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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22년

2월 봄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4월 여름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수나라)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습니다


영양왕 23년

봄 정월(1월) 임오일

양제가 조서를 내려서 말했습니다


<양제의 조서>고구려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와 예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잘려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니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천도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나니

그들(고구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가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날마다 부족하지 않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왕이 한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입조하는 의식에도

왕이 직접 오기를 꺼려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유혹함이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벡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천망에서빠져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주었고

뒷날 항보했을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오랜 악을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 술직(중국에서, 제후가 조회에

나아가 천자에게 직무의 상황을 아뢰던 일)하며

해변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거늘,


고구려는 이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내왕하는 길을 막고있다


그들은 죄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없으면

어찌 신하의 예를 행하겠는가


이러하니 가히 참을 수 있겠으며

누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또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이 많고 과중하다

세력이 강한 신하들과

호족들이 모두 나라의 권세를 잡고

붕당을 이루어 겨루니

이것이 풍속을 이루었다


뇌물을 받음이 장사치같고

백성들은 원통하고

잘못된 일을 말하지 못하고

해마다 재앙이 거듭되니

굶는 집들이 즐비하다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도 기한이 없어

힘이 다하여 옮아다닐 수 없고

몸은 죽어 도랑과 골짜기를 채운다


백성들이 근심되고 고통스러워

이에 누구를 따르겠는가


나라안이 슬프고 황당하여

그 폐해를 견딜 수가 없다


머리를 돌려 안으로 보고

제각기 생명을 도모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들도

모두 혹독하다는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와 삭주에 이르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일이

두번 걸음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에

나(수 양제)는 육사를 거느리고

구벌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의 뜻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향할지니,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여러 번 되풀이 하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토,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위 12군은

점선, 함자, 동이, 대방, 양편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결하게 하라


수나라 군사의 총 수는

1백 13만 3천 800명 이었는데 (113만 대군,,)

외형적으로는 2백 만명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습니다,,


수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지냈습니다


제왕,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해서

각 군에 상장,아장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고

1대는 1백명이며

10대가 1단이고

보병은 80대(8천명)였는데

4단(4천명)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고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단마다 다른 색으로 했습니다


매일 1군씩 파송하되

상호 거리가 40리씩 되게했고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했습니다


40일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고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습니다,,

(백리 약 40km기에 960리는

1000리정도니 400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이로

깃발이 뻗쳤습니다,,)


황제(수 양제)의 진영에는

12위, 3대, 5성, 9시가 있는데

내외, 전후,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했고

또 이 대열이 80리(약 30km)에 뻗쳤습니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의 성대함이

이러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라봉봉>당시 수나라가 국력이

고조 수 문제때 축적되어있는

재산이 크게 있었기에

강했던 시기이기는 하나

수양제는 즉위후

여러 다채로운 비실용인것에

국고를 계속 탕진하게 됩니다,,

(호수에 산쌓기,

달밤에 수천궁녀들과 노래,

비단 꽃잎 만들어 바닥,호수에 뿌리기,, 등등)


수양제의 업적이라는

대운하건설도 아버지 문제때

시작된 사업으로

실용적이고 검소하게 짓되

백성들에게 고통,무리가 있을가봐 잠시 중단시킨것을

운하 곳곳에 40여개의 행궁을 지으며

크고 화려하게 짓고

공사 실수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책임관리자와 인부 5만명을 강가에 생매장했고,,


당시 양제가 지나가는 곳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다는 소문이 있었고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수나라 백성들은

스스로 손발을 잘라서

부역을 면하려고도 했고

나중에는 남자가 부족해지자

여자까지 징용하고


건축가들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는둥

그의 행적을 보면

우리나라,고구려를 공격해서만이 아닌

왜 중국인들에게도 폭군으로

유명한 황제인지 알수 있는거 같습니다,,


수양제도 아버지를 따라

수나라 통일에 일조하기도 했고

예술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나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아버지가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수나라에서도 113만대군은

큰 무리가 있는 병력이었고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위한

수나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워낙 유례가없는 대군이었고

당시 고구려로 가며 여러 혼란이 커서

군인들은 죽어갔고

민가에서도


'요동(고구려)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말라'


라는 노래가 유행했고


또 이런 거대 규모 대군의

전쟁물자를 대려고

병기를 만들기위한

수나라 백성들의 부역도 심해서

당시 산동해안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수군이 탈 배를 만드는데

완공 기한이 촉박했고

기술자들은 밤낮없이 쉬지못하고

물속에서 일해야했고

이에 40퍼센트가 하반신이 썩어 문들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113만 대군은 그 실속이나 내실이

결코 강할수 없었고

이는 수나라 군의 궤멸과

이로 인한 큰 손실은

수나라 멸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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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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