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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국통일전쟁기 인물들>

[삼국통일전쟁기의 영웅 김춘추]

[삼국통일 대당 외교관 무열왕의 왕자 김인문]

[뿔몬+애처가+청백리+신라 최고지식인+삼국통일신라외교문서작성자 강수]

[한국위인 황산벌의 화랑소년 관창]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은 취도]

[화랑처럼 죽겠다 꿈꾼 김흠운]

[고슴도치같은 화살 필부]

<라봉봉>

 

[삼국통일전쟁기의 영웅 김춘추]

그렇게 김춘추의 꼭두각시였던 진덕여왕이 죽은 후

김유신 세력에 의해 다음 왕은 당연히 김유신의 친구 김춘추가 되었고

김춘추는 그렇게 신라 29대왕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했고

김춘추는 한국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민족의 반역자 혹은 영걸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

 

왜냐하면 당연히 김춘추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였고

도중에 죽었기에 삼국통일은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 즉 문무왕이 완성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김춘추가 김유신과 다 한것과 다름없기에

삼국통일의 주역인 인물이자 당대 동아시아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신라의 삼국통일은 말만 삼국통일이지

실제론 백제합병이라 할 수 있고

김춘추가 잔꾀를 부려

중국에 고구려를 바치기로 합의했기에

고구려 만주영토를 잃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엄청난 안타까움이고

지금도 과연 신라의 삼국통일이 삼국통일인가 싶은

의문이 많아 삼국통일이 아닌 이국통일이라 할 수 있고(백제만 통일함)

 

백제 영역만 확보했던 신라의 삼국통일

 

삼국지 제갈량이 수명을 늘리려 하늘에 촛불기도할때

위연이 들어오지 말라는데 급하게 쳐들어와서 촛불을 꺼뜨려

기도가 실패로 돌아갈때 삼국지 읽던 중국인들이

빡쳐서 책속에 들어가 위연 집단구타하고 싶은 마음이 있듯이

 

김춘추 역시 완전한 영걸 , 완전한 영웅이 아니고

위연마냥 능력은 분명 있는데 패고싶은 그런 반골스러운 인물이고

그렇다고 무능한 인물도 절대 아니라서

왕이 되기전 직접 고구려 , 일본 , 당나라를 다녀오는

국제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던 신라 영웅이고

삼국통일 주역이라

신라 영웅은 영웅인데

한국의 영웅은 아닌 그런 복잡한 느낌의 인물입니다

 

왕실이야기와 김춘추 이야기는 이전에 자주 썼으니

김춘추는 이전 이야기를 읽어보시고

김춘추는 신라가 선덕 , 진덕여왕이라는 두 여왕시기를 거친 후

칼을 갈고 나타난 삼국통일전쟁기 최종승자이자

당나라에 사대를 해서 외세의 도움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한민족의 중요한 부분을 잃게한 굴욕의 인물이라 보면 되고

 

이젠 그시대의 주요 인물들을 쓸 차례인데

생각해보니 김유신 이야기도 너무 많이 썼고

바로 태종 무열왕의 왕자 김인문 이야기로 가봅시다..

 

[삼국통일 대당 외교관 무열왕의 왕자 김인문]

김춘추에게는 두 아들이 유명한데

바로 첫째아들이자 태자 , 훗날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총명한 임금이 되는 태자 김법민이고

둘째아들 김인문이 있습니다

 

영화 '황산벌' 속 깐족대는 통역관으로 묘사되는 김인문

 

김법민은 문무왕이기에

삼국통일도 있고 문무왕릉도 있어서 너무 유명하지만

김인문은 많이 이야기 되지 않고 있고

 

삼국 고대가 저물어가고 새 시대가 열리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김춘추의 아들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거나 외교에서 맹활약했고

 

(김춘추는 종군+외교를 다했고 아들들은 아버지 재능을 한개씩 물려받음ㅋㅋ)

 

영민한 외교관이었던 김춘추의 아들답게

김인문은 둘째라 신라국왕은 되지 못했지만

삼국통일기 외교 최전선에서 활약한 신라왕자 외교관이었습니다

 

김인문은 어릴때부터 공부를 해서

유가 서적을 많이 읽었고

장자 ,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했으며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 말타기 , 향악을 잘하였고

기예에 능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은 엄친아라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이전 이야기에서 제가

조선 태종 이방원과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평행이론마냥 비슷한 느낌이 있다했는데

 

태종 김춘추와 태종 이방원

 

예전에 김춘추 이야기 읽었을때부터

문희와 우여곡절끝에 결혼한 이야기 ,

밥을 엄청나게 먹는 대식가였다는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를 읽어보며

김춘추가 굉장히 가정적인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우여곡절끝에 결혼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리는 왕은 조선시대까지도

그렇게 흔한 이야기는 아니고 비범한 인물이었고

 

태종 이방원이 자식교육은 잘시켜서

한국사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이 나왔듯이

태종 무열왕 김춘추 역시 자식교육을 잘시켜서

김법민 , 김인문이라는 훌륭한 왕자들이 나오게 되고

 

태종 이방원의 다른 아들 양녕과 효령은

충녕 세종대왕에 묻히는 감은 있지만

양녕 역시 심각한 사고를 치며 결코 왕이 되는 안되는 운명을 스스로 만들었지만

처세술은 9단이라서 세종 사후 동생의 손자를 죽이면서까지

계유정난때 세조의 편에 붙어먹어

양녕대군파는 오늘날까지 크게 번성하게 되었고

효령 역시 무능한 승려왕자 이미지가 있지만

조용조용 잘살아서 국가원로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91세로 장수해서 자식도 많았고 성종 17년에 사망할 정도였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태종 이방원과 태종 무열왕은

숙청이나 사대하며 불필요한 피를 흘렸다는 점에서

정치적 능력은 오히려 그렇게 높지 않았고

전 정치적 능력이 높다라는 기준은

정치과정에서 피를 최대한 덜 흘리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고단수라 생각하는 사람이고

저는 그들이 정치보다는 오히려 가정적인 면에서 뛰어난 아버지였다 생각하고

 

제가 역사에서 굉장히 주목한게

이방원-원경왕후 민씨 부부와

김춘추-문명왕후 김씨 부부가

둘다 12명의 자녀를 생산해냈다는 것이고

 

(생각해보니 자식 수도 소름돋게 같음..)

 

부부가 아무리 싸움을 하던 애증의 관계던 마누라 , 남편 흉을 보던간에

12명의 자식을 생산해냈다는 것은

그냥 어쩌구 저쩌구를 떠나서

누가봐도 사이가 굉장히 좋은 부부라 할 수 있고

이게 아무리 왕실을 굳건히 하기 위한 의무방어전 이런 과정이라 해도

정실왕비 단 한명에게 12명은

아무리 왕실이라 할지라도 예나 지금이나 예삿일이 절대 아니였고

길고 긴 결혼생활중 분명 마누라가 기분나쁘게 구는 순간도 있을텐데

그런 순간마저 번식을 했다는 점에서

참 대단한 인물들이란 생각이 들고

전 이런것 때문에 가정적인 면에서만큼은

태종 이방원이나 태종 김춘추를 굉장히 존경하고 닮고 싶을 정도입니다

 

굉장히 대단한 부부들이고

사실 부부가 성적 장애가 있는 불임 부부들도 실제로 있고

다 각자의 사정도 있고 제가 남 불행을 조롱하며 행복을 느끼진 않지만

아무리 아가리로 우리 부부 사이가 좋고 돈많고 잘나간다며

SNS에 하하호호 고급호텔이나 오마카세 사진 찍고 올려도

애가 없으면 결국 좀 설거지 ? 퐁퐁 ? (주현영 말투)

이런 부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고

전 그래서 요즘은 가난하고 어려운 부부여도 애 셋이고 넷이면

참 경외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태종 방원이 녀석이나

태종 춘추 녀석은 진짜 본인이 공부도 ㅈ빠지게 해서

과거급제하고 외교관으로 활약해서

국가적으로도 먹물끝판왕으로 활동한 인물이라

정력외에도 대가리 , 경제력도 탑급이라

자식새끼 12명 다 럭셔리하게 제대로 키운 새끼들이고

 

제가 그래서 지금도

가난한데 애 많이 놓기 VS 부유한데 애 없기

이런 갈등 혹은 생각들이 지금도 많고

이런 생각들이 영화 '이디오크러시' 에 제대로 나타나서

엘리트들은 자식을 안낳고

바보들만 자식을 5명 10명씩 낳아서

미래 인류는 다 바보만 남게되었다는

말하기 어려운 B급 사회풍자 코미디영화가 있는데

 

방원이나 춘추녀석은 성실히 살아서 부유한데 애 많이 놓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엄청난 녀석들이고

당연 자식들도 이런 아버지 어머니를 극도로 존경했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이런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자식들도 엇나갈지언정 엄청 크게 엇나가진 않고

다 자기 밥벌이 찾아서 이땅에 후손도 퍼트린듯 합니다

 

이렇게 12명 자녀를 생산한 당대 김춘추나 이방원도 카리스마가 지렸을거 같고

당장 지금도 다산한 부부들보면 경외심이 드는데

당시기준에도 첩도 아니고 정실 한명에게 12명은 심각히 사이가 좋은 것이라

자연히 카리스마가 형성되었을거 같고

 

실제로 애를 키워봐야 부모들도 EQ가 더 발달해서

내 아이를 키워봐야 상대 아이들이 왜이런지 공감하는 능력이 더 커진다하기에

김춘추와 이방원도 다산을 하고 많은 자녀들을 키워보며

국부나 지존으로서 신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자신감이 형성됬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당장 대한민국 대통령이 애가 10명이거나 하면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그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굉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게 인지상정인데

당대 배우고 배운 엘리트 신하들도

김춘추나 이방원보고 그런 심정이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나마 다산으로 유명한 한국 대통령은 5명을 낳은 김영삼이 있고

오늘날 대통령 , 정치인들이 여야할거 없이 김영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런게 분명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근데 김영삼때 IMF 오고 아무리 봐도 대단한 느낌은 별로 안드는데

수많은 현재 국회의 정치인들이 김영삼 키즈라는 것을 보면

나라의 미래가 좋다해야할지 암울해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 그래서 제가 이방원이나 김춘추는 가정적인 면에선

탑급 아버지였고 군왕으론 좀 무능+잔인한 인물이었다는 생각도 있고

이런것 때문인지

실제로 이방원 자식들이 오늘날에도

양녕파 , 효령파 , 전주이씨로 대대손손 번성하고 있다거나

신라 후기가 김춘추 핏줄로 이어지고 오늘날 수많은 한국의 김씨의 조상이 된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생각되고

 

또한 가화만사성이기에 김춘추와 이방원이 통일신라와 조선개국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처럼

개인이 모여 가정이 되고 가정이 모여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여 세계가 되는법인데

둘다 가정적으로 성공한 인물들인건 확실하고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는데

두 태종임금이 정치적으론 욕도 먹지만 부부가 화목했던 것은

지적소양과 군자의 덕목도 실제로 상당히 있었던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당대 이런 12명 자식놓은 엘리트 아버지 , 어머니와 식사를 할때도

자식들도 굉장히 엄숙하고 부모님을 존경하는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며 교육받으며 자랐을 것이라는 상상이 됩니다

 

이로인해 김춘추 자식들 역시 제대로 교육받으며 컸고

사이좋은 부모님을 보고 자라며

형제간 우애도 좋았고

 

반대로 연개소문은 엄청나게 뛰어난 능력이 있는

김춘추와 동시대의 한국 , 고구려 영걸이었지만

연개소문이 잔인하게 왕 대가리 썰고 공포정치하는걸

연남생 , 연남건 , 연남산 삼형제가 보며 자랐고

 

또한 연개소문 역시 '갓쉰동전' 에 나오듯이

어릴적 사랑하던 영희와 끝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와

영희는 당나라에 간 연개소문을 기다리다 신랑을 맞았다는 이야기 등

좀 민담으로 전해지거나 러브스토리가 불분명한 것과 달리

 

김춘추와 문명왕후는 '역사적 사실' 이고

가야계였던 김유신이 신라 왕실과 혈연좀 맺어보려고

꾀를 통해 여동생을 시집보낸면도 있고

그럼에도 부부가 12명 (히드라 한 부대) 생산한만큼 부부관계도 굉장히 좋았는데

 

이런것과 반대로 연개소문네 가족들은

잔인하고 유능한 아버지 원툴로 이끌어가는 형태라

워렌버핏이 말했듯이

하드캐리하는 한명의 영웅(연개소문)이 죽으면 나머지가 다 망하는

'나쁜주식' 에 속하는 가정이었고

 

반대로 김춘추네 가족들은

하드캐리하는 한명의 영웅(김춘추)이 죽어도 나머지(김법민 , 김인문) 이

캐리할 수 있는

'좋은주식' 에 속하는 가정이었고

 

(워렌버핏은 한니발 바르카처럼

한 명의 천재사장에 의존하는 회사가 아니라

로마처럼 제국을 세운 회사인 코카콜라나 애플처럼

사장이 바뀌고 바보가 경영해도

잘 굴러가고 성장하는 회사가 좋은회사라 말했음)

 

아무리 김춘추가 재수없고 때리고 싶어도

괜히 삼국통일 한건 아닙니다..

 

 

윗동네 고구려에서 신하가 왕모가지 썰고 국권을 잡아 공포정치하던 상황에

김춘추는 적어도 혈연적 정통성이 있음에도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양보하며 노골적으로 급하게 국권을 잡지도 않았고

 

이런것을 그대로 보고 배운

자녀들 역시

연개소문 아들들이 국권을 욕심내어 서로 죽일듯이 싸우다

천년 제국이자 수나라 , 당나라 100만대군에도 끄떡없던 고구려가

연남생이 문열어줘서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멸망했고

 

반대로

김춘추 자녀들은

김인문 역시 형 못지않게 능력있었지만

둘째였으므로 형을 적극 지지하고 왕위에 욕심내지 않으며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해 위기의 신라를 돕고

형과 같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어

역사에 주연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원래 유산을 공평히 상속하면

점차 재산이 팍 줄어들기에

동서양 할 것 없이 귀족 이상쯤 되면 유산상속은 장남에게 돌아갔고

이로인해 유럽 귀족들도 장남이 아닌 둘째 , 셋째들은

대부분 탱자탱자 놀다가 죽어갔는데

김인문은 이후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마냥

가정교육 똑바로 받은 집구석에서 장남이 아닌 둘째아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활을 했던 인물이고

 

방원이네 아들들이나 춘추네 아들들은

그만큼 존경하고 직접 보고 배워 따를 수 있었던

굉장히 가정적인 롤모델(부모님) 을 보고 성장했기에

국권을 누가 잡고를 떠나서

실제로 살아생전 형제들 우애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하여튼..

김인문은 23세때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에가서 숙위를 했습니다

 

(숙위는 외국 왕자나 귀족자제들이

당나라에 가서 당 황제 곁에 머물며

당황제는 외국 귀족들을 거느린다는 가오를 잡고

숙위들은 당에서 선진문물을 받고 더불어 외교관 역활을 하였던 제도임)

 

 

당고종은 김인문이 바다를 건너와 내조해주자

충성이 가상하다해서

좌령군위장군을 제수했고

653년 김인문은 당황제의 허가를 받고 귀국해

부모를 만났고

태종대왕 김춘추는 그에게 압독주 총관을 제수했습니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 침공을 받자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당나라군대의 원조를 얻어 원수를 갚으려 했고

숙위하러 가는 둘째아들 김인문에게 당의 원군을 청하려 했습니다

 

당황제가 김인문을 불러서

한국내 도로의 험난한 사정과 행군의 편의에 대해 물었더니

김인문은 일일이 소상히 대답했고

당황제가 기뻐하여 김인문에게 신구도 부대총관 관직을 주어

소정방의 병영으로 가라했고

김인문은 마침내 소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이르렀고

 

당나라군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한국 덕물도에 이르자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에게 명령하여

장군 김유신 , 진주 , 천촌 등을 데리고 큰 전함 1백 척에 군사를 싣은

당군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영화 황산벌에서

이 장면이 나오고 김인문이 통역하는 장면이 나옴)

 

나당연합군은 웅진어귀에 이르러 강가에 집결한 백제군을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의 서울에 들어가 그들을 격파했고

그렇게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고

소정방은 백제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 왕자 태를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갔고

 

나당연합군과 백제의 멸망

 

신라 태종 무열왕은 김인문이 백제멸망에 공(외교 및 통역) 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고 각간(1등벼슬) 을 더해주었고

얼마 있지 않아 김인문은 당에 들어가 이전과 같이 숙위했습니다

 

661년

당고종이 김인문을 불러

 

<당고종>내가 이미 백제를 격명하여 너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였으나

지금 고구려가 견고한 요새를 믿고 예맥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하여

사대의 예를 어기고 선린의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코자 하니

너도 돌아가서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거의 망하게 된 적을 섬멸케 하라

 

김인문은 즉시 본국(신라) 으로 돌아와

당황제의 명령을 전달했고

당시 신라는 무열왕 김춘추가 죽고 막 문무왕 김법민이 왕위를 이은 상황이었는데

문무왕은 동생 김인문으로 하여금 즉시 김유신과 함께 군사를 정비해 기다리게 했고

당군은 평양을 포위했지만

고구려 군사가 굳게 수비하자 승리하지 못하고

당군은 많은 병마가 부상당하고 사망했는데

이때 당군은 군량미 운송로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김인문은 이때 쌀 4천 석과 벼 2만여 곡을 싣고 평양으로 갔고

이에 따라 당군은 식량을 얻었지만 곧 눈이 크게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신라군 역시 돌아가려하자

고구려군이 돌아오는 길목을 막고 공격하려 하자

김인문은 김유신과 함께 꾀를 내어 밤이 어두울때를 기해서 도망하였고

고구려군이 다음날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김인문이 반격해 대파하고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5천여 명을 생포해 돌아갑니다

 

이후에도 김인문은 당에 머물러

왕이 된 형 문무왕을 보좌하며

신라의 대당외교관 , 주당대사가 되었고

 

668년

당고종이 이적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치게하고

또 김인문을 신라로 보내 신라에게도 군사의 징발을 요구했고

문무왕은 20만대군을 출동시켜 김인문과 함께 북한산성으로 가서 머무르며

먼저 김인문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과 회합하여 평양을 공격케 합니다

그들은 한달 남짓 만에 보장왕을 생포하였고 고구려는 멸망합니다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

 

김인문이 보장왕을 이적 장군앞에 꿇어 앉히고 그의 죄를 따지지

보장왕은 절하고 이적이 답례를 했고

이적은 곧 보장왕 , 연남산 , 연남건 , 연남생을 데리고 돌아갔고

문무왕은 동생 김인문의 지략이 훌륭하고 공로가 뛰어나다해서

식읍 5백호를 주었습니다

 

당고종도 신라왕자 김인문을 좋아해 곁에두고 총애하였고

그를 두고

 

<당고종>조아의 양장이오 , 문무의 영재이다

작위를 제정하여 새로운 봉읍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고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 주었습니다

이후 김인문은 당 궁궐에서 황제를 시위하며 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673년

본국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반군을 받아들이고

백제 고토를 차지해 당나라와 나당전쟁을 시작하자

당황제는 크게 노했고

조서를 내려 문무왕의 신라왕의 관작을 박탈합니다

 

이때 김인문은 우효위 원외 대장군 , 임해군공이 되어 당나라 서울에 있었는데

당황제는 신라를 분열시키기 위해

문무왕의 친동생인 김인문을 새로운 신라 임금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을 대신하게 했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합니다

 

김인문은 간곡히 사양했지만 황제의 거부로

하는 수 없이 신라로 돌아갑니다

 

이때 마침 문무왕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해서

당황제는 죄를 용서하고 문무왕 관작을 회복시키고

김인문은 중도에 돌아가 역시 이전 관직을 다시 맡게 됩니다

 

이후에도 김인문은 당에 머물며 외교활동을 전개하다

694년 신라 효소왕 3년 4월 29일

당나라 서울에서 병으로 66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그가 죽자 당중종은 놀라고 슬퍼해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 높여줬고

효소대왕은 그에게 태대각간(각간 앞에 태자와 대자가 붙어서

일반 국무총리가 아니라 짱짱국무총리 이런 뜻임)

을 추증하고

695년 10월 27일 서울 서원에 장사지내게 했고

김인문은 7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며

당 조정에서 22년을 숙위하며

삼국통일시기 신라의 대당외교관으로 활약한 신라의 보이지 않는

또다른 영웅이었습니다

 

다들 반굴이나 관창 , 김유신 같은 활약한 장수만 생각하지만

외교는 보이지 않는 또다른 전쟁이란 말이 있듯이

김인문이 뒤에서 계속 공작을 해주었기에 장수와 병사들도 안심할 수 있었고

 

김인문은 중국의 강산을 사랑해 중국에 오래 머물렀음에도

당나라의 이간책에도 넘어가지 않고

신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며 양국의 관계를 조율한 인물이었고

신라판 '서희' 나 마찬가지였기에

김유신과 더불어 태대각간 칭호를 받기에도

부족함이 결코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인문과 더불어

삼국통일전쟁기 활약한 신라의 대외교관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바로 '강수' 라는 인물로

김인문이 주당대사였다면

강수는 신라 외교부 장관이었고

삼국통일전쟁기때 외교문서 작성을 실제로 한 명필입니다

 

[뿔몬+애처가+청백리+신라 최고지식인+삼국통일신라외교문서작성자 강수]

 

강수는 특이한 인물로서

중원경(충주) 사량 사람인데 아버지는 석체 나마였고

 

그의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 뒷부분에 불거진 뼈가 있었고 (뿔몬)

아이 아버지 석체가 이 아이를 안고 당시의 현자로 불리는 사람에게 가서

 

<석체>이 아이의 두골이 이렇게 생겼으니 어떠합니까 ?

 

하자

 

뿔몬으로 태어난 강수

 

그는

 

<현자>내가 들으니 복희씨는 범의 형상이요 ,

여와씨는 뱀의 몸이요 , 신농씨는 소의 머리요 , 

고요는 말의 입이라 하였으니 ,

성현은 동류지만 그 상이 역시 범상치 않은 바가 있다. 

 

또한 이 아이를 보니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데 

상법에 얼굴의 사마귀는 좋지 않지만 머리의 사마귀는 나쁘지 않다고 하였으니 , 

이는 기이한 아이임에 틀림없도다

 

라고 했고

아버지가 돌아와 아내에게 이르기를 

 

<석체>당신 아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니 잘 길러서 장차 국사(나라 스승)가 되게 해야겠소

 

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장성하자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문장의 뜻에 통달했고

아버지가 그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석체>너는 불도를 배우겠느냐 유도를 배우겠느냐 ?

 

라고 묻자

아들 강수는

 

<강수>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 합니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인데 불도는 배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 

저는 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이를 듣고 아버지가

 

<석체>너 좋을 대로 하라

 

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강수는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 , '곡례' , '이아' , '문선'을 읽었고 

배운 것은 비록 적었으나 깨달은 바는 고원하여 ,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강수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당시에 소문난 사람이 되었고

강수가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결혼안하고 정을 통함)하여 정이 매우 돈독했습니다

 

강수의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고을의 처녀들 가운데 용모와 행실이 좋은 자를 중매하여 아내로 삼게 하려 했는데

강수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사양했습니다

 

아버지가 노하여 말했습니다

 

<석체>너는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 

미천한 자를 배필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니가 전국1등해서 서울대 법대가고 사법고시 최연소합격했는데

데려오는 마누라가 고작 고졸 공순이야 ?!!

내가 어떻게 키웠는뎅 !! 빼애애액 !!! )

 

강수가 재배(절)하고 말했습니다

 

<강수>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옛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조강지처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 

빈천할 때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

 

고 하였으니 ,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ㅈ까셈 양심 없으셈 ?

지금 우리 공순이가 공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내가 공부했음 ,

지금 잘나간다고 여기서 우리 공순이 버리면 세상이 손가락질함 !!)

 

강수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태종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물었습니다

 

강수가 왕 앞에서 그 부분을 한 번 보고는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데 없이 설명하고 해석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습니다

 

강수가 대답하기를 

 

<강수>신은 본래 임나 가량 사람이며 이름은 자두입니다

 

라고 했고

무열왕이 말하기를 

 

<태종 무열왕>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강한 머리)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

 

라 했고

이로인해 그는 본명이 아닌 별명 강수로 사람들에게 이야기 되게 되었습니다

 

무열왕은 강수에게 당 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회답의 표를 짓게 하였고

강수의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으므로 

왕이 더욱 그를 기특히 여겨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이라고만 했습니다

 

 

강수가 일찌기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집안이 가난하여도 태연하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에서 거두는 곡식 일백 섬을 주게 했습니다

 

이후 문무왕이 말하기를 

 

<문무왕>강수가 문장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 

편지로써 중국 및 고구려 , 백제 두 나라에 의사를 잘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호(나당동맹)를 맺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 선왕이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이 비록 무공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

 

라 하고 , 

그에게 사찬의 작위를 주고 봉록을 매년 곡식 이백 석으로 올려 주었습니다

 

신문대왕 때에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관청에서 부의를 주었는데 , 

옷과 피륙이 아주 많았으나 

집안 사람들이 사사로이 가지지 않고 모두 불사에 쓰도록 보내주었다. 

그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대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백 석을 하사케 했습니다

 

강수의 아내는 사양하며 말했습니다

 

<강수의 아내>첩은 천한 몸으로 의식을 남편에게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홀 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더 이상 나라의 후한 하사를 받겠습니까 ?

 

그녀는 끝내 이를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외교문서는 일반적으로 일반인들끼리 대화하는 수준이 아니라

토씨 하나하나의 정확함 , 말의 맛(언어의 뉘앙스) ,

분위기 조성 , 국가 이권 등까지 고려해서 써야하기에

가장 예민한 부분까지 고려해야해서

보통 그 나라에서 가장 똑똑하다 여겨지는 사람들이 외교문서 작성을 하게 되고

 

(한국사에서는 유명한 외교관이자 엘리트라 여겨지는 강수 , 서희 , 이승만)

 

강수는 그렇게 신라 으뜸가는 대문장가로서

나당동맹 외교문서 작성 , 삼국통일전쟁기 외교문서를 작성한

당대 신라 최고의 문장가였습니다

 

태종 무열왕 시기는 삼국통일전쟁시기로서

삼국통일의 영웅들이 계속 튀어나왔는데

김인문과 강수가 삼국통일전쟁시기동안

예민한 외교 , 문치주의로 나라의 이권을 수호했다면

이미 잘 알려진대로

김유신과 함께 수많은 용맹한 장수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김유신은 많이 썼으니 스킵하고..

다음 이야기는 한국위인이자 백제 영웅인 '계백'에 맞섰던

한국 위인이자 신라 영웅인 황산벌의 '관창'입니다

 

[한국위인 황산벌의 화랑소년 관창]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로서

그는 용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곧잘 사귀었습니다

16세에 기마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했습니다

 

660년 태종 무열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습니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 품일이 관창에게 말했습니다

 

<김품일>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 

 

관창은

 

<관창>그렇습니다

 

라 하고 ,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여러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습니다

백제대장 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게하니 , 그가 어리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계백은 이를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계백>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구나

소년도 이렇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

 

황산벌의 계백과 관창

 

계백은 곧 그를 살려 보낼 것을 허락했고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관창>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습니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어 돌려 보냈습니다

 

김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김품일>내 아들의 면목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3군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했습니다

 

 

(황산벌 전투 신라의 승리 , 계백 5천 결사대 전원 전사)

 

대왕이 관창에게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 

그 가족들에게 당견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1백 섬을 부의로 주었습니다

 

관창 이외에도 삼국통일전쟁기간동안 수많은 신라 장수들이 희생하였습니다

 

[승복을 벗고 군복을 입은 취도]

취도는 사량 사람으로서 나마 취복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성씨는 역사기록에 전하지 않고

취도는 형제가 셋인데 맏이는 부과요, 가운데는 취도요, 막내는 핍실이었습니다

 

취도가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취도는 이름을 도옥이라 하고 실제사에 거주했습니다

 

태종대왕 때 백제가 와서 조천성을 공격하자 

태종 무열왕은 군사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싸움이 결판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 도옥이 자기 무리에게 말하기를 

 

<취도(도옥)>내가 들으니

'상등의 중은 술업에 정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의 효용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

고 하였는데 , 

나는 외형만 중과 같을 뿐이며 ,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선행이 없으니 , 

군대에 들어가 몸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

 

라 하고 ,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취도로 고쳤습니다

이 이름은 빨리 군대로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곧 병부로 가서 삼천당에 속하기를 청하고 ,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로 갔습니다

깃발과 북이 서로 어울리자 취도는 창과 칼을 잡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 여러 명을 죽인 다음 취도 자신도 죽었습니다

 

671년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 변경의 벼를 짓밟게 했고

마침내 백제인들과 웅진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취도의 형인 부과가 당주로서 전사하여 논공이 제일이었습니다

            

684년

고구려의 잔적(남은 적 , 부흥군)이 보덕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토벌을 명하였고

그 때 취도의 동생 핍실을 귀당 제감으로 삼았습니다

 

핍실은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핍실>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로 죽어서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거늘 , 

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 

오늘 그대와의 생이별은 결국 사별이 될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사시오 !

 

핍실은 적과 대진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고 자기도 죽었습니다

신문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였습니다

 

<신문왕>취도가 죽을 자리를 알아서 형제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며 , 

부과와 핍실도 정의 앞에 용감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

 

대왕은 모두에게 사찬 벼슬을 추증했습니다

 

삼형제 전원 전사

 

삼국통일전쟁기는 신라에 극도의 상무적인 기풍이 흐르던 시기로서

신라의 귀족 , 평민 할 것없이 누구던

전쟁터에서 나가 전사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시대였고

건국때부터 대국이었던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인구와 영토도 압도적으로 적었던 신라는

이렇게 형제 , 아버지와 아들 등 장정이기만 하면

전부 전쟁터로 나섰기에 일가족이 전원 전사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당장 왕과 실권자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부터

일가족(왕자와 김유신 아들)들 다 데리고 전쟁터에 직접 친정하던 상황이어서

귀족들이나 평민들 역시 그대로 따랐고

또한 당대 신라는 후기 통일신라처럼 골품제와 부정부패로 썩어있지 않고

그나마 깨끗하던 시기라 논공행상도 철저해서 싸우다 죽으면

곧바로 식읍과 벼슬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결론은 당대 신라 왕족과 귀족들도

뒤에서 장기판두듯이 하며 얍삽하게 병사들만 희생시키지 않았고

다음은 이런 시기 역시 전장터에서 전사한 신라왕족 김흠운 이야기입니다

 

[화랑처럼 죽겠다 꿈꾼 김흠운]

 김흠운은 나밀왕의 8세 손으로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었습니다

김흠운이 소년 시절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을 때 ,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 

김흠운은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 감동되어 자기도 그와 같이 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같은 문하에 있던 중 전밀이 말했습니다

 

<전밀>이 사람이 만일 전쟁에 나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김흠운

 

655년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음을 분하게 여겨 

정벌할 것을 계획하고 군사를 동원할 때 ,

김흠운을 낭당 대감으로 삼았습니다

이리하여 김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 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진공하려 하였는데 , 

백제인들이 야음(밤)을 기하여 급히 달려와 이른 새벽에 성루로 올라왔습니다

우리 군사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서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적군이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급히 공격해오니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습니다

 

김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잡고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 대사 전지가 달래며 말했습니다

 

<전지>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 

따라서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진골(왕족)이며 대왕의 사위이므로,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의 대단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김흠운이 말했습니다

 

<김흠운>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추구하겠느냐 ?

그는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종자가 말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김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습니다

이 때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함께 전사했습니다

 

보기당주 보용나는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보용나>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와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익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실될 것 없다

 

보용나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습니다

태종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주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슬퍼하며 양산가를 지었습니다

 

김흠운은 용맹히 전사한 공으로 그의 딸은 훗날 왕비가 되었고

바로 통일신라 절대권력을 형성한 신문왕의 왕비 신목왕후의 아버지가 바로 김흠운입니다

 

(신문왕도 장인 김흠운이 삼국통일기 전쟁터에서 전사한 왕족이었고

김흠운이 또한 태종무열왕 사위였기에 신문왕 마누라가 무열왕 손녀여서

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

 

신라는 삼국통일전쟁기 시기동안

왕족이 이렇게 나가서 전사했고 (노블리스 오블리주)

로마도 2차 포에니 전쟁때

오늘날 대통령격인 집정관들이 25명이 최전선에 나가 8명이 전사했고

개인적으로 신라가 로마와 비슷한 나라였다 생각됩니다

 

<로마인에게 배우는 경영의 지혜 , 김경준>

건국 이래 절대절명의 위기였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지속된 16년간

집정관 자격으로 최전선에 나가 싸운 사람은 25명에 이르고

그 중 8명이 전사했다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집정관이 전사한 것 외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귀족의 희생도 커서

줄곧 원로원계급의 전사자 비율이 제일 높았다

이 전쟁에서 로마의 장정들이

세 명 중 한 명 꼴로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집정관의 전사 비율도 장병들과 같았다

 

국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헌신은

결국 목숨과 돈으로 집약된다

목숨이란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돈이란 국가의 운영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다

지도층이 보통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목숨과 돈을

국가를 위해 바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군대가고 세금내는 사람들은 국가가 아니라

몇몇 지도층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도층의 희생정신은 평상시보다는 위기를 맞이했을 때

분명히 드러나는 특성이 있다

평소 조직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던 지도층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친다면

리더십을 확보할 수 없다.

좋은 시절에 단맛만 즐기면서

어려워졌을때 쓴맛은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미 타인을 이끌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삼국통일전쟁 시기 신라도 포에니전쟁 시기 로마때처럼

상류층내에서 굉장히 건전한 기풍이 흐르고 있었고

역시 패권을 잡은후인 통일신라 , 로마제국 시기부터는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귀족들은 백성을 위하는 의무보다

쾌락과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했단 점이 비슷합니다

 

하여튼 이런것 때문에

신라 왕족도 나가서 전사하는 상황이라

당시 일반 귀족 , 장수들도 의기를 내어

목숨바쳐 희생하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됩니다

 

[고슴도치같은 화살 필부]

필부는 사량 사람이며 아버지는 존대 아찬이었습니다

백제 , 고구려 , 말갈 등이 점점 친해지다가 아주 밀접한 사이가 되어 

그들이 함께 신라 침탈을 도모하자(십자동맹)

 

태종대왕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재로서 능히 적을 방어할 만한 사람을 구하여 

필부를 칠중성 하의 현령으로 삼았습니다

 

660년

그 이듬해인 경신 가을 7월에 왕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격멸했습니다 (백제멸망)

이에 고구려가 우리를 미워하여 겨울 10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칠중성을 포위하였므로

필부가 이를 수비하면서 20여 일 동안 계속하여 싸웠습니다

 

적장은 우리 사졸이 성의를 다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고 , 

이들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 때 역신 대나마 비삽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적에게 고하기를

성 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으니 

만약 이를 친다면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고 알리는 바람에 적은 다시 공격해왔습니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칼을 뽑아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으로 던지고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필부>충신과 의사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 

이 성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한바탕 호통을 치니 병든 자들도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성에 올랐으나 , 

곧 사기가 사라져 사상자가 반이 넘었습니다

 

그 때 적이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지르고 성안으로 공격해왔고

필부는 상간 본숙, 모지, 미제 등과 함께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빗발같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온 몸에 상처를 입어 ,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 내리자 땅에 쓰러져 전사했습니다

태종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게 울며 그에게 급찬을 추증했습니다

 

필부

 

<라봉봉>

저도 쓰면서 배워가고 뒤늦게 생각해보는 것도 있어서

쓰면서 태종 무열왕도 어느 부분에선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고

이전에 퇴계이황이 결혼할때 말씀하신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

라는 말이 참 실감이 났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 태종 무열왕이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대업의 책임자가 된건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고

 

동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국권자인

의자왕이나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전에 태종 무열왕 김춘추 기록에

당태종 이세민도 김춘추의 얼굴을 보고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했다는 기록이 있고

 

무열왕 기록에 또한

 

'왕은 하루에 말(삼국시대 기준 6kg)과 장끼 아홉 마리씩 먹었다.

백제를 멸한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루 식사는 여섯 말(12kg) , 여섯 , 마리였다'

 

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이 있는데

무심코 넘긴 기록들이지만

자식을 12명 낳은 것을 보면 왜이리 먹었는지

납득이 가긴 갑니다

 

이런것 때문에

60세에 뒤늦게 친구 김춘추 딸과 결혼한

김유신도 친구따라 10명의 자식을 낳아버린듯하고

김춘추 이전 성골왕실 혈통이 끊기고

진골 김춘추부터 자녀가 번성해 신라 하대는 김춘추계 , 진골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대 전쟁이 삼국 다 문명 , 율령국가였고

화포와 총포 발명 전까지 냉병기 시대 군사기술력은 다 칼과 화살로 또이또이했기에

과학기술보단 장군들 무력이나 병사들의 사기 영향을 크게 받았고

개인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 한 원인도

엄청 복잡하고 무슨 대단한 원인에서 찾기보다는

그냥 의자왕 자녀가 50명 이상이란 기록과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후 시체를 썰어서 구덩이에 버렸다는 기록만 봐도

당대 백제와 고구려가 굉장히 도덕과 규범적인 면에서 벗어난 상황이어서

혼란한 정치상에 백성들이 단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신라는 그나마 정상적이고 화목한 군주의 등장으로

백성들이 목숨걸고 싸우고 결집했던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이로인해 신라는 외교전에서도 더 앞서갈 수 있었다 생각하고

신라 왕족들의 솔선수범과 논공행상도 철저해서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신라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이때 역시 삼국을 병합하려는 꿈을 꾼

김유신의 야망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고

명군과 명장의 지휘아래 신라인이 똘똘 뭉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인들을 똘똘 뭉치게한 힘은

단순히 김춘추와 김유신이 훌륭하고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보기는 어렵고

다른 나라를 합병하려면 원래 3배 이상정도의 국력이 필요하다는데

 

신라는 이전 지증왕때부터 개혁을 해서

나라 국력이 강해져

인구와 영토만 좁을 뿐이지 진흥왕때부터

이미 삼국에서 가장 으뜸으로 일어난 상황이고

한강차지 이후 백제 고구려와의 양면전쟁을 수행하며

한강을 철통 방어하던 상황이라

이미 소년시절 김유신이 삼국통일 꿈을 꿀정도로

신라도 삼국중 국가적 자신감은 어느정도 있던 상황이었고

 

점차 갈수록 백제의 반격에 위기를 겪다가

마지막 온힘을 다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는 것이었고

원래 당대 삼국에서 1등하다가 2 , 3등이 다시 치고올라오자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상황이어서

신라도 이전부터 쌓여온 국력으로 마지막 라스트 댄스를 춘것이었지

완전 무일푼으로 이뤄낸 삼국통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의 3배 이상 국력을 가졌냐면

그건 또 아닌 상황이라

결국 신라의 주체적 통일이 아닌

외세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굴욕적 통일을 이룩하였고

그나마 후삼국시대 태조 왕건이 정상적 통일을 이룩하며

완전한 민족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때에서야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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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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