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데카르트>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시대]
[몸이 약한 아이]
[XY좌표계 발명(데카르트와 파리)]
[장미십자회]
[자유를 위한 네덜란드행]
[딸의 죽음]
[방법서설]
[나는 생각한다 ,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도 다 맞지는 않다규 !]
[여왕의 스승]
<라봉봉>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시대]
르네 데카르트는 과학적 사상가이자 수학자 , 자연과학자 , 자연철학자입니다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투렌 지방의 투르 인근의 소도시에서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데카르트가 태어나던 16세기는
마르틴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
을 통해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던 기풍이
전 유럽에 흐르던 시기였고
또한 코페르티쿠스 , 갈릴레오 , 케플러 등의 과학자가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하며
'과학혁명'
이 시작되고 있어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데카르트는
전통적 권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는데 영향을 미치며
여러 과학적 발견들은 데카르트에게 기존의 지식체계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데카르트가 생후 13개월 반이었을 때 데카르트의 어머니는 출산중 사망했고
젊은 르네는 자신의 시간을 보냈고
외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몸이 약한 아이]
데카르트는 세 자녀중 막내였는데
지방 의회 의원이었던 데카르트의 아버지 요아킴이었기에
이로인해 데카르트는 귀족 계급을 물려받았고
요아킴은 아이들을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보냈고
몇 년 후 외할머니가 재혼한 후에도 외할머니에게 머물렀고
데카르트 집안은 좋은 교육에 관심이 많아
르네 데카르트가 8세가 되던 해 르네를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라플레쉬에 있는 앙리 4세의 예수회 대학의 기숙학교에 7년간 보내게 됬고
라플레쉬에서는 1200명의 젊은이들이
군사공학 , 사법부 , 정부행정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고전연구 , 과학 , 수학 , 형이상학 외에도
연기 , 음악 , 시 , 춤 , 승마 , 펜싱을 공부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몸이 약해서 특별히 학교의 엄격한 시간표를 따르지 않고
항상 오전 늦게까지 늦잠을 잘 수 있었는데
수도원에는 새벽 미사가 있는데 이때에도 정말 못일어나서
담당신부로부터 특례로 새벽기상을 면제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좋은 학생이었고
그는 수사학(웅변) , 논리학 , 음악 , 천문학 , 형이상학(존재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 , 나는 누구일까) ,
자연철학 , 윤리학 등을 배우며
이런 것들은 그가 철학자 , 수학자로서의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후 4년동안 푸아티에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데카르트는
1616년 20세의 나이에 법학 학위를 받게 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이 기간동안 신경쇠약에 걸렸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데카르트의 아버지는 데카르트가 의회에 들어갔을 것을 기대했지만
의회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연령은 27세여서
20세에 불과한 데카르트였기에
1618년 데카르트는 22세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했고 (끌려갔다고도 함)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의 브레다에서 주둔했는데
프로테스탄트 교도인 모리스 왕자의 군대에서 수학과 군사 건축을 가르치는
비공식 학생으로 15개월을 보내게 됬고
몇 가지 전투를 보았다 하고
브레다에서 주둔하는 동안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아이작 벡만을 만났고
아이작 백만은 데카르트의 매우 영향력 있는 스승이 되었습니다
아이작 벡만은 데카르트의 수학과 과학 연구를 격려했습니다
[XY좌표계 발명(데카르트와 파리)]
1619년
데카르트는 군대를 떠났고
1619~1628년 동안 북유럽과 남유럽을 여행하면서 보냈는데 (역시 금수저 ;;)
1619년 보헤미아에 있는 동안 데카르트는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적으로 , 대수적 문제를 기하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인
해석 기하학을 발명하였고
해석 기하학은 데카르트가 좌표를 사용하여
공간에 있는 점들을 알아내는 방법을 설명한 책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고
데카르트는 처음으로 그래프를 그려 수학적 함수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였고
데카르트가 원조라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데카르트의 업적이 바로 XY 좌표계인데
데카르트는 평생 몸이 약해서 침대에 누워서 사색 , 명상하는 것을 즐겼는데
여전히 사색을 좋아하던 청년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관찰하다가
파리가 천장에 앉자
<데카르트>어떻게 하면 저 천장의 파리 한 마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
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데카르트는
종이 위에 점을 찍고 바둑판 무늬였던 천장을 이용해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려 했고
종이 위해 가로줄과 세로줄을 하나씩 그어 기준이 되는 선 ,
오늘날 좌표평면의 가로축과 세로축을 만들었고
오늘날 xy 좌표계를 만들게 됩니다
이 발견이 대단한 이유는
데카르트는 좌표평면을 4개의 구역(제1사분면~제4사분면) 으로 나누어 표시하며
이전에 많이 사용하지 않던 0이나 -1 같은 음수의 역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대수식을 좌표평면위에 나타낼 수 있게되어
복잡했던 대수적 풀이를 좌표평면을 이용하여 이전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좌표평면이 등장하며
x에 따른 y값의 변화 등이 나타나며
함수 개념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여튼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GPS나 네비게이션도 없고
좌표평면화면인 모니터 , 그래픽 컴퓨터도 없고
마우스도 없고
영화 예매때 A5 , E7 이런식으로 예매하는 좌석표도 없고 노답인 상황이라
아직도 우리는 스마트폰은 커녕 말타고 다녀야할 수도 있고
논리를 제일의 국시로 삼았던 데카르트가 '좌표계엄령' 을 내리며
초딩수준(사칙연산)에 머물러있던
세계수학계가 안정을 찾고 중등과정(abc , xyz , 좌표) 으로 심화되었고
고등수학(미적분 , 함수)으로 나아가는 구국의 역할을 해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애국 수학계 여러분 여러분은 본 xy좌표계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수학계는 이 순간부터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프랑스 만세 , xy 좌표계 만세.
데카르트는 또한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수학에 기초한
보편적인 연역적 추론 방법을 고안했고
훗날 그가
'방법에 관한 담론(방법서설 , 1637년)' 과 '마음의 방향을 위한 규칙(1628년)' 에서 공식화 한
이 방법은 네 가지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자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2.문제를 가장 단순한 부분으로 나누라
3.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행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4.추론을 다시 확인하라
또한 데카르트는 모든 핵심 개념과 각 문제의 한계를 명확히 정의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장미십자회]
데카르트는 또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신지학 실천가들의 주장과 같은
난해한 지식에 대한 것도 조사했는데
신지학은 신비주의적 사상 철학 체계로서 모든 종교 , 사상 , 철학 , 과학 , 예술 등의
근본적인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이라 합니다
카탈루냐의 신비주의자 라몬 룰과 독일 연금술사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의
추종자들에게는 실망했지만
그는 장미십자회 신비주의 협회의 회원인 독일 수학자
요한 파울하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미십자회는 17~19세기 존재했다고 널리 믿어진 유럽의 비밀 결사인데
프리메이슨으로 인해 비밀 결사가 유행하던 시기
독일의 한 책에서 언급되며 세간에 알려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원이라는 십자가와 장미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사용해서
이 이름이 붙었고
장미 십자회 회원들은 학문을 암호로 기록하려 마법의 언어를 개발하려 했고 (ㅋㅋ;;)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자기들의 땅의 법과 관습에 따라 옷을 입고 행동했고
그들의 임무는 과학 지식을 알리는 것 , 학문과 사회의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이었고
(피타고라스도 그렇고 의외로 이공계나 수학자 놈들이 자뻑 + 문과적 소양이 딸려서
사이비종교나 비밀단체 이런거에 잘빠지는듯)
한때 나름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단체라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도 이 단체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하고 (ㅋㅋ;;)
여튼 접촉은 실패했지만
데카르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데카르트는 장미십자회의 여러 목표와 습관을 공유해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은둔하며 살았고
거주지를 자주 바꾸었고 (네덜란드에서 22년간 살며 18곳에서 살음ㅋㅋ;;)
무료로 의술을 행하며 인간의 수명을 늘리려 노력했고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는 과학의 능력에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장미십자회의
마술적이고 신비로운 믿음은 거부했고 (간잽ㅋㅋ)
그에게 그가 살던 이 시대는 과학혁명을 위한 희망의 시기였고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을 대체하기 위해
관찰과 실험의 새로운 과학을 제안합니다
[자유를 위한 네덜란드행]
1622년 데카르트는 파리로 이주 ,
그곳에서 그는 도박 , 말타기 , 궁정과 음악회와 극장 다니기를 했고
학자 , 작가 , 수학자 및 과학자들과 어울리며
더 큰 지적 세계와 접촉하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 데카르트는 펜싱과 금속에 관한 논문도 썼다 합니다
근데 데카르트는 가톨릭 열성팬이 아니었고 위그노 지방 출신에
장미 십자회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데카르트는 종교적 관용과 이성의 사용을 옹호했기 때문에
1628년 데카르트는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 파리를 떠났고
프로테스탄트 ,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로 ㅌㅌ합니다
이미 금수저 데카르트는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충분한 돈과 재산을 상속받은 상황이었고
네덜란드는 당시 관용의 안식처였고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자연적으로 기적을 설명하려다가 화형을 처해질 두려움 없이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었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로마가톨릭 교회의 영향에 있는 프랑스에서는 종교적 편협이 고조되며
1615년 유대인들은 추방되었고
프로테스탄트 마지막 본거지 라 로셸은 데카르트가 떠나기 불과 몇 주전에 무너졌고
1624년 프랑스 의회는 죽음의 고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이단으로 판단된 사람들은 계속 화형에 처해졌고
노답이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 특 : 잘나가다가 갑자기 큰 사회적 사건 일으키면서 자국 과학자들 외국으로 공짜수출함 ;;)
1629년 데카르트는 네덜란드 프라네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가톨릭 가정에 머물며
'명상록'
의 초고를 썼고
1630년 네덜란드 라이덴(레이던) 대학에 입학했고
라이덴 대학은 오늘날에도 네덜란드 최상위 대학으로서
수많은 외국의 정상들이 이곳 출신이며
르네 데카르트 외에도 엔리코 페르미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이 학교를 거쳐간 자랑스런 동문이라 합니다 (ㄷㄷ;;)
[딸의 죽음]
1635년 데카르트의 딸 프랑신이
가정부 출신 헬레나 얀스에게서 태어났는데
결혼은 안했고 딸은 조카라 둘러댔고 (;;)
딸은 5살때 성홍열로 사망했고
이는 데카르트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었고
그녀의 죽음을 언급하며 데카르트는
<데카르트>난 남자기 때문에 눈물을 참아야한다 ,
믿지 않는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도 남자이자 아버지였고
딸이 죽었을때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고 합니다
이후 데카르트는 헬레나와 헤어지고
헬레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때 지참금을 주었고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됩니다
[방법서설]
1633년 데카르트는
'세계(1634년)'
를 출간하려던 찰나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이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견해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로마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렸고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입장이
그의 우주론과 물리학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교회가 갈릴레이에 대한 단죄를 철회하기를 바라며
세계의 출간을 미뤘고
데카르트는 교회를 두려워했지만
언젠간 자신의 물리학이 교회 교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체하고 가톨릭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바랬습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에 관한 담론(방법서설 , 1637년) 을 출간하는데
이는 라틴어로 쓰여지지 않은 최초의 중요한 현대 철학 작품 중 하나이고
원래 정식 제목은 더 깁니다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
데카르트는 여성을 포함해 상상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고 밝혔고
그는 모든 사람이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방법서설의 세 편의 에세이에서는
그는 과학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서술했고
방법사설과 함께 쓰여진 에세이에 포함된
'굴절률' (디옵트리크 Dioptrique 1637년) 이라는 짧은 논문에서는
굴절의 법칙을 이끌어 냈고
기상학에서는 무지개를 설명 ,
기하학에서는 해석 기하학에 대한 설명을 했고
또한 프랑수아 비에트가 발명한 시스템을 완성해서
알려진 수량을 a , b , c ... 로 알려진 수량으로 나타내고
미지수를 x , y , z ... 로 , 제곱 , 입방체 및 기타 거듭제곱을
숫자 위 첨자로 표현해 x^2 , x^3 ... 과 같이
대수계산을 이전보다 훨씬 쉽게 만들었습니다
(역시 중딩수학의 아버지 ;;)
그리고 또한 데카르트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도덕규범을 제시했는데
이를 '임시도덕론' 이라 하고
<데카르트의 임시도덕론>
1.지방의 관습과 법률을 준수하고
2.가장 좋은 증거에 따라 결정을 내린 다음 마치 확신이 있는 것처럼
확고하게 고수하고
3.세상보다는 욕망을 바꾸고 (ㄷㄷ;;)
4.항상 진리를 추구한다
라고 제시했고
이는 데카르트의 신중한 보수주의 , 결단력 , 금욕주의와 헌신을 보여주며
방법서설과 다른 다른 작품들은
데카르트의 지식개념이 나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상호 연결성이 더 낮거나 더 근본적인 지식에 의해
더 높은 형태의 지식에 제공되는 토대를 보여준다 하고
이로인해 데카르트에게
형이상학은 나무의 뿌리에 ,
물리학은 줄기에 ,
의학과 역학과 도덕은 가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철학 어려워 ㅠㅠ)
[나는 생각한다 , 고로 존재한다]
1641년 데카르트는
'제1 철학에 대한 명상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성찰)'
을 발표하며 신의 존재와 영홍불멸을 증명했는데
라틴어로 쓰여졌고 책에서는 여러 반론과 대답을 다루며
독단주의가 지배적이던 시기에
철학과 과학에서 협력적 토론의 이정표를 이루는 작품이었다 하고
명상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 즉 사람이 이제까지
속아왔거나 속일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믿음을 거짓으로 거부하는 체계적인 절차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의 주장은 그리스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서기 3세기) 의 회의론에서 비롯됬고
따라서 권위에 근거한 데카르트의 명백한 지식은
전문가들조차도 때때로 틀리기 때문에 제쳐놓고
감각적 경험에서 나온 신념은 신뢰할 수 없다고 선언되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경험이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며
예를 들면
사각형 탑이 멀리서 둥글게 보일 때나
존재하지 않는 물체에 대한 꿈을 꾸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 깨어있는지 확실히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바로 근처에 있는 물체에 대한 믿음도 잘못될 수 있고
마지막으로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명백한 지식
예를들면 2+3=5 라거나 정사각형에 네 변이 있다라는 지식도 또한 신뢰할 수 없는데 (ㅋㅋ;;)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때마다 그가 계산할때마다 잘못되는 방식으로 만드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며(ㅠㅠ;;)
데카르트는 자신이 빠진 보편적인 의심을 요약하는 방법으로서
<데카르트>최고의 힘과 교활함을 가진 악한 천재(악마) 가 나를 속이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사용한다
고 가정했고
쉽게 말해서 데카르트는
사고실험을 통해 연역적으로 추론된 정리를 쌓아나가며
자신의 철학 전체를 떠받칠 수 있는 공리를 추론해내려하다가
환각 , 환상 , 꿈 , 오판까지 포함해서
어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악마가 자신에게 개입해
나의 모든 감각기관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고
이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인한 정보가 거짓이어도
그 사유하는 나 , 다시말해 악마에게 감각이 속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있을 수 밖에 없기에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다 하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진실이던 거짓이던 일단 사유하고 있고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며 심지어 자기가 속고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직관에서 확신을 발견했고
데카르트는 이러한 직관을
<데카르트>나는 생각한다 , 고로(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격언으로 표현했고
명확하고 뚜렷한 타고난 관념에 기초해서
데카르트는 각 정신이 정신적 실체이고
각 몸이 하나의 물질적 실체의 일부임을 확립했고
정신 또는 영혼은 불멸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확장되지 않고 부분으로 쪼개질 수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또한 데카르트는 신에 존재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는데
<데카르트>성서에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하시는데
그분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완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이라며
데카르트는 다른 곳에서 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을 속이지 않으며
따라서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신이 없다면 신은 사기꾼이고
신이 있기에 신은 사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에 의해 보장된다 이런 의미인듯 ;;)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는 자신의 정신 , 신 , 물질세계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기초를 확립한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존재론적 논증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의 핵심이고
감각적 경험의 도움 없이 타고난 관념의 추론에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에 대한 특정 지식을 확립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데카르트는 참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는데
오늘날에도 철학자로 도덕교과서에 나오면서도
xy 좌표계 등으로 수학교과서 담당일진으로 나오시는 분이라
투잡을 어디하나 버릴 것 없이 문이과에서 탑드시며 투잡을 근본있게 뛰신 분이고
이로인해 수학과 철학이 둘다 논리싸움 , 논리적 토대주의를 기반으로 쌓여지는 지식들이라
한 학문이라 이야기되고도 있고
철학자 출신 수학자 , 수학자 출신 철학자가 많은 이유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데카르트도 다 맞지는 않다규 !]
여튼 데카르트의 일반적 목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도록 돕는 것이었고
여러 형이상학적 뿌리를 확립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데카르트는 기계 , 의학 , 도덕의 분야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는데
역학에서 데카르트는 인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적 신체는
기계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 믿었고
<데카르트>동물은 기계다
생리학 연구에서 그는 동물의 몸을 해부해서
각 부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했고
데카르트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
데카르트는 혈액의 순환도 설명했는데
심장의 열이 혈액을 팽창시켜 혈액을 정맥으로 배출시킨다는
잘못된 결론도 이르기도 했습니다 (역시 본업이 아니라 ;;)
[여왕의 스승]
1644년 데카르트는 그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모은 책인
'철학의 원리' 를 출판했고
이 작품을 보헤미아에서 네덜란드로 망명한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헌정했고
데카르트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스승이 되어
그녀에게 수학 , 철학 , 과학을 지도했고
그녀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도덕 철학을 발전시켰고
그는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데카르트>인생은 코미디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라고 말했고
나쁜 생각은 나쁜 꿈과 신체장애를 일으키며
인생에서는 항상 악보다 선이 더 많기 때문에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항상 만족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지저분한 궁정과 가정사의 문제로 위로를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여튼 엘리자베스는 명철한 공주였다 하고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다정한 관계로 발전했을때
데카르트는 엘리자베스 공주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데카르트>내 경험 상 형이상학의 논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수학의 논법을 모르고 ,
대수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대개 형이상학을 모릅니다.
두 학문을 하나같이 이해하는 사람은 공주 전하밖에 없었습니다
둘은 떨어져 있을때도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우의를 다졌고
데카르트가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가정교사로 가게 되자
질투어린 편지도 있었고 연인 사이처럼 가까웠는데
사생활을 밝히기 극도로 꺼려했던 데카르트의 성격때문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합니다
데카르트는 말년에는
생명을 한 세기 , 혹은 그 이상으로 연장하는 법을 배우기 희망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했고
(ㅋㅋ;;)
본인 스스로도 장수는 커녕 열병을 예방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기에
현실적 불가능을 느끼며 다시 논리적 생각을 통해 데카르트는 (ㅋㅋ;;)
<데카르트>장수에 대한 희망을 계속 품는 것이 아니라
더 쉬운 방법 , 즉 생명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
고 말하며
<데카르트>진정한 철학자가 조용히 죽는 것은 쉽다
고 말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16년을 보낸후 프랑스로 돌아왔고
1648년 데카르트가 마지막으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 귀족들은 프롱드의 난로 알려진 전쟁을 통해 왕실에 반란을 일으켰고
데카르트는 다시 파리를 떴는데 후원이 필요해진 데카르트는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철학교사가 되기위해
1649년 스톡홀름으로 이사했는데
데카르트는 습관적으로 아침을 침대에서 보내며
꿈꾸고 공상하는 삶을 계속해왔고
의식적인 명상을 통해 여러 철학적 업적을 남겼는데
새벽 5시 수업을 고집한 여왕의 고집이어서
몸이 약한 데카르트는 하는 수없이 새벽기상을 하다
폐렴으로 이어져 53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
좀 어이없는 죽음인데
사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에 푹 빠져서
데카르트와 정해진 수업시간 외에도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했고
업무시간 사이사이에도 데카르트에 책을 읽고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갈때도 데카르트 책을 손에 놓지 않았고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철학 외에도 문학 , 종교 , 정치 질문을 했고
데카르트는 여왕의 가장 총애하는 고문이 됬는데
기존 스웨덴 신하들은 여왕이 데카르트로 인해
프랑스와 가톨릭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데카르트를 몰아내려했고
데카르트는 사람들의 적대감을 느꼈고
스웨덴 행을 후회 + 과로 + 스웨덴 겨울날씨와 폐렴이 겹쳐서
1650년 2월 11일 새벽 4시 데카르트는 폐렴으로 숨을 거둡니다
얼탱이가 없는 죽음인데
당시에도 인류에서 가장 똑똑한 양반 이미지는 있었는지
일단 1666년 유해가 프랑스 본국으로 운구됬는데 이후 유해를 다시 안치하는 도중
두개골이 없음을 알게 됬고
두개골은 이후 스웨덴의 경매장에 있음이 밝혀졌고
한때는 그의 두개골은 10만년 전 유골인 크로마뇽인(인류 조상) 과 함께
인류 대표로 전시됬다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유해는 1819년 이후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에 안치되었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묘비>
데카르트 , 유럽 르네상스 이후 인류를 위해 처음으로
이성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한 사람이다
여튼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수학과 논리학을 철학과 결합하는 데카르트의 접근방식은
신학의 질문에 직면할때는 형이상학적으로 변했고
그것은 그를 존재의 본질과 심신의 이중성에 대한 숙고로 이끌었고
여러 아이디어를 정의하도록 이끌었으며
데카르트는 이런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통해
'데카르트적 의심'을 창안하며 세상 사람 모두를 '철학자' 로 만들게 됩니다
<데카르트>
아주 느리게 걷더라도 늘 곧은 길을 따라간다면 ,
뛰어가면서 곧은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봉봉>지금이야 종교의 자유도 있고
자기의 생각 , 철학을 자유롭게 말하는 시대가 왔지만
불과 몇백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랑 말이 다르면
곧바로 화형당하던 시대였고
동양도 마찬가지라 성리학과 말이 다르면
곧바로 효수당하던 시대여서
근대까지만해도 동서양이 종교가 지배하던 시기였는데
한국 사상가들이 퇴계이황 , 율곡이이 , 송시열 등
사상학문 그 자체로만 파고 있을때
서양은 고대 그리스때부터 좋은 전통의 명맥이 유지되서
사상가들이 수학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운명이 갈렸고
물론 정약용처럼 유학+실학자도 존재했지만
서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림자도 컸지만
예수님 제외하고 서양인들이 가장 사랑한 서양 사상가가
생물과 물리 등 과학에 진심이었던 인물이라
이후 서양 사상가 , 철학자들은 수학과학에도 적극적으로 빠지는 풍토가 되었고
서양역시 마녀사냥 , 종교재판 등 여러 모순이 존재함에도
과학이 계속 발전하며 합리적 시대 , 이성의 시대를 연 셈이고
오늘날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당시엔 당연한게 아니고
굉장히 용기를 내야하고 혁명적인 생각이었다는 점이고
데카르트 역시 과학혁명 , 종교개혁시기라는 광풍적 시기속에서 성장해
인류를 이성의 시대로 이끈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이며
또한 수학과학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한 수학자인데
참 쇼펜하우어나 칸트처럼 사상 한 개만 했어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한곡갑으로도 대단하다 여겨질 인물인데
여기에 xy좌표계라는 혁명적인 업적까지 더해서
그냥 인류의 삶을 통째로 바꾼 인물이라 거의 공자 + 피타고라스가 합쳐진 문이과 하이브리드 끝판왕 사기캐이고
성능(?)이 굉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철학책 봐도 굉장히 중요하게 나오는데
수학사 읽어도 굉장히 중요하게 나오는 인물이고
제가 그래서 워낙 업적이 씹사기라
옛날에 수학사 읽을때 데카르트가 그 철학에 데카르트인건가 하며 읽었던거 같고
참 낭만 터지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20살때 데카르트의 악마 읽고 난 후
이때부터 모든것을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고
현재도 저의 직관이나 제가 생각하고 지각하는것이 다 맞지 않았음을 여러 번 느꼈기에
제가 이건 100프로 맞아라고 생각했던게 완전히 깨져버린게 여러번 있었기에
제 지각을 전부 신뢰하진 않는데
데카르트도 수백년 전에 벌써 앞서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이
참 대단하단 생각이 있고
이로인해 현재도 전 무언가에 대한 큰 확신으로 움직이진 않고
그저 적당히 맞다 생각하면 그것에 맞춰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고
안될 경우도 항상 생각하고 안되더라도 과정이 의미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단 생각도 있고 제가 예측한 결과가 안나오더라도
또 노력한만큼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보상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서
결론은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이 지각과 내 생각이 정확히 맞지 않고
악마의 장난마냥 틀린 경우가 있음을 항상 염두하고 살고 있다는 점이고
데카르트도 이런점을 간파하고 있었던듯 싶고
굉장히 똑똑하고 이성적이라 논리적 생각=데카르트의 생각이라 해도 될만큼
수백년 전에 깊이있는 생각을 했다는 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연역적으로 추론한 정리를 쌓아나가며 의심스럽게 여겨지는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는데(토대주의)
이는 굉장히 수학적인 철학접근방식이라
자연과 허허 하는 동양적 사상과 또다른 맛이 있는 법이고
제가 또 뒤늦게 나이먹고 수학영어에 푹 빠져서
시간날때마다 게임대신 하는 판국인데
수능에서도 다른과목은 뭐 책만 읽어도 중고등 1~2년정도 빵꾸는 어느정도 막히고
점수가 점핑하는 경우가 있는데
수학은 일체 그런게 없고 초등100점-중등100점-수능100점 이런식으로 전단계에서
다 꽉꽉 채우고 토대를 쌓아나가야만 문제가 풀리는 판국이고
대부분 이공계생들도 과학사 , 수학사를 공부하지 않아
발전사는 또 모르고
그냥 그것만 파서 좋은점수 맞고 그런 경우가 많은거 같은데
수학과학사를 공부하고 배경을 알고 입시공부하면
재미가 배가 되는 법이라는 생각이고
수학사를 공부하면
중등수학이 딱 중세~근대수준인데 딱 다른과목과 달리
수학은 진짜 수학사 발전과정이랑 비슷하게
초중고과정이 나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진짜 점층적으로 단계 , 논리적으로 안쌓으면 다음과정을 풀 수 없는 구조로 설계되있어서
가끔 4점짜리 수준 문제에 말장난처럼 지저분하고 더럽게 나오는 소수의 경우 제외하고는
수학이 굉장히 정직해서 잘만 다져놓으면 100세인생동안 굉장히 평생 꿀빨게 해주는데도
너무 논리적이라 논리에 어긋나는 순간
곧바로 오징어게임 탈락마냥 굉장히 잔인(?) 한 학문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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