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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조선왕조 500년동안 상세하게 기록한 자료로

세계에서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을 남기고 그랬던 나라가 별로 없는거 같습니다

한국 고대사나 삼국시대 역사는 기록이 부족해서 아쉬운거 같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이 많지는 않은거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매우 많은거 같은데요 별 시시콜콜한??이야기 까지 기록되는거 같습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는 말도 있는거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우리 생활속에서도 아침에 커피를 마셨다거나??

이런거까지 기록되는 시대같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왕 말고도 영의정(국무총리),이조판서(인재채용) ,

사간원이라고 정책이 잘못된거나 그런거를 조언하거나 감시하는 기관??

오늘날에는 언론 기관이라 할까요

등이 있듯이 묘 지키는 묘지기직도 있었던거 같은데요,,

역사를 기록하는 기관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을

사관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있던 시대도 아니고

이런거를 기록할때는 대신들의 회의 옆에 앉아서 붓을 들고

기록하거나 왕을 따라다니면서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했던거 같습니다


조선 왕조를 시작한 왕 태조 이성계는

태조 2년에 조준은 고려왕조 사초(기록)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공양왕때 사관 이행이 (고려)우왕과 창왕을 죽인자는 바로 이성계라고

지목한 사초를 봤다는데요 이에 태조에게 말하자 태조도 그거를 봤는데요

우왕과 창왕은 이성계에 의해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한거 같습니다

이성계는 이에 나(태조)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백관과 백성들이 합심해서 목을 치라 청했기에,,대관들과

중서문하성에서도 죄주기를 청했기 때문에 하면서 변명하듯이 했던거 같습니다,,

이후에도 사초를 바치라고 하다가 신하들이 공정성에 어긋난다고??

간언 하는거 같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도 역사를 본적이 있지 않냐면서

당장 사고를 열어서 사초를 바쳐라 했다고합니다

연산군도 이렇게 사초를 보게 되는거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도 사초를 보기 그랬던거 같은데요

글쎄요 본다고해서 공정성이 나빠지지는 않을거 같습니다

오히려 가까웠던 선대왕들의 기록을 보고 배울게 있지 않았을까요

현대사도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중국 사기를 쓴 역사가 사마천은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성기를 잘리는 궁형을 당했는데요

그렇다고 현실에 너무 타협해??현재 권력을??무조건적으로

찬양할수도 없고 까다로운 그런거 같습니다,,

사람을 위한 역사를 써야되는거 같습니다


조선 태종때 이야기입니다

왕자의 난으로 태종은 왕이 되었는데요 세종대왕의 아버지입니다 유능했다라는 말도 있는거 같고

공포정치로도 유명한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태종도,,

계속 사관이 따라다니며 기록하자

사관에게서 도망다녔습니다 태종은 말에서 떨어진적이 있었는데 이일을 사관이 모르게해라

라는 말을 했다는데요

이 역시 사관에게 기록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관도 태종이 국왕이기에 태종과 친하거나 그런사람이었을거 같은데요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었나 봅니다,,

태종은 사관 민인생에게 붓을 곱게쓰라고 하자

민인생은 신(신하)이 곱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는 후대 사관들에게도 중요시 되는 말같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행사때의 요강개수나 걸레갯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있는거 같습니다,,


조선 세종대왕때 황희정승은

비리가 있는 공무원이었던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호문이라는 사관은 평소에

황희와 사이가 나빴는지??,, 황희를 황금 대사헌이라면서 (황금을 뇌물로 받는 대사헌)

악행을 부풀려서 기록하는거 같은데요

그런데 이역시 또 정인지와 사람들이 세종실록을 편찬할때

이호문 이사람 원래 이상한 사람이고 이거는 아닌거 같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게 기록된거 같습니다

즉 사관도 기록되는거 같습니다,,



대한민국,한국 역사에서 성군이라 불리는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은 정사를 논하는 윤대를 할때 사관을 참여시키자는 상소에

허락하지 않았다고합니다,,

세종 28년에는 사관이 듣지 못하게 하는것은 옳지 않다며 항의했으나,,

세종대왕은 피하는것이 마땅한 일이라면서 물리친거 같습니다,,

사실 세종대왕도 태조실록이나 태종실록을 보려다가 만류로 포기했던거 같은데요

이에 세종대왕의 복수였을까요,,??

보지 않을 이유도 없을거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들도 이렇게 기록을 보기가 그랬던거 같습니다,,



조선 성종때는 원래 사관들이 무릎꿇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서 기록했던거 같은데요

이에 사관이 성종에게 옛 사람들은 용모도 기록했다는데

우리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도 들지못하고 그런거를 기록할수 없다하자

신하들이 그러면 서서 기록하냐해서

이에 무릎을 꿇고,,앉아서 기록하는거로 타협을 본거 같습니다,,


조선 연산군때는 연산군때 기록은 임금이 두려워 하는것은 오직 역사뿐이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예 역사가 없는 편이 낫다라고도 말한거 같습니다,,

엽기적인 행각으로 유명한 왕같습니다,,

도중에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고 왕 시호를 못받아서 연산군 입니다,,

광해군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광해군이고요,,


조선왕조 실록은 화재나 파손을 대비해

복제를 해서,, 한곳만이 아니라 4곳에 분산보관을 했는데요

임진왜란때 전주지역을 제외한 모든 사고가 소실된거 같습니다,,

전라도지역은 그래도 이순신 장군과 해군들에 의해 지켜진거 같습니다,,

왜군들은 전주로도 공격을 하려하자 경기도 참봉 오희길은

선비 손홍록과 하인 30명과 같이 전주로가 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에 보관해서 지켜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일제에 멸망하자,,

마지막 왕이라 할수있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본의 감시에서 쓰여집니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조선왕조 실록 오대산 사고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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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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