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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카이사르는 해적들에게 잡혔다가

풀려나온 이후 해적들을 제압했고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군사 참모 혹은 군사 대대장 military tribune 이 됬고

이 시기에 이전 이야기에 쓴 '스파르타쿠스의 난' 이 일어났는데

당시 카이사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난 진압에 관여했다고는 하나

어떤 역활을 했는 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하고

감각적인 인물이며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던 그의 성향상

조용히 후방에서 소극적인 관여를 하며

스파르타쿠스의 난 진압 이외에도

본인의 힘기르기에 집중했던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 종결 이후 로마의 상황으로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한 로마 제일의 부자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난  진압을 마무리한

로마의 명장 폼페이우스 장군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고

두 인물은 집정관에 출마하나

원로원이 둘다 유보시켰고 (두 인물의 힘이 커질까 두려워한

원로원,귀족층의 판단으로 보입니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결탁해서 평민파를 내세우며

군대를 장악하고 정권을 잡았고 술라(귀족파 인물)가 제정한 법들을

철폐하고 평민파의 근간이었다 할 수 있는 민회의 힘을 다시 키우게 되서

결국 이는 평민파들을 육성하는 발판이 됬다고 합니다


일단 이시기 카이사르의 행보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일단 카이사르는 평민파적 모습을 보였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어쨋든 군사 참모가 되며

점점 '명예로운 경력' 이라 불리던 로마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던 카이사르였으나 한편으로는 돈이 없어

하층민들이 사는 거주지역에서 살았다고 하고

이후 기원전 69년 안찰관에 선출되 원로원의 한 자리를 얻게 됬고

이 당시 민중파 수장이자 이미 세상을 떠났던

마리우스의 부인 줄리아가 사망했고

카이사르는 장례식에서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했고

카이스라는 본인이 마리우스파(평민파)임을 천명했고

이때부터 술라파(귀족파)의 견제를 받게 됩니다

또 같은해 카이사르의 아내 코넬리아도 죽었다고 합니다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회계감사관(재정 관리 책임자)

에 선출됬고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지방),

스페인 남부지방의 전직 법무관 밑으로 발령받았고

그는 정성을 다해서 일을 했다 하고

당시 그는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카디스 지역도 방문했는데

그곳의 신전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게 됬습니다

이에 그는 한숨을 쉬며 탄식합니다,,


<33세의 카이사르>알렉산더가 세계를 제패한 나이(33세)에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구나 ,,


이때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하고

아마 그 깨달음은 '대기만성 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짐,

큰 사람이 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함)'  이나

'큰 나무는 바람을 많이 받는다' 이런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올때 그는

알프스 지역의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로마 중심지와 먼 지역의 로마인들은

로마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였고

카이사르는 민중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기원전 63년

로마 사제단의 의장이 죽었는데

카이사르는 '최고 제사장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에 출마합니다


보수파 지도자 카툴루스는 카이사르를 돈으로 매수해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카이사르>나는 더 많은 돈을 빌려서라도 싸울 것이다 !


라고 말했고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선거에서

카이사르 본인도 이길 수 있을 지 확신을 못했는데

선거 당일 아침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카이사르>어머니 오늘 당신은

아들을 최고 제사장이거나 아니면 추방된 자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선거 패배는 큰 파탄을 가져왔기에

자발적 망명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고

확신하지 못했던 그 스스로도 '죽느냐 사느냐' 의 마음으로

선거에 임했던거 같습니다


다행히도 다른 후보들이 표를 나눠먹어서

카이사르는 선거에서 당선됬다 하고

이는 카이사르가 민중의 사랑을 받는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선거 승리 다음해인

기원전 62년

카이사르는 집정관(오늘날 대통령급) 바로 아래인

법무관에 선출됩니다

카이사르는 다시 스페인 남부 지역 관리로 발령됬는데

당시 카이사르는 빚이 너무 많았기에,,

(선거나 평소 인기 유지용 축제,이벤트를 열었던

가난한 카이사르는

빚을 엄청나게 많이 졌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떠나려 해도 채권자(빚쟁이)들이

떠나기 전에 빚을 갚으라 요구했고

그 때 로마 제일의 부자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본인을 지지하는 대가로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줬다고 합니다

(든든한 물주를 확보한 카이사르,,)

크라수스 역시 로마 제일의 부자답게

투자하는 안목이 있었을것이고

같은 평민파이자 비범한 모습을 보이던 카이사르에게

후원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스페인 지역으로 갈 수 있었던 카이사르였고

스페인에 가는 도중 카이사르는

매우 가난하게 살며 주민이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을 지나가게 됬는데

카이사르와 동행하던 사람이


<동행하던 사람>이런 촌구석 마을에도

명예욕과 질투, 그리고 일인자 자리를 둘러싼

세력가들의 싸움이 온통 뒤섞여 있군요 허허


라고 농담을 던지자

카이사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카이사르>나는 로마에서 이인자가 될바에는

차라리 이들 사이에서 일인자가 되겠네


( '계구우후 鷄口牛後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

라는 사자성어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동행하던 사람> ;;;;; (웃자고 한말인데,, 아놔 이형 무셔어,,)


<라봉봉>알렉산더 석상을 보고

한탄한 카이사르는 혹은 알렉산더 전기를 보고

울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늦어보여도 카이사르는

거의 밑바닥부터 시작했는데

나름 33세까지 빠른 속도로 성장한 인물이라고도 하고

큰 뜻을 품었던 그의 한탄, 자책적 발언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기 영합을 위한 돈뿌리기 등으로 그는 빚쟁이 신세도 됬지만

틈틈히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차곡차곡 입지를 다져왔다 할 수 있었던 그고 


로마에서 이인자가 될 바엔 작은 마을에서 일인자가 되겠다한

그의 발언은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 뱀[혹은 닭] 의 머리가 되는게 낫다 혹은

계구우후 鷄口牛後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 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카이사르 이야기중 유명한 이야기로서

작은 곳에서 살 지언정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말로

상당히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학을 제왕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자신만만하고 패기넘치는 인물의 성장기를 보면

왜 그의 이름 카이사르(카이저나 짜르 역시 카이사르에서 나온말) 가

'제왕' 을 뜻하는 지는 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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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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