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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차 세계대전 승전후 축제분위기에

서양에 전쟁물품들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고

내부적으로는 자유주의 , 민주주의 열풍이 나름 불고 있어

당시를 '다이쇼 데모크라시' 혹은 '다이쇼 로망' 이라 불릴 정도라 했지만

애초에 제국주의라는 뿌리 위에 피워진 허울뿐인 자유와 민주주의 열풍이었기에

근본부터 잘못된 시기여서

당시 일제 역시 '모래성위의 평화' 같은 불안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국에도 부드러운 통치를 하며 친일파들을 육성하는

'문화통치' , 혹은 '민족 분열통치' 를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한국내부에서도 일본에 회유책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다 일본에서는

1923년 도쿄를 포함하는 관동(간토) 지역에서

엄청나게 큰 지진이 있었는데

수많은 건물과 가옥들이 무너지고

1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일본 사회 내부에서는 불안한 민심에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았고

일제 정부(일본 내무성)는 그러한 민심의 동요를 막기위해

 

<일본 내무성>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라는 내용을 각 경찰서에 하달했고

이로 인해 조선인(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일본인들을 습격한다는 말도안되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 결과 관동대지진 당시 불안해진 일본민심은 폭발해

일본내 한국인들을 마구 학살하기 시작했는데

관동지역 일본 민간인들은 '자경단(민간인이 조직한 경찰격)' 을 조직해

몰려다니며 한국인들이 보이면 가차없이 살해했고

한국인 노동자를 바다에 던진다거나 한국인 임산부를 강간후 죽창으로 살해하는 등

말로 하기 어려운 만행을 저질렀고

오히려 일본 경찰들은 이런 사태를 막지 않고 묵인하거나 같이 가담 했는데 ,,

이는 당시 일본인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기에

분노의 화살을 일본 정부가아닌

만만한 한국인에게 돌리라는 이유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경(도쿄)부근의 집단 학살현장

 

당시 관동지방 한국인 대학살로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서울로 치면 한강 격) 에는

한국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사태가 끝나갈 무렵에야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하는 것들은

유언비어임을 발표하고 한국인 학살을 막았지만

이미 학살로

2500여명(일본인 주장) , 혹은 6000여명 (한국주장) , 혹은 200여명 (일본정부주장) 의

한국인들이 학살당했던 상황이고

일제의 관동 한국인대학살에는

아무런 책임을 진 이도 , 책임을 진 기관도 없었고

일본 내에서도 2등국민으로 취급받는

나라없는 식민지인의 비애였습니다

 

한국 내부에서는

1926년 4월 26일 조선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융희황제) 이 승하(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서울로 모여들었고

일제는 이전 광무황제(고종) 장례식에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난 것 같이

융희황제 장례식에도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일으킬까 두려워

감시를 강화했습니다

 

6.10 만세운동

 

이전에도 송학선 의사는

융희황제 장례식때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다

사이토 마코토를 닮은 다른 일본정치인을 죽여버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일제에 잡혀 순국하셨고

 

일제 법정 앞에서도 당당히 진술하는 송학선 의사

 

한국 사람들은

순종 장례식인 1926년 6월 10일에 발맞춰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고

1926년 6월 10일

5000명의 일본군이 삼엄하게 지키는 가운데

학생들은 용감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를 뿌리며 태극기를 휘날렸고

이미 광무황제 장례식때의  3.1운동의 충격이 컸던 일제는

융희황제 장례식때에는 철저히 감시해서

6.10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6.10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많은 단체들이 일어서게 됬다 합니다

 

또 6.10 만세운동 3년후인

1929년 11월 3일에는

6.10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은

전라도 광주에서 '광주학생 항일운동' 이 일어났는데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일본 남학생들은

한국인들이 다니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고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남동생인 광주고등보통학교 한국인 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는데

일본학생은 적반하장으로

 

<일본학생>뭐냐 조센징주제에

 

라 했고

이에 화가 치민 박준채는 일본학생에게 주먹을 날리며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들의 패싸움이 시작됬습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시작이 된 한국 학생들인 이광춘 , 박기옥 , 박준채

 

이에 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 순사는

양국 학생들의 싸움을 제지하면서도

일본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편들며

한국인 학생들의 따귀를 때리고 구타했고

 

이후 결국 광주고등보통학교 한국인 학생들은 분을 삼키며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11월 3일 일제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 학생들에게

일본 신사참배(일본식 사당 참배)를 강요했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일제 신사에 참배하는 한국학생들 , 광주 한국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광주신사에 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학생들과 광주고보 학생들의 패싸움이 또 벌어졌는데

일본 학생이 단도(짧은 칼) 로 광주고보 한국학생을 찔렀고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중학교로 몰려가

광주중학 학생들을 충장로에서 두둘겨 팼습니다

 

이 일들이 알려지자

점차 학생들의 다툼이 아닌

학교의 다툼으로 번졌고

광주중학교 학생 수백명은 학교 유도교사의 인솔아래

야구방망이 , 죽창등을 들고 광주역으로가 하교하는 한국학생들을 공격했고

광주고보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몽둥이들을 들고 몰려갔습니다

 

결국 교사들 , 경찰들까지 와서 싸움을 말렸지만

진정되지 않았고

일단 양쪽 학교 교사들의 인솔로 학생들은 돌아갔지만

분노한 광주고보 학생들은 일제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논의했고

결국 광주 시내 각 학교들도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에 참가하겠다 했고

이에 광주의 학생들은 모여서 괭이자루 , 장작개비 , 목검등으로 무장하고

행진가를 부르며 광주 시내로 진출했고

 

<광주 학생들> '조선독립만세' ,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

'일제 타도' 

 

등을 외치며

애국가를 부르며 일본인 학교 광주중학교로 향했습니다

 

1929년 광주시내에서 항일시위를 벌이는 광주학생들

 

그러나 일본 경찰들이 여러 인력을 동원해 길을 막자

학생들은 충장로로 방향을 돌렸고

이 과정에서 광주시민들까지 학생들의 독립운동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많은 광주의 한국학생들이 일제에 체포됬고

이후에도 광주 학생들은 거리에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전개했고

항일단체 '신간회' 의 도움으로 이운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전국 학생 항일운동으로 확대됬고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개교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의 참여해 

1462명이 퇴학 ,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됬습니다

 

한국인들은 3.1 운동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1920년대 대표적인 항일운동이

'6.10 만세운동' 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후 세계적 이야기를 하면

점점 일본 역시

일시적인 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는 끝나갔고

다시금 세계에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데

미국에서 경제대공황이 닥쳐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사람들이 직업을 잃자

이런 경제대공황은 세계로 퍼졌고

서구 열강 및 일본 등은 다시금 군비를 늘리고 재무장해

전쟁을 준비하게 됬고

일제 역시 조선에 대한 통치를

문화통치(민족분열통치)에서 다시 조선인들을 강하게 통제하고

착취하는 통치로 변화하게 됬습니다

 

<라봉봉>저야 어렸을때부터

일제에 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학교에서 알려주는 표면적 내용 이외에도

일제가 한국인들을 잔혹하게 학살 , 차별하는 등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책으로 공부해왔기에

여러 친일 선동들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사람들이 일제가 했던 행위를

잘 모르고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어

일제를 미화하거나 일제에 대한 '노예근성' 등을 보이고 있음을 많이 봐왔고

 

역사란 모두가 주체이자 주인이기 때문에

 

'지도자 , 정치인들이 잘못해서 전쟁이 일어났다'

 

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며

일본인들 역시 전쟁을 전범들이나 정치인들에게 돌리며

애써 회피하고있지만

그들을 선출하거나 지지한 자들 역시 평범한 일본인들이었고

오늘날 한국이나 일본에서 역사를 모르는다며 그냥 넘어가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이 사회의 책임에서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사를 모르는 것도 죄'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연예인의

기미가요 제창의 논란이 있었고

그 연예인도 몰랐고 죄책감이 컸다 인정했지만

욱일승천기 , 기미가요 등은 일제의 제국주의 망령으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광주 학생 선조들이 거부한 일제의 상징으로서

오늘날에도 한국인이라면 알고 경계해야 할 일들이라 할 수 있고

 

오늘날 일본과의 우호관계는 중요하지만

그 우호관계란 역사를 바로 알고 그 바탕위에서 서야하는 것이지

역사를 외면한 상태에서는 우호관계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모래로 쌓은 집' 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사회에서는 한국과 일본 관계나

일본에 대한 역사를 무시한 경솔한 언행들이 자주 보이는데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이 통탄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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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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