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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55년

2월 봄

장수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장수왕 56년

2월 봄

장수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 성을 공격해서 빼앗았습니다


4월 여름

장수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장수왕 57년

2월 봄

장수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8월 가을

백제의 군사가 고구려 남쪽 변경에

침입했습니다


장수왕 58년

2월 봄

장수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장수왕은 2월 봄과 7~8월 가을에 위나라에 사신을

자주 보내 조공한거 같습니다,,)


장수왕 59년

9월 가을

민노각 등이 위나라에

도망가서 항복했고

위나라에서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주택을 주었습니다

이때가 위 고조 연흥 원년이었습니다


장수왕 60년

2월 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7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이 이후에는

전보다 2배로 공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 보답품도 조금 늘었습니다


여기서 보답품은 신하,제후국이 황제국에게

조공,선물,보물을 바치면

황제국에서는 예의상 답례품을 내려주는데

형식적으로는 신하국이 신하,동생,자식의 입장이나

만약 신하국의 힘이 쎌경우에는

황제,형,부모의 입장이었던 황제국에서도

답례품을 신하국 이상으로 내려주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수있습니다

이는 형식적 권력 못지않게

실권도 중요하다는 사례라 할수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장수왕은

계속 위나라에 조공을 했다는거를 보아서

당대에 국제정세에 큰 무리수를 두지 않고

안정에 집중했던거 같고

위나라에서도 이때 조공품을 2배로 늘리자

보답품을 조금 늘린거 같습니다,,

위나라,고구려 둘다

누가 압도적으로 강한 때는 아니었고

서로 예의상 한 행위였던거 같습니다,,


장수왕 61년

2월 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8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장수왕 62년

2월 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7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라봉봉>조공 기록이 외교를 중시한거긴 했어도

별다른 기록이 없어서 은근 고구마를

먹은거 같이 답답하네요,,


장수왕 63년

2월 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8월 가을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9월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해서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현재 서울)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경(백제 21대왕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해서 돌아갔습니다,,


삼국사기 백제 이야기에서는(백제 본기)

백제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첩자였던

스님 도림과 바둑에 빠졌고

이에 국정을 돌보지 않아서

고구려의 공격을 대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 이야기는 이후 백제 이야기에서 하겠습니다,,


또 일본의 삼국사기라 할수있는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서기 권 14 大泊瀨幼武天皇 雄略天皇 20년(476년) 겨울>

백제기(百濟記) (백제 역사책) 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로왕(蓋鹵王) 을묘년(乙卯年 ,475) 겨울

맥(狛) (고구려) 의 대군(大軍)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밤으로 공격하였다. 왕성(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위례(尉禮) (한성,서울)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일본서기는 일본 우월주의적 사관으로 쓰여졌기에

당시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아예 멸망당하고

이때 멸망한 백제를 왜(일본)왕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는

뉘앙스로 서술된게 있으나(왜,일본은 당시

백제인들에게 기술과 문화를 전수받고 배우던 시기입니다,,)


백제 기록을 인용했다는 것과

일본서기 기록도 자국 우월주의가 심하나

완전 거짓은 아니고

삼국사기,일본서기 기록 모두 당시의 처절했던 백제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습니다,,


또 오늘날에는

삼국사기에서는 이때 죽은 개로왕의

뒤를 이은 22대 백제왕 문주왕은

한국 역사책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나오나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에서

백제 역사책 백제기를 참고했다는 점에서

당시 개로왕과 개로왕의 왕자(아들)가 죽고

동생 부여문주,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일본서기 기록이 사실에 근접할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라봉봉>

여기서 장수왕의 한성함락이 중요한 이유는

한성은 보통의 도시가 아닌

백제의 1대왕 온조왕때부터의

수도였고 중국과 교역을 할수있고

한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로

매우 중요한 백제의 거점지,백제의 수도였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기도 하고요


이로인해 백제는 멸망 위기까지 몰리게되고

고구려는 아주 중요한 곡창지대를 얻고

또다시 영광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백제 역시 문명국이었기에

수도이자 곡창지대인 한성을 정복한거는

크나큰 손실이었고 반대로

고구려에게는 매우 큰

남쪽의 거점을 확보하게 된것입니다,,

한강유역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인들의

각축장(서로 이기려고 다투고 있는 곳)

,전쟁터가 됬고

이후 신라가 차지하게 되며

신라 삼국통일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 이야기(고구려 본기)

장수왕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왕(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해서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경(백제 21대왕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해서 돌아갔다


라고

짧게 기록되고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삼국사기 백제 이야기(백제 본기)

개로왕 이야기에서는

그 과정과 개로왕의 처절했던 상황들이

자세히 기록되있다는게

고구려 입장과 백제 입장기록의 다른점이라

할수있습니다


같은 한국역사이긴 하나

이렇게 고구려,백제,신라가 셋으로

나눠져있던 상태였고

원래 공격하거나 점령한쪽(장수왕,고구려)에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당한쪽(개로왕,백제)에서는 그 기록들이

자세하게 기록된게 이때 말고도

역사서에서는 여럿 찾아볼수가 있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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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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