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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의 패퇴,

수양제 113만 대군의 요하도하>


영양왕 23년

2월

수 양제가 군사(113만 대군,,)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했습니다


<수 양제>이것이 대국의 위엄이다

어서 고구려를 짓밟아 버리자 !


여러 군졸들이 모두 모여서

강 앞에 큰 진을 쳤고

우리(고구려) 군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했기 때문에

수나라 병사가 건너오지 못했습니다


<수나라 장군>폐하 !

고구려 군사들이 필사적으로

강을 방어하기에

쉽게 건너기가 어렵겠습니다,,


<수나라 양제>우리의 2백만 대군에

문제 될게 무엇인가 ?

위나라의 조조가

적벽에서 배들을 묶었던것 처럼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자 !


<수나라 장군>오 폐하

좋은 방법입니다


수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해서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개의 부교(배다리)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서

동쪽 언덕으로 이으려 했으나

부교,배다리가 1장정도가 1장정도가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했습니다


<수나라 군사들>헉 거의다 왔는데

1칸이 모자르다,,


이때 우리(고구려) 군사가

크게 이르러 공격하였고

수나라 병졸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했으나

우리 군사들은 높은 곳에서 공격했으므로

수나라 병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했고

수나라 장병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맥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사웅,맹차등과 함께 모두 전사했기 때문에

수나라 군대는 곧 부교를 걷어서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나라 장군들>부교 길이를

측정한 기술관들은

누구냐 ! 당장 잡아서 !!


<수 양제>허허 진정해라 ㅎ


<수나라 장군들>송구하옵니다 폐하

측정을 잘못했기에 수많은 우리 병사들이

죽었고 바로 잡아서 엄벌을,,


<수 양제>됬다 ㅎ 다시 만들면 되느니라 ㅎ

2백만 대군이 아니겠느냐 하하하


<수나라 장군들>;;;; 예 폐하,,

다시 만들겠습니다,,

(2백만 대군인데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해서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했고

부교를 이틀만에 다시 완성시켰습니다,,


모든 수나라 부대가

부교를 지나서 차례로 건너와서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구려 장군 1>요하를 건너게 하지마라

우리의 강토를 절대 짓밟게하지 말아라 !

절대 물러나서는 안된다 !


<고구려 장군 2>장군 !

현재 우리 병사들로는

200만 대군이 밀려오는

기세를 당해낼수가 없습니다 !

어서 후퇴해야 합니다 !


<고구려 장군 1>그럽시다,,

전군 후퇴하라 !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해서

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나라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해서 요동성을 포위했습니다


<김부식>요동성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양제의 수레가 요동에 이르었고

양제는 요동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천하를 사면했습니다,,


형부상서 위문승 등을 명하여

요좌의 백성을 위무하게 했고

10년을 급복(부역 면제)하게 했고

군현을 세워

서로 합쳐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라봉봉>중국인들은 압도적인

인구수를 바탕으로

옛날부터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

이렇게 많은 군사력으로 미는것이었고

이를 '인해전술' 이라고 합니다

인해전술 人海戰術 은 인산인해,사람이 산과 바다같이

많다는 말같이

사람이 바다같이 많다는 뜻으로

무기나 전술보다는 인력의 수적인 우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술로

오늘날 현대까지 중국인들의

기본적 정신이 되었다고 할수있고

사실 넓은 영토의 러시아,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6.25전쟁, 한국전쟁때도

한국군, UN군이 북진하며

통일이 근접해올때

중공(중국 공산당,중국)군이 개입해서

총과 칼만이 아닌

북과 꽹가리를 치며

깃발을 들고 들어온 중국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로

한국,UN군을 압도하게됬고


고구려,수나라 고수전쟁,여수전쟁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수나라는 처음에는 배다리 계산을 잘못해서

많은 피해를 봤으나

금새 2일만에 다시 만들어서

압도적인 인력우세,물량으로

고구려군을 크게 패퇴시켰다고 할수있습니다,,


이에 비해 고구려에서

자주 사용하던 방법은

속임수 등으로 시간을 벌거나

교란, 이민족들과 연합하기,

고구려 영토에서 나는

우수한 질의 철제무기 같은

질적인 방법이 많았고


이렇게 물량으로 압도하는

적들을 만났을때는

청야전술을 사용합니다

청야전술이란 상대편이

우리 성을 점령하게되면

자신들이 가져온 보급물자 이외에도

약탈등으로 물품이나 재산,

곡식들을 얻어서 보급이 가능하고

현지에서 물을 조달할수도 있습니다


청야전술은 그러지 못하게

자신들의 성밖의 농경지를 전부 태워버리거나

근처 우물들을 막아버리는 방식이었고

수나라 군사같은 113만 대군은

압도적인 물량이 장점이었으나

보급이 안됬기에 먼 고구려 원정에서는

또 단점이 되었고

이렇게 청야전술,속임수등으로

오래 버티며

상대의 보급을 어렵게 한 전략들은

수나라 군 패배의 큰 원인이 됩니다,,


전쟁은 결국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이로인해 국력의 큰 상실이 있던 수나라는

얼마후 멸망하나


청야전술 역시 복구하려면

후유증이 있었고

고구려 역시 큰 피해였고

더이상 전쟁을 했다면

멸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당시에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여수전쟁은

질(고구려) 과 양(수나라)의 대결이라 할정도로

서로 뚜렷한 모습을 보였고

이후 고구려와 중국 당나라의 전쟁은

남쪽에 한국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서

참전하게 되면서

고구려는 양과 질,남쪽과 북쪽 모두

압박이 되며

찬란했던 고구려 700년(혹은 900년)

역사가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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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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