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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의 문화·예술>

[할리우드]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무하마드 알리]

[아타리 쇼크]

[PC게임과 e스포츠]

[아이폰과 앱스토어]

<라봉봉>

 

[할리우드]

미국 문화산업 , 영화산업 중심은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입니다

 

할리우드

 

로스앤젤레스는 눈덮인 산 , 호수 , 사막 , 바다 등 여러 자연이 공존하는 지역이라

지역 전체가 천연 세트장이었고

로스앤젤레스는 1년 중 300일 이상이 일조 시간이 보장되는 지역이어서

영화촬영하기 참 좋은 환경이었기에

20세기 초부터 영화 스튜디오들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영화 TV 촬영 스튜디오이자 테마파크인 '유니버셜 스튜디오 할리우드'

 

유대인들 역시 무형자산인 영화산업 투자를 시작하며

유대 자본이 들어오며 할리우드는 크게 커졌고

유성영화(화면과 소리가 나오는 영화)가 탄생한 후

1930~40년대 할리우드는 황금기라 불리며 영화산업이 절정에 달합니다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가 개봉했는데

초대박친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절정에 달한 할리우드 기술이 총동원된 미국 영화사의 불멸의 걸작이었고

3시간 50분짜리 영화가 풀컬러로 제작되어 제작비는 당시로서 말도 안되는 거액인

600만달러가 들어갔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영화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고

첫 개봉때 1억 9000만 달러를 벌며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이 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명대사>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할리우드는 의외로 스타 감독이 아니고서야

영화 감독 권한이 거의 없다 하고

철저한 분업화된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하고

이런 시스템은 효율성이 높아지고

스태프들의 혹사와 착취를 막아준다는 장점이 있으나

감독들의 주관적 생각 , 예술성과 창조성을 마음껏 표현하기 어렵고

이러한 할리우드 시스템은 천재와 거장의 탄생을 막는다 합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죠스와 쥬라기 공원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소수 능력자는 이런 시스템에서도 예외로 천재성을 발휘하긴 하는데

근데 의외로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영화계는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느낌이고

할리우드 계열 영화인 다수는 정치적으로 친민주당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하여튼 수많은 제작자 , 배우들이 열정과 스타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할리우드로 몰려들었고 할리우드는 수많은 감독 , 스타들을 배출했으며

할리우드는 미국뿐만 아닌 세계 영화의 메카가 됩니다

 

1950년대 말기부터는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영화산업이 침체됬는데

이에 할리우드는

명예의 거리를 만들었고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할리우드는 미국 영화 , 문화계의 자존심이자

상징적인 지역으로 유명합니다

 

명예의 거리의 마이클잭슨 이름이 새겨진 별 , 죽은지 오래됬어도 사람들이 장미꽃을 올려두었습니다

 

한국영화시장은 작은 영토 , 인구에 비해 엄청나게 규모가 큰 편이라

영화의 객관적 평가 , 흥행여부를 관측할 수 있는 나라이기에

의외로 할리우드는 한국에도 많은 관심을 주고 있어

한국을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실험장으로 쓴다 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할리우드 자본 , 감독들이 한국시장에서 실험을 하고 있다 합니다

 

(ㄹㅇ 문화계는 한국이 세계적인 테스트 서버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실험용 쥐냐 빼액' 이렇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그만큼 한국이 트랜드에 빠르고 선진적인 모습이 있다고 달리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할리우드로 유명한 로스앤젤레스 , LA는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것처럼

사업 , 무역 , 엔터테인먼트 , 과학 , 패션 , 스포츠 등

다방면에서 미국 사회를 주도하고 있고

참 기후도 좋아 노인네들 살기 제일 좋은 도시라는 말도 있고

아무리봐도 참 축복받은 닉값하는 지역입니다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사실 대중문화라는 말이나 연예인 이런 말들은

전문성이 드러나지 않고 너무 범위가 포괄적인 용어기 때문에

저도 안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연예인을 대표하는 연예인으로는

바로 '마릴린 먼로' 가 있습니다

그녀는 일반적인 연예인이라기보다 '위대한 연예인' 으로 이름이 있는 인물인데

20세기 가장 위대한 연예인 중 한명이자

섹스 심벌 Sex Symbol 로 유명합니다

 

마릴린 먼로를 대표하는 모습 ,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잡고있는 먼로

 

섹스심벌은 원래는 가정을 꾸리고 싶은 책임감있는 매력적 여성을 뜻하는데

점차 가십적이고 성적 매력이 있는 연예인 , 배우 , 스포츠 스타등을 의미하게 됬고

음 좀 순화한 표현으로 그 시대의 미인 , 아이콘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2000년대 김태희 , 송혜교 , 전지현 , 이효리 같은거로

이 누나들도 리즈시절에 이름 자체가 그냥 미인 대명사로 쓰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여튼 마릴린 먼로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다 힘든 환경에서 피하려

16세때 같은학교 연극반 학생과 도피성 결혼을 하다

4년만에 헤어졌고

 

(ㄷㄷ;; 근데 미국인들은 한국과 달리 독립정신이 강해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성년기나 딱 20살되면 집에서 부모와 떠나 독립하는게 일반적 현상이어서

그시대 사람들은 나름 그리 특별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쨋든 이후 2차세계대전이 한창일때

1944년 방위산업체 , 군 공장에서 페인트 분무기 뿌리는 일을 하던 먼로는

부대 사진 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되어 누드모델이 되었고

1947년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스크린에 데뷔한 뒤

단역을 전전하다가 점차 배우로서 자질을 인정받았습니다

 

마릴린 먼로의 군수공장여공시절 전설적 사진 , 그녀는 기구한 현실판 신데렐라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1950년대 주연을 맡으며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됬고

영상매체는 그녀가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먼로 워크를 중심으로 화려한 선전을 했고

이에 그녀는 세계적인 섹스심벌이 됩니다

 

먼로가 입어 유명해진 여성 최초의 청바지 '리바이스 701' , 상의를 입지않고 일부로 성적 모습으로 찍었습니다 (오늘날 그나마 선비화됬다 표현하기도 하지만 옛날 연예계가 오늘날보다 더 노골적이었던게 있습니다)

 

금발미녀에 백치미(바보같은 귀여움) 컨셉 ,

입가에 있는 애교점 (먼로점이라 불림) ,

불우한 어린시절을 숨기는 듯한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 속

긍정적 성격의의 매력녀였던 먼로는 그런 모습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인종차별하지 않는 모습 ,

바르고 순수하고 착한 모습들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습니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그러나 점차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금발의 백치미 이미지 , 몸매에만 집중하는 것에서 나오고 싶어했고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아주 친절했다 합니다

 

<마릴린 먼로 명언>할리우드는 키스를 위해 천 달러를 ,

영혼을 위해 50센트를 지급하는 곳이다

 

항상 밝은 모습의 그녀는 내면으로는 그런 컴플렉스와

불우한 어린시절속 애정결핍이 강했었고

유명해진 뒤 여러 유명인들과 결혼과 이혼 , 만남을 반복하나

항상 실패한 가정생활을 합니다

 

그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때

한국 위문공연으로 한국에 방문하기도 한 것으로 유명하고

 

한국전쟁때 한국에 방문해 위문공연한 마릴린 먼로

 

여러 유명인사들과 만난 미국 연예인의 , 미녀의 아이콘이었지만

정작 애정결핍 내면은 항상 불안정해서

각성제 및 음주로 정신이 망가집니다

 

그녀는 잘때 항상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나체로 잤다는 것으로 유명하고

잘때 무엇을 입고자냐는 질문에

 

'샤넬 No.5 (코코샤넬이 만든 향수)'

 

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최초의 인공향 향수로 유명한 샤넬 No.5

 

그녀는 1962년 8월 5일 가정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의해

나체로 죽은채 발견됬고

고작 36세의 나이에 사망한 것이었고

수면제 과다복용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시대를 대표하던 미인의 대명사였던 그녀였지만

정작 진심으로 그녀의 내면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고

3번의 결혼을 했음에도 모두 실패 , 화려한 물질적 성공을 한 인물임에도

정작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세계인들의 공감과 연민을 받고 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

미국인들은 당연 스포츠도 엄청 사랑하는데

일단 미식축구를 엄청 사랑하는 미국인이지만

미식축구는 미국이외에 하는 나라가 잘 없고

또 미국 남자들은 세계적 인기종목 축구의 경우는 남자답지 못하다며

잘안하고 미식축구를 하고 있고

대신 미국 여자들이 여성 축구에서 강합니다

 

일단 미국 스포츠계에는

각분야에 여러 슈퍼스타들이 있고

야구는 베이브 루스 , 농구는 마이클 조던 , 골프는 타이거 우즈 등

여러 왕 , 황제로 불린 인물들이 있는데 (다들 미국 최고 인기스포츠)

일단 다쓰면 너무 길어져서 ㅠㅠ ,,

20세기 미국 스포츠계 뿐만 아닌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복싱선수 무하마드 알리 이야기만 쓰겠습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 역사상 ,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인물로서

스포츠 뿐만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흑인 민권운동 , 베트남 전쟁 징집 거부등으로 유명한

반항아이자 파이터였습니다

 

무하마드 알리

 

그는 12세부터 아마추어 복서생활을 시작해

1960년 로마 올림픽 에서 금메달을 땄고 (참 쉽죠 ?)

1960년 프로데뷔를 시작하여 1981년 은퇴할때까지

21년동안 엄청난 기록을 쓰며 60~70년대 미국 복싱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1965년 KO승을 거두고 포효하는 알리

 

이전세대 복서들은 자신만의 장기를 키우며 난타전에서 우위를 전하는 전략을 주로 했지만

알리는 헤비급에서도 경량급 선수같은 현란한 풋워크 ,

좌우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펀치 구사 ,

상대를 교묘하게 비웃는 화려한 언변의 도발실력 (트래시 토크 , 운동선수들이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 일부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등으로

여러 이야기를 남기며 스타성이 엄청났던 인물이었고

 

또 알리는 권투실력뿐만 아닌

'시대정신' 을 갖춘 완전체에 가까운 위대한 복서였는데

평소 흑인인권 , 반전 운동 등

사회적 부조리에도 당당히 맞선 링밖에서의 파이터였기도 했기에

 

다른 선수들은 무하마드 알리와 대결할때

그저 복싱만 엄청 잘하는 상대가 아닌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사람' 과 맞서야 했고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위대한 사람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승부는 보나 마나였습니다

 

알리는 강경주의 흑인 인권운동가였는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인권침해가 극심했던 시기

복싱계의 흑인 슈퍼스타였기에

그는 자신의 강력한 주먹처럼 강력하게

백인들이 만들어낸 부조리에 피하지 않고 맞섰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한 알리는

미국 흑인들의 권익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징병거부를 하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한창 전성기 나이임에도 3년 5개월간 경기를 치르지 못합니다

 

<무하마드 알리>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조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라고요 ?

베트콩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릴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합니까 ?

 

1967년 알리는 미육군 입대를 거부한 후 WBA 헤비급 타이틀을 박탈당합니다

 

흑인들은 이전 세계대전대에도 흑인 인권을 위해 몸바쳐 전쟁터에 나섰지만

병역의 의무를 다했음에도 흑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고

인종차별은 계속될 뿐이었고

점차 권리와 의무라는 이름으로 흑인들을 선동하는 방식은

흑인들에게 먹혀들지 않게됩니다

 

<무하마드 알리>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들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베트남 전쟁 초기는 당연 미국이 이기겠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알리의 징병거부가 반국가적 행위로 백인 주류층의 거센 공격을 받았지만

점차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털리게 되자

반전여론 , 베트남 전쟁 반대여론이 급격히 일어났고

알리의 징병거부는 재평가됩니다

 

알리는 우여곡절끝에 무죄를 선고받기는 했지만

오랜 법정싸움으로 전성기 나이도 지나고 육체적으로 노쇠해져 갔고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알리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다시 쓰러트리며 일어납니다

 

그는 일반적인 운동만하는 스포츠인 ,  복싱선수가 아닌

평화주의자이자 인문주의자였기에 미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된 인물이었고

엄청나게 의미있는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어느 사람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역활이 무엇이냐'

 

라 묻자

알리는

 

'신의 발가락'

 

이라 대답했는데

알리는 신의 등을 업고 세계의 모든 어두운 곳을 뛰어야한다 했습니다

 

흑인들과 함께한 무하마드 알리

 

그는 엄청난 복싱 실력뿐만 아닌

흑인들을위한 인권운동 , 반전운동 , 양심적 거부자로서

반문화 세대의 상징이 됬고

후세인을 만나 억류된 인질을 석방하도록 설득하는 외교관도 됬고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녔고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기도 한

사회운동가였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의 복싱스타일은 거대한 체구에 비해 아주 빠른데

그는 자신의 복싱스타일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Float like a butterfly, and sting like a bee)'

 

[아타리 쇼크]

미국 게임사도 유명한데

미국 비디오 게임 산업계는

'아타리' 라는 게임회사가 지배하고 있었고

아타리는 스티브 잡스도 젊은 시절 일했던 회사일 정도로

미국 게임계를 대표하는 전통있는 회사였습니다

 

점차 폭발적으로 규모가 성장했음에도

아타리는 게임 개발자들에게 금전적 보상은 커녕

이름을 올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은 완전독점체제를 유지했고

아타리는 자신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게임기에 게임을 만들어 낼것이라

상상도 못했는데 그러던 시기

점차 비디오 게임계가 급격히 성장하는 붐이 일자

너도나도 게임사업에 뛰어들었고 저질게임 , 듣보 업체들이 시장에 쏟아지는

대혼란 시기가 펼쳐집니다

 

당시는 연령별 등급제한도 없었던 초기 게임시대라

저질게임 , 저질 포르노게임까지 등장해버리자

게임의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또 홈컴퓨터가 생겨나며

컴퓨터 게임이 나타나자 슬슬 아타리에게도 위기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합니다

 

내부적으로는 썩어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북미 게임계는 계속 성장하고 버블이 끼고 있었는데

결국 1982년부터 게임 버블이 붕괴됬고

가정용 비디오게임기는 여전히 잘팔렸지만

점차 포화가 된 시장에 뛰어든 얼치기들이 하나 둘 도산하며

게임팩들이 헐값에 덤핑으로 판매됬고

이에 낮아진 가격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제가격을 주고 게임을 사지 않게됬고

엄청나게 많은 게임이 팔렸음에도 수익이 오히려 감소하고

수익이 줄어든 개발사들은 줄도산합니다

 

결국 1983년부터 1985년까지 2년동안

결국 게임을 만들 사람도 , 팔아주는 사람도 , 사주는 사람도 모두

사라지게 됬고 북미 가정용 게임기 산업은 완전히 붕괴됬는데

북미 게임시장이 완전히 붕괴했고

최대 게임기 회사 아타리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경영난에 빠집니다

 

아타리 쇼크

 

이렇게 북미 게임계가 버블꿀 , 투기열풍에 빠져서 자멸해버리며

그로기 상태(권투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일)

에 빠져버리자

1985년 일본 게임회사 닌텐도가 슬금슬금

 

'아따 미국 형님들

우리나라에 슈퍼마리오라는 재밌는 게임이 만들어졌는데

어때 한번 해볼랑께 ?'

 

하며 유혹했고

 

세계 게임계를 강타한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1985)'

 

닌텐도의 슈퍼마리오는 엄청난 인기로 북미 , 미국을 강타했고

다시 북미 비디오 게임시장이 부활하는 계기가 됬긴 됬는데

게임기 , 게임팩까지 모두 일본 , 닌텐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가 나오기 전까지

미국 비디오게임시장은

닌텐도 , 세가 등 일본 게임회사에 완전히 잠식당합니다

 

[PC게임과 e스포츠]

미국인들에게 일본의 문화침탈은 제2의 진주만급이나 마찬가지였고

위기를 느낀 미국인들은 자체적인 자국 문화산업에 집중하는데

게임업계역시 마찬가지라

결국 당시 미국게임업계는 비디오 게임시장을 포기하고

한창 일어나고 있는 첨단산업이었던 컴퓨터 게임시장으로 옮겨갑니다

 

미국 게임제작사들은 한동안 게임기가 아닌 PC , 컴퓨터 게임 위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결과 2000년대 초중반까지 PC 게임을 기반으로 한 미국 게임산업의 긍정적인 성장이 있었고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킵니다

 

1991년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마이크 모하임이라는 인물은

게임회사를 차렸고

처음엔 소규모 회사로 시작해 자금난에 시달렸지만

여러 방황끝에 이후 회사명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 바꾸는데

오늘날 미국 대표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시작입니다

 

블리자드와 스타크래프트 만든 아조시 '마이크 모하임'

 

미국 대표 게임회사 '블리자드'

 

블리자드는 여러 게임을 내놓으며 인지도를 쌓다가

워크래프트를 내놓으며 RTS , 실시간 전략 게임의 다크호스가 됬고

이후 RPG 게임의 대부인 디아블로를 발매하는데

디아블로는 배틀넷이라는 인터넷 연결 플레이 방식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됩니다

 

그러다 블리자드는

1998년 RTS 게임인 '스타크래프트' 를 발매하는데

스타크래프트는 디아블로를 뛰어넘는 흥행을 보여줬고

 

스타크래프트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시장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한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로 선수들이 대전을 벌이는

'e 스포츠' 가 시작되게 됬고

스타크래프트의 성공 이후

수많은 PC 게임의 전성기가 시작되고

블리자드는 한국에서의 대성공을 계기로

e 스포츠의 토대를 닦은 세계적인 게임회사가 되었습니다

 

세계규모의 e스포츠 대회

 

[아이폰과 앱스토어]

미국 굴지의 IT 회사 애플을 이끌던 스티브잡스는

컴퓨터 기능을 조그만한 핸드폰으로 옮기는 혁신적인 시도를 해서

2007년 스마트폰인 '아이폰' 을 발표하는데

아이폰은 iPod(mp3) , 전화기 , 인터넷 , 컴퓨터 기능을 하나로 합친 것으로서

 

'이게 바로 아이폰입니다' , 2007년 아이폰을 처음 발표하는 스티브잡스

 

이전에도 스마트폰 개념은 있었지만

애플은 수년간의 연구와 개발을 통해 완성한 멀티터치를 활용한 인터페이스 ,

최적화된 OS  , 수많은 개발자들이 참여하는 앱스토어 생태계등으로

기존 스마트폰을 뛰어넘은 혁신적인 발명을 해냈고

 

특히 애플의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인 앱스토어는

수많은 개발자 , 제작자들이 참여하며

여러 스마트폰 프로그램(어플) , 게임 등이 나타났고

오늘날 미국 문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경연장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어플들이 있는 앱스토어

 

<라봉봉>원래 미국 문화·예술·과학 등은 한꺼번에 쓰려다

너무 많아서 기초과학 , 의식주 , 미술 , 음악은 따로 썼고

마지막으로 쓴 이번 이야기도 사실 줄여쓴 것으로

오늘날 현대 미국은 세계 문화 , 산업을 주도하는 나라답게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빛나는 많은 것들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현대인 , 우리에게 일상이 된 것 , 눈에 보이는 것 , 보이지 않은 것들이

미국에서 온게 참많고 참 크고 대단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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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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