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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항목에 로마 이야기를 쓰던 중이었고

카이사르 이야기를 하기전에

카이사르가 해적에 잡힌 사건 이후 일어났던

'스파르타쿠스의 난' 을 쓰겠습니다


로마에는 초기에는 왕이 있었고

그러다 공화정으로 갔는데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난 이후

넓어진 영토에서 귀족들이 많은 자원을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로마 사회는 귀족과 평민층의 대립 등이 번번히 있어왔는데

당시 로마에는 또다른 신분들이 있었으니

바로 '노예' 입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넓어진 영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복지에서 노예들이 로마로 흘러들어왔다고 하고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의 소유인 삶을 살았던 이들로

의외로 고대 로마 사회의 노예는 대우가 좋았다는 말도 있고

실제 로마시대에 노예들은 가정교사 노예, 예술가 노예, 가사노동 노예 등이 존재해서

로마인들 정서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도 하는데

문제는 결국 '노예는 노예' 라는 것입니다

인간대 인간이 아닌 노예와 주인간의 관계는

설사 '착한 주인' 이던간에 노예제를 행하는 거 자체가

악한 행위이므로 '착한 악마' 와 다를 바 없는 말이라 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실제 초강대국이었던 로마사회의 멸망을 가속화 시킨게

바로 노예제였고 노예제로 인해 로마의 출산율은 급격히 감소했고

아무리 착한 주인이던 대우받는 노예던 간에

인간의 자유권을 박탈하는 사회가 유지됬다는 것 등으로

결국 로마인들은 점차 발전을 멈추고 예전 검소하던 농경민의 풍습을

잊어버리고 노예에 의존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내부적으로 썩어가고 있었고

이런 불안정한 사회에서 점차 로마인들은 아기를 낳지 않게되었고

이런 결과 내부적으로 썩어가며 국력이 약화되었고

점점 '자유분방한 야만인(바바리안)' 들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게르만족에게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제는 로마 사회에서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카르타고식 노예 장원 문화 '라티푼디움' 이 로마에 생겨나기 시작됬고

로마인들에게 도륙당한 카르타고인들의 저주였는지

카르타고식 노예제, 문화들이 로마를 잠식해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배경이야기를 했고

이렇게 노예제는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사회로 퍼져나갔고

그나마 가정교사 노예, 가정부 노예등은 대우가 괜찮았다 하더라도

가장 억울한 노예가 로마의 살인 스포츠였던 '검투사 경기' 에

로마시민들의 짧은 흥분과 쾌락을 위해 죽어갔던

'검투사 노예' 들이었습니다

검투사 노예의 경우에는 원형 경기장 내에서

다른 검투사 노예와 싸우거나

맹수들과 싸워서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경기를 해야했고

자유권만 박탈된 다른 노예들과 달리

아예 생존권 자체가 박탈된 '사람' 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노예제 자체가 어느 노예던간에 악습이어서

이전에 로마에서는 시칠리아 섬에서

1차, 2차 노예 전쟁(반란) 이 일어난적 있었고

당시는 농장노예들의 반란으로 가혹한 노동에 못이겨 일어난

사람들이었는데

강력한 로마군에 진압됩니다


이후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 라는 검투사가 74명의 검투사들을 이끌고

탈주했는데 이를 '3차 노예 전쟁' 혹은 그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난' 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갈리아(프랑스~ 독일쪽) 출신의

스파르타쿠스(그는 로마군 용병이었는데 죄를 지어서

검투사로 팔렸다고 합니다)

가 잔혹한 검투사 제도에 반발해

동료 검투사들과 소규모의 탈주로 시작됬는데


그들은 산림지대였던 (산적질 하기 좋았던)

험준한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쳤고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에서 보낸 소규모 진압대를 패배시켰고

이에 노예, 불량배, 부랑자들이 스파르타쿠스 세력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에서는 3천 신병을 징집해 토벌군을 보냈는데

로마군은 그들이 배고픔에 지쳐 항복할 것을

생각했는데 스파르타쿠스는 포도 넝쿨로 밧줄을

만들어 절벽을 내려가

후방 로마군 진지를 습격해서

로마군을 학살했고

로마엑서 보낸 두번째 토벌군도

제압했고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에 소문을 들은 주변 농장 노예들이

집단 탈출해서 그에게 몰려가

세가 커지게 됩니다


발빠르고 건강한 양치기노예들,

사회의 불만이 많은 하류층도

스파르타쿠스 진영에 가담했고

반란의 규모는 4~7만 규모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군 경험이 있었던

노련한 인물이었던 스파르타쿠스의 지도 아래

노예 반란군들은 도시들을 정복하며

로마를 위협했고

이에 로마에서는 집정관(오늘날 대통령급) 을

보내서까지 진압을 하려하나

또다시 패배합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죽은 동료를 위해

포로로 붙잡은 로마인들을 역으로 검투사 경기를

시키게 했고

이에 로마 고위층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합니다


이후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북상하며

알프스까지 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고

아마


북방으로 가서 로마를 탈출하자 vs

로마로 진격해서 복수하자


로 파가 갈린거 같고

이에 괜히 '자유로운' 북방 야만의 땅으로 가봤자

어렵게 살거고 그냥 로마로 진격하자가 더

옳다 여겨져서 그렇게 된거 같습니다


당시 로마 정예군은 이미 변방에 투입되어 있었기에

로마 원로원은 전쟁화 된 이 반란을

진압하기 곤란해졌고

당대 로마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 에게

이 반란 진압을 맡기게 됬고

크라수스는 사비를 털어서 8개 군단, 4~5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곧바로 10분의 1 형이라고

10명의 병사들 중 1명을 9명이 때려 죽이게 하는

(가장 뒤쳐지거나 못하는 병사,

적에게 등을 보인 자, 혹은 제비뽑기를 통해,,

돌멩이, 채찍, 곤봉 등으로

죽이게 한 거 같습니다,,)

형벌을 내려서 매우 엄하게 군기를 잡으려 했고

(오늘날로 치면 '단체체벌' 이런거와 비슷해보입니다)

이런 잔혹한 부대 단체처형은 당시 크라수스가 매우 심각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당시 이 형벌로 로마병사가 4000명이나 죽었다 하고

오죽하면 군단병들은 크라수스가 적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과 물량의 힘 (+ 자기 병사들에 대한 무자비함)

으로 밀어붙이는 크라수스앞에

남하를 선택한 스파르타쿠스군은 몰리기 시작했고


스파르타쿠스는 해적과의 협상을 통해

이전에 1,2차 노예전쟁(반란) 이 있었던

남쪽 시칠리아 섬으로 도망치려 했는데

해적들과의 협상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고립된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의 정규 군단병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공격에

무너지며 대부분 전사했고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를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로마 역사가 플로루스는


<플로루스>그는 거의 임페라토르( imperator 황제)

같이 싸우다 죽었다


라고 기록했고

일개 검투사 노예에 대한 극찬에 가까운 기록을 했고

스파르타쿠스라는 '사람'이

'자유를 위해 싸운' 이 사건은

그만큼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대규모 노예봉기, 전쟁이자 대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잔당들은 폼페이우스군에게 격파됬고


포로로 잡힌 6000명의 노예군은

로마에서 다시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법정 최고형 '십자가형' 에 쳐해 죽었고

반란 노예들은 놀랍게도 십자가 앞에서도 의연했으며

매달린 채로도 로마군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라봉봉>기록 남기기 좋아하던

로마인들은 이 전설적 인물인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기록을

조금밖에 남기지 않았다 하고

이는 비천한 노예 검투사에게 집정관들이 패배하고

노예제가 사회의 큰 원동력이었던,, 로마에서는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자

이런 기록들에 영감을 받은 노예들이 또다시 일어날 경우

국가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비인간적, 잔인하고 비정한 경기였던 검투사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는 자유를 위해 싸운 투사였으며

오늘날 자유의 상징으로 이야기 되며

그의 이름은 단순한 노예 해방을 넘어서

끝까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와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잔인한 경기였던 검투사 경기는 이후에도 존재하는데

오히려 반성못한 로마인들은 검투사 경기장에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군대까지 배치했다 하고

이 악랄한 경기는 이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퍼트리신 기독교 사상이

로마로 유입되고 기독교의 '생명존중 사상' 이 로마에

유입되며 (+돈이 매우 많이들기에 재정악화로)

폐지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이야기에서 나왔던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한

로마 제일의 부자 크라수스와

명성있는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는

훗날 야심있는 인물 카이사르와 손을 잡으며

'삼두(세 머리) 정치'를 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다음 이야기부터 다시 카이사르 이야기가 나올 거 같은데

한편으로는 부자 크라수스보다 돈도,

장군 폼페이우스보다 명성도 부족했던

카이사르가 매력과 카리스마 등으로

로마를 사로잡은 것을 보면

정말 비범한 인물이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파르타쿠스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인간 속박제도였던

검투사에 대한 스파르타쿠스의 저항은 실패했고

또 검투사는 오늘날 사라졌지만

'검투사'라는 말은 오늘날 '부조리' 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고

부조리속에서 우리 모두는 스파르타쿠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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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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