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그렇게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항의하러 갔다가

곤장에 맞고 이후 장독,곤장 휴유증으로 사망하자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후기는 전봉준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시대였고

이는 동아시아 이웃나라인 청나라(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대는 변화하고있었고 기존 중국 중심의 질서에서

새로운 문명과 총과 대포로 무장한 서양인들의 질서로

넘어가고 있었고 동아시아 내부적으로도 여러 변화에 대한 열망과

또 민생고등이 당시 잦은 농민봉기등의 원인이었을거 같습니다,,


전봉준은 당시 고부군 오늘날 전라도 정읍군 쪽에서

20여명이 모여 사발통문을 만들게 됩니다

사발통문은 조선시대 후기당시 유행했던거로

마을의 윤리 확인을 위한 문서 등을 작성할때

사발 말그대로 동그란 밥그릇을 종위위에 얹어놓고

그 동그란 사발 쪽에 둥글게 이름들을 적는것 입니다,,


<전봉준의 사발통문>


보시다싶이 이름,글자들이 동그랗게 써져있는게 특징입니다

당시의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라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라

2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을 침학한 관리를 격징하라

3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접 향하라


여기서 중요한거는,, 기존 봉기들이 그래도 수령,군수는

왕의 대리인,조선 관료기에 죽이려하지는 않고

분풀이식 봉기였다면 동학농민운동은 시작부터

조병갑을 효수,목을 베라는 말이 써있습니다,,

전라도는 옛날에도, 오늘날에도 풍요로운 농산물들의 고장이나

당시에는 풍요로운만큼 수탈역시 극심했던 고장이었고

고부군수 조병갑에 대한 전라도민의 원성이 컸다고 합니다,,


결국 전봉준은 봉기하게되고 원흉이었던 만석보를 파괴하고

조병갑은 도망칩니다,,

정부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조병갑을 귀향보내나

조병갑은 안동김씨와 같이 조선 권세가였던 풍양조씨로

큰아버지가 풍양조씨 조두순이었고,,

결국 이후 다시 조선 관료로 돌아오게 됩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고부군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다른 지역들이 민란이 일어났을때와 마찬가지로

민란 지역을 수습하는 임시관직인 안핵사를 파견합니다

당시에 민란은 민란이라고 무조건적으로 모두 잡아 죽이거나,,

그러기만 했다기보다 오늘날 노동운동,사회운동들이 일어나는거와 비슷한??

물론 봉기,민란이기에 무기나 쟁기,농기구들을 들었을것이고

과격하기는 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도 있었던거 같고,,

이렇게 지역을 수습하려고 정부에서도 일시적이었으나 조병갑을

귀향보냈다거나 안핵사를 파견하는등의 행동을 보였다고 할수있습니다

조선후기는 워낙 봉기가 많이 일어나기도 했었고요,,

물론 평안도 지역 홍경래의 난 같은 경우에는 매우 처참하게

조선정부에 진압된 반란,봉기라 할수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고부군에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보통의 자주일어나는 봉기였다고 할수있겠습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 역시,,

무난하게 고부군 지역민에 대한 위로나

안핵사로서의 일수습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봉기 참여자들을 색출해내고 연좌제,가족들까지 엮어 죄를 물으며

살육을 했습니다,,

이용태 역시 조병갑 못지않은 폭정을 했고

결국 고부군민들은 또다시 분노하고 결국

1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킵니다,,


<전봉준과 농민군들 동학 농민운동 그림,민족 기록화입니다>


이용태 역시 조병갑같이 겁을먹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후 전봉준은 총대장으로 하고 김개남,손화중등과 농민군들은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으로

1300여명의 조선 정부군과 싸워서 이기게 됩니다,,

이는 동학농민 운동 최초의 대규모 전투로

당시 조선 정부군의 총기 600정을 뺐고 농민군은 사기가 올랐고

전주로 진격할수 있게됬다고 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전주성을 점령했고 이는 거의 국가규모의

반란이라고 할수있었을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선 정부에서도 특히 조선국왕 고종은,,

청나라의 태평천국 운동때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난을 진압한 사례를 들며,, 서울 병력을 뺄수가 없으니,,

우리도 외국 군대에 요청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전주는 조선왕가의 성씨인 전주 이씨의 본거지였고

다급한 나머지 결국 외국군인 청나라군,청군을 끌여들이려는 선택을 하게됩니다,,

청군이 5월 5일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 역시 청군이 출병할경우 일본도 출병한다는 텐진조약에 근거해

바로 다음날 5월 6일 제물포,인천에 군대를 상륙시킵니다,,

이에 농민군들도 일이 커졌음을 알고

외국군의 개입,모내기와 정부에서도 군수와 안핵사를 벌줬으니

이제 그만하자는 제의에 결국 전주 화약, 정부군과 동학 농민군은

싸움을 그만두게됩니다 대신에 정부에서는 교정청,

농민측에서는 집강소라는 개혁,자치 기구들을 만들게 됩니다

이때 나온게 폐정개혁안 12조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폐정개혁안 12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여기서 중요한거는 노비문서 소각과

과부,남편 잃은 여인이 개가,재혼하는거를 허용한다는거 같습니다

이는 기존 봉건적 질서,악습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또 관리 채용이나 공사채,토지등의 내용으로는 농민측의 입장이

반영됬다 할수있는 사례라 할수있겠습니다


늦게 쓰는것인데요,, 동학 농민 운동에서 동학이 붙은 이유는

당시 전봉준의 아버지 사망과 관련해 일어나기도 했으나

전라도 지역에서 천도교,동학 종교의 2대 교주 최제우의 교조 신원운동,

동학을 탄압하지 말고 죄명을 벗겨달라는 운동을 하기도 했고

농민들 사이에 퍼져나간 동학과 맞물려 일어났기에 동학 농민운동이라고 합니다

농민봉기 뿐만아니라 동학이라는 종교탄압에 대한 불만을 가졌던

동학 교도들이 모여서 일어난 농민봉기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수있습니다,, 세계사에서도 중국 종교와 관련된 농민봉기인

태평천국운동은 나오는데요 그 영향을 받았을수도 있는거 같은,,

한국버전 대규모 농민봉기 입니다,,


결국 조선 정부군과 농민군은 전주 화약으로 1차 동학 농기가 끝을 맺었으나

이미 파병했던 외국군인 청군과 일본군은 있었습니다

의외로 청군은 난이 끝난거를 알고 조용히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으나

일본은 한반도 진출기회로 삼고 동학난은 아직 진압되지 않았다며,,

철군을 거부하고 조선정부를 간섭하려 합니다,,

결국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없애려

고종에게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흥선대원군 내각을 실각시키고

김홍집,박영효,서광범등의 친일내각을 세웁니다,,

김홍집 중심 내각에서는 갑오개혁이 실시되는데요

점점 일본의 영향이 커지고 조선 내정간섭단계로 이어지자

농민들은 2차 동학 농민봉기를 일으킵니다,,

1차와 다르게 1차는 조선 내정,조선 정부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2차는 외세,일본의 개입에 반발한 봉기라 할수있겠습니다

2차 농민봉기 이야기는 다음에 쓰겠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