,

백제 근초고왕 ,

신라 진흥왕이 있고

각자 가장 삼국에서 강성하던 시기 왕이 된 정복군주였던 인물들입니다

 

<라봉봉>갈수록 글이 너무 길어지고

어디서 끊어야할지 모를정도로 텍스트 압박이 너무커서

신라이야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생각이고

삼국통일 주역국가답게 삼국중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나라의 위엄입니다

 

하여튼 ,

지증왕은 제가 제일 세종대왕급으로 한국사 임금중 대단하다 여기는 인물 중 한명이고

법흥왕 , 진흥왕이 많이 조명받지만

결국 가장 어렵고 은밀한 일은 지증왕때 이미 다 설계가 끝난 상황이었다 생각되고

지증왕때부터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는 국력이 배양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순장폐지로 삼국중 자유인이 된 신라 백성들이 더더욱 똘똘 뭉쳤을 것이며

이로인해 순장을 마지막까지 유지해서 백성들이 분열했던 가야가 빠른 속도로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의 든든한 왼팔이 되어 주었고

이 시기를 시작으로 점차 신라는 알에서 깨고나와 한강유역을 확보 ,

동남쪽 조그만한 약소국에서

삼한을 하나로 만들고 동아시아를 주도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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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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