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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왕 25년

2월 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2월

명을 내려서

평원왕은 급하지 않은 부역을 줄이고

군읍에 사신을 파견해서

농사와 양잠을 권장토록 했습니다


<고구려 백성 1>여러 부역들에서 면제됬데 ~


<고구려 백성 2>이야 ~ 드디어 마음편히

농사를 지을수 있겠어 ~


<고구려 백성 3>다시 고구려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폐하께서는 어질고 인자하셔

고구려 태왕 폐하 만세 ~~


4월 여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평원왕 26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4월 여름

수나라 문제가 대흥전에서

우리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중국 양나라에 온 사신들을 그린 그림

양직공도를 모사(베껴그린)한

당염립본왕회도에 나타난 (왼쪽부터)백제,고구려,신라의

사신 그림, 가운데가 고구려 사신입니다>


<고구려 사신>감사드리옵니다 폐하


<수나라 문제>허허허 마음편히 즐기시구려 ~

(고구려 사신들은 자신감이 높구만,,

오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겠지,,)


평원왕 27년

12월 겨울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평원왕 28년

장안성(평양성)으로 도읍,수도를 옮겼습니다

장안성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로

평양성이라고도 부르며

평양에 있습니다


평원왕 32년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수나라의 중국통일)을 듣고

평원왕은 대단히,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평원왕>중국은 분열의 시기를 끝내고

다시 한나라같은 거대 통일제국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수는 없는노릇이므로

방비를 철저하게 해야겠다


평원왕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해서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고

수나라 고조는

평원왕에게 조서를 보내서,,


<수나라 고조,수 문제>고구려는

비록 스스로 번방 藩方(=번국, 제후의 나라)이라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라고 책망했고

그리고 또한,,


<수 문제>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쫒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해서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그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의 인구가

진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뜻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평원왕>(괜히 중국을 통일한 자가 아니다

글은 점잖지만 유능하다는게 느껴지구나,,)

알겠소 곧 수나라 황제께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겠소,,


평원왕은 이를 보고 황공하여,,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려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재위 32년 10월 겨울에 붕어(사망)했습니다


호를 평원왕이라 했습니다


<김부식>이 때는 수나라 문제 개황 10년이다

수서와 통감의

'고조가 개황 17년에 조서를 주었다' 는 기록은

잘못이다


<라봉봉>우리,한국의 자랑스러운 역사 고구려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중국이나

실제로 고구려 후기의 중국의 수나라 문제나

당나라 태종은 유능한 인물이었다는것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25대왕 평원왕 역시

유능,인자한 왕이었고

이렇게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 맞서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했고

중국측 기록인 '수서'에는

이렇게 기록되 있습니다,,


[수서]


수문제 17년 (597년)

상(수 문제)이 탕(평원왕)에게 새서,

황제의 친서를 내려 말했습니다


<수 문제>짐은 천명을 받아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데,

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위임하고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각기 그 마음을 이루도록 하였소

그런데 왕은 매번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하고

비록 번국 藩國 (울타리 나라, 제후의 나라)을 칭하지만

성의를 다하지는 못하였소


왕(평원왕)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의 덕과 같이 베풀어야 하거늘

도리어 말갈을 핍박하고 거란을 통제하였소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의 신하가 되고자 하는데

왕은 이와같이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니 어찌 해로움이 크고 깊다고 하지 않겠소 ?


태부 太府 (천자,황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의

공인 工人 (기술자,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그 수가 적지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하면 될 것인데

몇 해전부터 몰래 와서 재화로서

이익으로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 弩手 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 한것이 아니겠소 ?


(해석 오늘날 식으로 해석하면

무기나 기술이 필요하면 나에게 말하면

보내줄수 있는데

왜 우리나라 기술자들을 매수해서 도둑질해가냐 ?

라고 보시면 될거 같습니다,,)


이때 짐은 사자에게

명하여 왕의 번국을 위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을 살펴보고

그 정치방법을 가르치고자해서였소


하지만 왕은 사자를 객관에 앉혀두고

엄히 막아 지키면서

그 눈과 귀를 닫고 막도록 하여

끝내 보고 들을 수 없도록 하였소


어떠한 음흉함에 있어서

다른 이가 알지 못하도록 하고,

관사(관아)를 통제하며 그가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였소 ?


또한 왕은 자주 기마를 보내서

변방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번 간계한 계획을 펼쳐

올바르지 못한 낭설을 만들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


[수서 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


수나라 역시 혼란과 분열의 중국을 통일한지

얼마 안된상태였고

고구려가 중국 통일제국이었던

한나라와도 맞서 싸웠고

오랜 역사가 있는 나라였던것과

강대국이었던것을 알기에

수나라 문제의 편지도

조심스러운 모습도 보인다고 할수있습니다


또 역대 고구려 왕조 기록과

이 편지에서 고구려인들이

수나라 기술자를 매수하고

여러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점에서

고구려인들은 전쟁에서 속임수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었고

수나라 역시 어느 한쪽도 굽히거나

하려하지 않았기에

결국 두 나라는 당시에 유례없는

세계 최대군사(수나라 113만 대군으로

1차 세계대전전까지 세계최대규모,,)의

충돌로 이어지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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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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