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할때
북방에서는 의병 출신으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간도 , 만주 , 연해주 등으로 북쪽으로 근거지를 옮긴 무장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군' 군대를 길러 일제에 대항하고 있었고
당시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대표적 독립군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등이 있습니다
일제는 1920년 당시 간도내의 독립군 토벌에 나섰고
홍범도는 독립군들을 봉오동에 매복시켜놓고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했고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로 가자
독립군들은 사격을 가했고
이 전투로 독립군들은 거의 피해가 없었던 반면
많은 일본군 사상자들이 발생했습니다 (봉오동 전투 1920)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군 사기 고취를 위해
봉오동 전투로 일본군 150여명이 전사했다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10여명 안팎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도 하고
단 봉오동 전투의 의의는
약세였던 독립군들의 중무장한 일제에 대한 교전에서의 의미있는 승리이자
대규모로 일본군과 벌어진 첫 독립군의 전투였고
특히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은 가장 용맹했다 이야기되
많은 한반도 안의 한국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많은 이들이 독립군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일제는 의병수준 전투력으로만 알고있던 한국의 독립군에 당하자
크게 경악했고
봉오동 전투로 인해 일제는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의 활동을 차단하려
만주에 살던 한국 민간인들을 마구 학살하며 독립군 토벌에 더욱 열을 올렸고
결국 독립군들은 일제의 공격을 피해 간도와 만주에서
일제의 힘이 뻗치지 않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결국 일제를 피해 이동한 홍범도군은
김좌진군과 합류해 청산리에서 일제에 대한 또다른 결전을 준비했는데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골짜기에서 물리쳤고
이 사건을 '청산리 대첩' 이라 부르는데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명을 내고
일본군은 적의 연대장을 포함해 1200여명을 살해한
한국 독립군사의 가장 큰 대첩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 1920)
일본군에게는 뼈아픈 패배라
일본은 청산리 대첩당시 일본군 사상자들을 축소하지만
은폐 의혹도 있다 하고
당시 전투들이 대체로 멀고 지리도 익숙치 않은 곳들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것이라
자세한 기록은 불분명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당시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일제에게는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 패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이 전투들의 충격이 너무도 커서
독립군 기반을 토벌하려
만주 ,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을 마구학살했고
결국 독립군들은 청산리 대첩 이후에 일제의 공격에 러시아로 이동했는데
러시아의 회유에 연해주 자유시로 이동해 러시아군(러시아 공산군)과 연합했지만
러시아군들은 독립군을 이용만 하고
이후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독립군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 사건을 '한국 독립운동사 최대의 비극' 이라고도 부르는
'자유시 참변 1921' 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공산당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을 느꼈고
당시에는 공산주의는 새로운 이론이고 냉전이 발생하기도 이전이었지만
러시아 공산당에 엄청난 피해를 본 한국의 독립군 및 독립운동가들은
처음엔 러시아가 일본군이랑 싸우기에 러시아가 같은편이라 생각했지만
러시아의 큰 배신에 대한 분노감때문에
이로 인해 '반공(반공산당) 주의' 로 전향하게 됬고
김구 , 김좌진 같은 유력 독립운동가들은 반공주의를 고수했고
또 러시아나 공산당에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도 나와
192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 , 독립군 내부에서도
반공 , 민족 , 자유주의 (민족 혹은 미국과 연관) vs
공산 ,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 혹은 러시아와 연관)
세력으로 파벌이 나뉘게 됬다고 할 수 있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폐해에 일어나 당대 크게 퍼진 공산주의 사상이었기에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 독립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이후 소련군에 편입됬다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해 '고려인' 으로 광복 2년전인 1943년 생을 마감하셨고
이외에도 공산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의열단으로 활동한 김원봉이나 북한을 수립하고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미지가 매우 나쁘지만
일제강점기시절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도 해
유격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의 일본 파출소를 습격한 (보천보 전투)
'김일성' 등이 있고 한국역사에서는 상당히 예민한 인물인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일단 그가 1950년 한국전쟁 이전 독립운동을 한 것은 인정하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민족사적 죄가 너무 큰 인물이기도 합니다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며 공산주의자와는 손을 잡지 않았는데
1930년 김좌진 장군에게 위협을 느낀 공산주의자에게 의해
김좌진 장군은 암살당하셨고
대신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은 한국지역(서울)에서 살아남았고
김두한은 평생 '장군의 아들' 이라는 자부심을 잊지 않았는데
힘이 강해 서울에서 깡패들을 때려눕히며
18세의 나이에 서울을 주먹으로 제패한 '건달' 이 됬는데
그는 단순한 한국건달두목이 아닌
일제에 맞서 한국인들을 보호한 '협객' 이었던 인물로서
그 역시 여러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많은 한국인들 역시 그를 단순한 건달이나 깡패두목으로 보지 않고
뛰어난 인물로 여기었고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한거를 알고 '극우 반공인사' 로도 활동했지만
그는 항상 정의심에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광복 이후에도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고 일본에서 사카린 밀수를 했던 삼성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을 해 분노감에 국회에 똥물을 투척하기도 했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인물로 '한국의 위인' 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으며
김좌진-김두한 부자는 일제강점기와 독재 등으로 어두웠던 시기
한국의 '호랑이 아버지에 호랑이 아들(호부호자)'
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이외에도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무장 독립전쟁운동은 계속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한국 보수인사 '김구' 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했고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는 일본 왕에게 폭탄을 투척했지만
불발되 일제에 잡혀 순국하셨고
윤봉길 의사는 일본왕 생일기념식에서 일본군 고위급 장성 및 대장들에게 폭탄을 투척해
일본 주요 군부인사들을 살상후 일제에 잡혀 순국하셨습니다
일제는 단순한 전투행위가 아닌
그들이 신처럼 존경하며 상징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던
'일본왕' 이 한인 애국단의 표적이 되자 크나큰 충격과 공포에 떨게 됬고
일제의 핍박받던 많은 한국인 , 중국인들이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응원했습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한민족의 지도자였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군대 '한국 광복군' 을 조직해
일제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려 했고
광복군은 소수의 군대였기에 일제에 전면적으로 맞서지는 못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일원으로 지원활동해
일제 , 일본인의 정서와 심리상태의 밝은 한국인 , 광복군들은
첩보 , 통신 , 회유활동등을 펼쳐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에 많은 정보들을 제공해주었고
서울에 진공작전을 계획했지만 미군의 원자폭탄을 맞은 일제가 항복하자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비록 큰 활약은 없다 하더라도
한국인들에게 '광복군' 은 독립운동의 상징적 자부심이자
빛나는 명예의 상징이었다 할 수 있고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
대한민국 국군은 한국 광복군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자유 , 민족주의 세력 (우파)도 ,
사회 , 공산주의 세력 (좌파) 도 아닌 세력들도 나타났는데
1920년대부터 '무정부주의' 를 일컷는 '아나키즘' 이 등장했고
무정부주의자를 '아나키스트' 라고 했는데
어두웠던 시기 한국 역사를 연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던
당시 한국 지식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 이 대표적인 한국의 아나키스트였다 할 수 있으며
이전부터 '정부' , '국가' , '애국심' 등에 대한 서구지식인들의 의문은 꾸준히 있어왔고
저 역시 인간이 만들어냈다 할 수 있는 '국가' 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함 , 민주주의 등을 제한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가 ? 에 대한 의문이 많았고 현재에도 많기에
아나키즘은 상당히 중요한 사상 중 하나라 보고있고
종교로 치면 유교도 , 불교도 아닌 무위자연에 가까운 '도교' 와 비슷한 사상이
아나키즘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는 신채호 선생님이나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 등이 있는데
저는 신채호 선생님 역사자료도 중요히 봤고
조지오웰 소설 동물농장과 1984 도 감명깊게 읽어본 사람으로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지만
읽으면서 소름이 돋고
오늘날도 이러한 억압과 통제현상이 반복되는 느낌도 있음)
저는 국가의 통제 , 개인의 자유가 통제 , 억압된 사회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해서
상당히 많이 공감하고 의의있는 인물들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국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특히 한국 아나키즘을 대표했던 신채호선생님은
역사연구를 통해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시려 노력하셨고
신채호선생님은 한국 역사학에서
기존 중국에서 왔다는 한국의 역사사관(기자조선)을 부수고
'단군조선 - 부여 - 고구려'
를 정통으로 세우신 공을 남기셨는데
저 역시 신채호 선생님의 사상이 옳다 생각하며
한국은 단군조선과 부여 · 고구려의 후예라 생각하며 (실제 자료적으로도 일치)
한국 중심 역사관으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며
특히 역사를 연구하는 저로서
개인적으로도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특히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하여튼 어려운 시기에서도 일제에 손실될뻔한 한국사 자료들을 모으신 인물로
일제에 대항한 뛰어난 독립운동가였고
비록 안타깝게도 한국독립운동사는 1920년대부터는
공산주의 사상들의 등장 및 여러 시대적 변화등으로
여러 세력으로 나뉘고 반목하고 화해하기도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 대항한다는 신념 앞에서는
좌도 , 우도 , 아나키즘도 가리지 않으셨고
모두가 일제를 미워하며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 , 세계의 평화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으셨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초기 안중근 의사나 여러 의병들로부터 시작된 무장독립운동은
경술국치 이후부터는 '독립군' 으로 변화하며
'독립전쟁' 화 되었다 할 수 있고
일제는 점차 광기에 사로잡히며
중국을 침공하고 나아가 아시아와 서구열강들까지 공격하게 되었고
한국 내부적으로는 식민지배기관도 길어지며
한국의 일제강점기 출생자들도 점차 성장해갔고
잔혹해지는 일제의 통제 앞에
일제에 타협하거나 친일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한국 독립운동가 , 독립군들은
자유시참변으로 인한 독립군 궤멸 , 열악한 상황 , 사상분열 등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꿋꿋히 독립을 향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가 학교다닐때
한국 학교에서는 이 시기를 따로 '한국 근현대사' 로 해서
무슨무슨 전투 , 독립군의 분파 , 좌성향인가 우성향인가 , 년도 등을 외워야 했지만
역사는 머리로 외우는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고
독립군들은 분파는 달랐을지언정 청산리대첩당시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연합과 같이
서로 연합하고 도왔으며
핍박받는 현실앞에서
진정 독립운동가들의 의지는 좌도 우도 이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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