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양왕대의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의 침공,

1차 여수전쟁>


고구려 26대왕 영양왕

재위기간 28년 590~618년


영양왕은 평양 平陽 이라고도 했고

이름이 원이며

대원 이라고도 했습니다


평원왕의 맏아들로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할했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고


평원왕 32년

평원왕이 붕어,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수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서

영양왕을 배알하고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세습하게 하고

옷 한벌을 하사했습니다


영양왕 2년(591년)

정월(1월) 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표를 올려서 사은하고

왕으로 봉해줄것을 청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했습니다


3월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내렸습니다


5월 여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영양왕 3년

정월(1월) 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영양왕 8년

5월 여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영양왕 9년

영양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했으나

영주 총관 위 충이 우리(고구려) 군사를 물리쳤습니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서

한왕 양과 왕세적 등을 모두 원소루 임명해서

수륙군(해군[당시에는 해군을 수군이라 했습니다]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했습니다


6월 여름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했을 때

장마를 만나서

군량미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주 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서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서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습니다


9월 가을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중 죽은 자가 8,9할(80~90퍼센트)였습니다


비록 수나라 군이 돌아갔으나

고구려에게는

30만 대군이라는 유례가 없는

대군이었다고 할 수 있고

고구려 영양왕도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서 사죄했습니다


수나라 황제(문제)에게 표를 올려서


'요동의 더러운땅,분토 糞土 (직역하면 똥 땅,,)의

신하 아무개'


라고 칭했습니다

이는 고구려를 똥 땅,

영양왕 스스로를 신하 아무개라고

극도로 낮춘 표현으로

영양왕도 유례가없던

수나라 30만 대군에

크게 충격을 받고

급히 사과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에 수나라 황제,문제는

이리해서 군대를 철수하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했습니다


백제왕 창(부여창, 백제 27대왕 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고

이에 수나라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효유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 하기를


<수나라 황제,문제>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


하고 그(백제)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서 보냈고

이에 영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했습니다,,


영양왕 11년

정월(1월) 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영양왕이 태학 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옛 사기(역사책)을 요약해서

신집(고구려 역사책) 다섯권을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유기라고 이름했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했습니다


<라봉봉>유기의 100권이 많아보여도

옛날 종이,제지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목간이라고 부피가 큰 나무에 기록하다가

영양왕대에는 종이가 사용되며 부피를 크게 줄일수 있어서

5권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양왕 14년

영왕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라왕(신라 26대왕 진평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고

그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했습니다


이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이

부여군에게 밀릴때

안개가 짙게 나타났고

이에 허수아비로 가짜 군사를 만들어

고구려 병사의 수가 많아보이게

위장한것과 비슷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라군의 북소리와 함성에

고구려 고승 장군은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러났습니다


<라봉봉>다음해인 영양왕 15년 (604년) 부터

수나라 문제가 죽고 양제가 즉위합니다

양제는 문제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문제가 검소하고 치밀,섬세한 성격이었다면

양제는 방탕하고 사치가 심하며,,

크고 화려한 대건설,토목공사,전쟁(고구려 수,여수전쟁)등을

일으키고 이때 영양왕때부터 고구려와 수나라,

이후 당나라와의 중국거대통일왕조와의

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전쟁 규모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정도로

거대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전쟁사는 0자를 하나 빼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허풍,과장이 심하나

(예를들면 백만대군은 십만대군,십만대군은 만명 이런식)

영양왕때의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공은

113만 대군으로 그 기록이 허풍이나 과장이 없이

정확했고 보급부대까지 하면 그 2배였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다고 합니다,,


당시 수나라 인구의 5~7.7퍼센트가

고구려,수나라 여수전쟁에 동원됬는데

거의 모두 청년층의 남자였을거고

수나라 젊은이 대부분이 고구려 전쟁으로 징용,노역되고

이는 수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전쟁의 규모는 더이상 10만 이하가 아닌

수십만,백만 규모로 되었고

고구려는 넓은 영토에 비해서

인구가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괜히 700년 역사가 아닌만큼

고구려인들은 용감하게 자신들의 영토,나라를

수나라에게 지켜내는데 성공했으나

끝내 이후 들어선 중국 당나라와 한국 신라의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게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