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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64년

2월 봄

장수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7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9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장수왕 65년

2월 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9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장수왕 66년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백제의 연신이 고구려로 투항했다고 합니다


연신은 백제 삼근왕때의 대신이자 반란자로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연씨 귀족 출신으로

해구와 같이 반란에 동참하다가

고구려로 달아났고

연신의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장수왕 67년

3월 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9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장수왕 68년

4월 여름

남제의 태조 소도성이

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 상황에서

남조였던 송나라가 망하고

제나라가 일어나게 됬습니다


장수왕은 사신 여노 등을 보내서

남제에 조빙 朝聘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만나는 일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내는 일)

하게 했고

위나라 광주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냈습니다


위나라 고조가 장수왕에게

조서를 보내서 책망했습니다


<위나라 고조의 말을 전하는 위나라 사신>


우리 위나라 천자께서는

강남의 도적들과 통교하려던

고구려왕에게 엄중히 경고하셨다 !

천자께서 전하라 하시기를 ,,


도성(남제의 왕)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위나라 왕)은 망한 나라를 옛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장수왕)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남제의 왕)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 蕃臣 (울타리 번 蕃 신하 신 臣 자로

변방의 신하, 중요한 신하라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라고하겠느냐 ?


이제 한번의 잘못으로

경(장수왕)의 이전부터의 꾸준히 위나라에게 조공해온

정성을 덮을 수는 없어

사신을 돌려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라고 하셨다 !


<장수왕>고구려 통역관 !

너무 길어서 이해를 못했다

뭐라는 거냐 쟤 ?


<고구려 통역관>즉 이번에

남제와 통교하려다 위나라에게 딱걸렸으나

그동안 위나라에게 조공해온거를 참작해서

이번 한번은 봐줄테니 앞으로 잘하라는데요 폐하 ??,,

위나라도 사실 우리 눈치를 많이봅니다


<장수왕>아하 ,,


<위나라 사신>ㅡ_ㅡ ??,,


<장수왕>알겠소,, 앞으로는 더 정성껏

위나라 폐하를 받들겠소이다,, (뻥이지만 ㅋ )


장수왕 69년

장수왕은 사신을 남제로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라봉봉>이렇게 장수왕은 장수왕 68년에

바다에서 남제에 사신을 보내다가

위나라에게 걸렸으나

위나라에서도 이에 다시 사신을 돌려보내고

책망을 했다고 하나

금새 다음해에 다시 남제에 조공했다는 기록은

장수왕은 가까운 위나라에 주로 조공(외교)했으나

또한 가까운 위나라기에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몰랐고

남쪽에 위나라[북조]를 크게 견제할수있는

남제[남조]와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왕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고구려의 군사력 자체만으로는

위나라나 남제와와도 크게 뒤떨어졌다 하기에는 어렵습니다

고구려 역시 강국이었는데

공정한 외교가 아닌

왜 이렇게 신하국이 상국에게 하는

조공이라는 표현이 있었냐면

고구려가 단순히 약해서라기보다

중국은 옛날부터 문화력이 높았던 나라였고

군사력 이외에도 크게 배울게 많은 선진국이었기에

중국 주변 이민족들도 중국보다 힘이 강할때여도

중국의 자원도 많고 배울게 많은나라였기에

형대접,황제대접은 계속 해줬다고 할수있습니다


그러다 너무 중국이 약해지면

금방 중국땅으로 들어와 나라를 세웠고요,,


즉 고구려에서 중국으로

조공을 해도 형식적으로 황제대접을 한것이지

정말 너무 무서워서 살기위해 물품을 바치고

하는 비굴한 형태는 아니었고

중국에서도 답례품을 내려주는 형식의

실리적으로는 대등하나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사대관계의

조공외교 형태라 할수있습니다


장수왕은 큰 확장보다는

이렇게 위나라[북조]에 자주 조공하고 틈틈히

남조와도 교류해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넓혀준 영토를 관리하는 쪽으로

정치를 했다고 보시면 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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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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