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평화 , 비폭력 한민족 독립시위인 3.1운동이 벌어졌을때
일제는 총과 칼로 잔인하게 진압했고
이에 3.1운동 역시 평화시위에서 무력을 사용한 시위로 변화하기도 했고
식민지인 한국인들의 3.1운동으로 인해 일제와 세계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고
일제는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옥에 가두었습니다
한편
약산 김원봉이라는 인물은
목숨을 걸고 3.1운동을 한 한민족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제에 대항해 무장 독립투쟁을 해 조국독립에 기여해야겠다고 결심했고
비밀 무장결사대 (사실상 자살공격)
'의열단' 을 조직해 동지들을 모아 일제에 맞섰습니다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같이 행동하고
매일같이 저격연습 및 운동을 통해 체력단련 및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 했고
독서와 오락도 하고 멋진 양복을 입고 머리도 잘 손질하고 잘 차려입었는데
이는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기에
항상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김원봉의 부탁을 받은 한국사연구 역사학자 및 독립운동가 및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 신채호 선생님은
의열단원들에게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 을 지어주었고
엄청나게 긴 글인데
주요 내용으로는 신채호 선생님은
독립운동에서 평화적 · 외교적 방법을 배척하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혁명 , 투쟁적 방법을 주장했기에
(평화가 답이지만 당시 일제가
한국인들의 평화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하고
평화적 요구로는 꿈쩍도 안했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한명이 일본인 한명씩 죽이다보면 언젠간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다'
며
'내가 일본인 열명을 죽이면
조선인 아홉명을 살리는 길이다'
라는 취지의 글을 쓰셨습니다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의열단 선언) 마지막 구절>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 (총사령부) 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 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원들은 일반적인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한 조잡한 포탄이 아닌
고성능 포탄을 제조했고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 및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려 했지만 비밀이 누설되 실패했고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는
부산경찰서 하시모토 서장의 취미가 고서적수집임을 알고
중국인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를 찾아가자
하시모토 서장은 면회를 승낙했고
박재혁 의사는 그 자리에서 폭탄을 던져
하시모토 서장을 사망시켰고
잡힌 박재혁 의사는 옥중에서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단식으로 순국하셨습니다
1920년 12월 27일에는 의열단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를 폭파시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했습니다
또
1921년 9월에는 의열단 김익상 의사는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해
2발의 수류탄을 지닌 채 조선 총독부로 잠입하셨고
일본군 헌병대는 김익상 의사를 전등 고치러 온 평범한
수리공으로 착각했고
김익상 의사는 총독집무실이라 생각한 곳에 폭탄을 던졌지만
그곳은 비서실에 폭탄도 불발탄이었고
이어 김익상 의사는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폭발했지만 당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놀란 일제 헌병들이 올라오자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했던 그는 태연히
<김익상>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
하고 유유히 조선 총독부를 빠져나와
중국으로 돌아갔고 이후에도 김익상의사는
상하이에서 일본군 육군대장을 암살하려 했는데
같이간 동지는 그곳에 온 일본군 육군대장에게 권총을 발사했지만
그의 근처에 있던 애먼 영국인 민간 여성에게 맞아버렸고
일본군 육군대장은 허둥대며 급히 차에 타려 했고
이때 두번째 저격을 맡은 김익상 역시 권총을 발사했지만
육군대장의 모자만 맞췄고
끝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익상 의사는 체포됬는데
영국 여성의 남편은 김익상 의사가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하다
실수로 자신의 아내를 죽었기에 관대히 처리해 달라는 진정서를 넣었고
일본 재판에서 징역 20년이 확정됬고
이후 김익상 의사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합니다
1923년 1월 12일 밤에는 의열단 김상옥 의사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도피하다 수백명의 왜경(일본경찰)과의 3시간 반의 총격전끝에
몸에 10발의 총알을 맞으면서도
권총 두자루로 왜경 16명을 사상시키고 탄환이 다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한발을 자신의 머리에 쏘는 것으로 자결해
순국하셨습니다
1923년 일본에 '관동대지진' 이라는 엄청나게 큰 지진으로
수많은 집들이 파괴되고 일본인들이 죽었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대지진으로 인한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한국인들이 일본내 혼란을 만든다고 꾸며
일본내에 있는 한국인들을 사냥하듯이 학살했고
(관동대학살)
이에 분노한 의열단원 김지섭의사는
일제에 대항해 목숨을 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고
의열단은 일본 수도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 의회' 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하고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 의사를 도쿄에 보냈는데
도쿄에 도착하고 제국의회가 무기한 휴회됬다는 것을 안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일본왕이 사는 궁성으로 바꿨고
1924년 1월 5일
일본왕 궁성 정문앞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탄이 2개나 나와 체포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28년 2월 22일 4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병사해
순국하셨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왕을 신성시했기에
일본왕이 공격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고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가 일본왕을 겨냥해 수류탄을 던졌지만 실패했고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일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1926년 의열단 나석주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지니고
식산은행으로 가서 은행원들 뒤에 폭탄을 투척했고
폭탄이 불발되자
(독립운동가들의 의거에는 불발탄이 되게 많았는데
일제 몰래 폭탄을 숨겨다니고 열악한 환경 등으로
폭탄들이 습기를 먹거나 고장되는 일들이 잦았다고 합니다)
나석주 의사는
<나석주>아 . 쓰미마셍 (미안)
하고는 은행 밖으로 나갔고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로 가서
권총으로 1층 수위실의 일본 기자들부터 사살을 시작했고
2층 사무실을 돌며 권총을 난사하며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사살하며 돌아다녔고
폭탄 하나를 던진 후
아래층 현관의 일본인 두명에게 권총을 쐈고
탈출할 때가 됬다 느낀 나석주 의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와 거리를 내달렸지만
왜경(일본경찰)들과 마주쳤고
나석주는 왜경 한명을 사살하고
왜경과 총격전을 벌이며 도주했고
체력이 다했다 느꼈는 지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지만
왜경들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됬고
이후 나석주 의사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순국하셨습니다
(어렸을때 본 드라마 '야인시대' 의 '나석주 편' 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이후 김원봉 및 의열단원들은
소수 요인들에 의한 소규모 투쟁행위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단하고
군대를 길러 일제에 대항할 것을 결심해 중국으로 건너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고
이후에도 김원봉과 의열단 요인들은 여러 활동을 하고
김원봉은 이후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군대를 조직했고 여러 활동을 했는데
약산 김원봉은 당시 일제의 현상금 랭킹 1위로
당시돈 100만원 , 오늘날돈 320억원 정도의 현상금이 걸렸고
일제가 엄청나게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무장투쟁에만 집중하느라
무장투쟁을 제외한 외교나 실력양성 등의 독립운동 형태를 크게 비판했고
공산주의 , 사회주의 노선들을 타기도 해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전
자유시 참변 등으로 독립군이 러시아 공산당에 궤멸 된 이후
배신감 등에 반공주의로 전향하게 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중국 국민당정부 장제스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병력을 광복군 산하로 합류해 통합하라 요구했고
임시정부와 한번 갈등이 있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 합류를 원치 않았지만
버티다가 결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이후 어쩔 수 없이 광복군에 합류한 김원봉은 명목상 부사령관이지만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이끄는 광복군 작전에 자신의 병력을 참여시키지 않는 등
이곳에서 다시
임시정부 요인들과 광복군 주도권싸움 등 갈등을 이어갑니다
<임시정부 요인 민필호>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
그래도 김원봉은 광복때까지 임시정부에 남아있었고
1945년 광복을 맞고 이후 한국은 38선을 기준으로
북은 공산주의 및 소련세력이 , 남은 자유주의 및 미국세력이 들어오게 됬고
나라가 분열하자 이전부터 갈등을 겪어온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북한 , 좌익인사로 활동했고
극심한 좌우대립속에 암살위협이 심해지자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북한 인사가 되었고 이후 김일성이 남침하려 하자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다지만
결국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남침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인사로서 전쟁에 협력하다 한국전쟁 휴전 후
북한에서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
이라는 이유로 숙청됬습니다
그는 대한민국(남한) 에서는 '빨갱이 두목' 으로 몰렸고
북한에서는 의열단이 지주와 자산계급의 리익(이익) 을 옹호하는 군대였다며
결국 숙청됬지만
나름 임시정부 요인으로서도 갈등이 있었지만 활동했고
일제강점기 여러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로서
성향은 중도 진보정도 혹은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 였다 생각되는데
이러한 성향때문에
당시 좌우 대립이 극으로 치달은
남북한 내에서도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됬으며
일제가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여러 복잡한 삶속에서의 죽음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 , 한국전쟁 이력때문에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고 있음)
<라봉봉>암살 , 폭탄 투척등의 의열투쟁은
오늘날로 치면 '테러행위' 라고도 비하할 수 있겠지만
당시 한국 및 세계인들은 테러행위가 아닌 일제와의 맞선
'독립 전쟁' 으로 인식했고
의열투쟁을 전개한 의열단은
한국 무장독립사에서 가장 정예화된 비밀 특파부대격 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워낙 처절한 이야기들이 많아 일제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고
그 중심에 '약산 김원봉' 이 있었다 할 수 있고
저는 폭력으로 인한 독립은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당시에는 '폭력을 옳다 여겼던' 공산주의 사상이
크게 유행했기에 일부 세력에서는 대의를 위해 옳게 여겨지기도 했고
공산 ,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약산 김원봉 역시
일제에 대항해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했던 인물이나
그의 독특한 성격 및 무정부주의 , 공산주의 , 중도주의 성향때문에
어느쪽에서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논란이 있는 인물이나
다만 1945년 광복 이전 그의 행적은 한국인들에게 존경받고
일제가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고
남북한 모두에서 존경받는 안중근 , 안창호와 달리
(안창호는 나름 광복 근처까지 생존했음)
약산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잊혀진 독립운동가'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책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및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한국 독립사의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약산 김원봉 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사실상 버리셨던
의열단원 및 독립운동가들로 인해
일제는 한국 및 아시아 지배에 대한 큰 제동이 걸리게 되었고
세계는 일제의 만행을 점차 알아가기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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