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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대의 무산성 전투, 비녕자 가족의 *투지>


(*투지 鬪志 싸우고자 하는 굳센 마음)


그렇게 이전 이야기 같이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 7년

10월 겨울에는

백제장군 의직 義直 이 보병과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했고


이는 신라측 기록에서는

무산성,감물성,동잠성 등을 공격해왔다고 나오는데

따로 '무산성 전투'라는 명칭은 없기에

저가 이름붙였고,,

저가 저번 이야기때 '백제 의자왕대의 무산성 전투' 라고 썼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무산성 전투' 이야기를 한번 더 하려는데

무산성 전투는 삼국사기 개인이야기인 '열전'에

비녕자라는 신라 인물의 이야기 '비녕자 열전'에 자세히 나와있고

당대 신라인들의 극도로 상무적이었던 기풍과

신라 장군,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지휘 스타일 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녕자 丕寧子 (발음상 비령자라 불리기도 합니다)


비녕자는

출신지역과 성씨를 알 수 없었습니다(신라 인물)


진덕여왕 원년(1년) 정미 (647년)

백제가 많은 군사로

무산성 茂山城 , 감물성 甘勿城 , 동잠성 桐岑城 등을

공격하여 오자


유신 庾信 (신라장군 김유신 金庾信, 삼국통일의 주역, 한국사 위인)이

보병과 기병 일만명을 거느리고

막았는데

백제 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하고 이기지 못하여

사기 士氣 (군사의 기세,기운)가 떨어지고 힘이 지쳤습니다


유신은 비령자(=비녕자)가 힘써 싸우고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 말하기를,,


<김유신>날씨가 추워진 후에라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들어짐을 알 수 있는데

금일의 일이 급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고

기이함을 보여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


하고는

더불어 술잔을 나누면서

뜻의 간절함을 보이니

(혹은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니,,)

이시은근 以示殷勤


비녕자가 두번 절하고 말하기를,,


<비녕자>지금 수 많은 사람 중에

일을 오직 저에게 맡기시니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서 보답하겠습니다


했습니다


비녕자는 적진(백제군 진영)에 나가면서

종(노비,,) 합절 合節 에게 말했습니다


<비녕자>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분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나의 아들 거진 擧眞 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굳센 의지가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니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으면

집사람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


너(종,노비 합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


(요약하면,,

내아들 거진도 얘 성격에

나따라 죽을건데 그러면

집안은 누가이을거냐

내아들이 나서지 못하게

합절이 너가 잘 말리고

내 시신은 잘 수습해서 돌아가거라)


말을 마치고 (비녕자는)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창을 비껴들고

적진(백제군 진영)에 돌진하여

몇 사람(백제군)을 쳐 죽이고

자신도 죽었습니다,,


(비녕자의 아들)거진이 이를 바라보고

(자신도 아버지같이 돌격해서,,) 떠나려 하니

합절이 말했습니다


<합절>도련님 !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가 도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마님을 편안하게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버지 명을 거역하고

어머님을 버리는 것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는 (합절은 거진의) 말고삐를 잡고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에 거진이 말하기를,,


<거진>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면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하고는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끊고,,(팔을 치고 라고도 합니다,,)

(卽以劒擊折合節臂 즉이검격절합절비)


적중으로 달려가 죽었습니다


합절이 말하기를,,


<합절>나의 하늘이 무너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


하고는

또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신라)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사실상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려 일가족이

몰살된 것입니다,,)


감격하여 다투어 나가니

향하는 곳마다 적(백제군)의 칼날을 꺾고

진을 함락하여

적병을 대패시켜

3천여 명을 목베었습니다


유신(김유신 장군)이 세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곡을 매우 슬피 했습니다


대왕(진덕여왕)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를 갖추어 반지산 反知山 에 세 사람을

합장 合葬 (같이 묻음)하고

처자의 구족 九族 (아홉범주의 친족으로 

주위 많은 가족을 뜻합니다, 비슷한말 삼족 三族 [부계,모계,처계])

에게 은혜로운 상을 풍부하게 내려주었습니다


<라봉봉>바로 전 글에서 무산성 전투를 썼는데

무산성 전투에 자세한 이야기를 이번 글에 썼습니다,,


비녕자는 자신이 죽을것을 이미 알고도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백제군 진영으로 뛰어들었고

비녕자의 아들, 비녕자의 종 모두 일가 가족들이

뛰어들어 사망하자 신라군들은 분노심,

비녕자 가족들의 용맹함에

진지하게 백제군에 맞서게 된거 같고

저번에 말한거 같이

이런 자살돌격으로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행위는

양국의 격차가 크게 차이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일본의 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당시

미군을 상대로 반자이돌격,가미카제 자살특공대는

후진적이고 열악한 일본군의 상황에서

미군에 거의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신라군이 이미 백제군에 앞서있던 상황에서

주저할 때 주로 사용된 방법이었던거 같고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화랑 반굴과 관창의

자살돌격이 유명하나

이미 이전부터 이런 방식은 자주 사용되었고

씁쓸할 따름이고

이런 명령을 내린 당대의 김유신 장군도

죄책감과 인간 양심의 자책감이 컸을것 입니다


,, 그렇게 백제군은 백제장군 의직이

단신,홀로 돌아왔다 하고 (匹馬 필마, 한필의 말)

특히 이때 삼국통일시기는 전투의 규모도 대규모였고

잔인한 이야기도 많아서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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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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