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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함께

집정관(오늘날 대통령격으로 로마는

2인 집정관 체제였습니다) 에 당선됬고

흑막에서는 비밀리에 카이사르와

로마의 명장 폼페이우스,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가

셋이서 결탁하는 삼두정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뒷배경을 가진 카이사르는

일단 처음부터 무력으로 정치를 행하지는 않았고

처음엔 비공개였던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회의 내용)을

돌이나 금속판에 세겨서 로마 광장에 게시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했는데

이를 '악타 디우르나 acta diurna ' 라고 하고

여기서 디우르나 diurna 는

매일 이라는 뜻으로 영어단어 저널 journal (언론) 의

어원이 됩니다

즉 현대의 신문격인 제도를 시행했던

카이사르고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1만 세스테르티우스는 병사 10년치 봉급이라 하고

오늘날 돈으로 약 1억 2천만원 정도 같은데 지금 생각하기엔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돈뿌리기가 일상이었던 옛날 정치판 기준에서는

이정도만해도 새롭고 신선한 법안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율리우스 판례법) 을 제정했는데

다른 말로는 율리우스 공직자 윤리법이라고도 할 수 있고

로마 공직자 행동강령을 100여 항목에 걸쳐 규정해

뇌물 방지, 공직자 부패 방지를 했다 할 수 있고


결국 원로원, 귀족들끼리

'짬짜미(남몰래 자기들끼리만 짜고 하는

약속이나 수작) 식으로 해먹는' 것이 방지될 수 있었다

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정치 비판,견제 기구가 언론이라는 점과

또 공직자 뇌물 방지가 한국에는 '김영란법' 이 유명하듯이

' 카이사르 법 ' 같은 것을 만들어

뇌물을 방지하려 했다는 점 등이

왜 그가 민중의 사랑을 받은 인물인지 ,

또 왜 그가 독재자의 대명사가 됬음과 동시에

'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 ' 라는 평가가 있는 인물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로마 평민 1>그동안 원로원에서는 이런 발언을 하며

정치를 행하였군,,


<로마 평민 2>카이사르 덕분에 진실을 알게됬어,,


그리고 카이사르는 평민파 개혁파들이

실행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살해당한

'농지법' 을 개혁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농지법을 개혁하려다가 살해당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내용과도 비슷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퇴역병들에게 땅을 주는

법안이 담긴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토지법을 시행시키려했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협조가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민회에다가 이 법안을 넘겼고

역시 원로원에서는 민회가 열리는 것을 방해하려는 행동을 하며

원로원이 밀어줘서 당선된 또다른 집정관 비불루스는


<비불루스>나는 또 한 명의 집정관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이 법의 통과를 막을 것입니다 !!!!!!!!!!!!


라며 민회가 불가능하게 하려고

민회가 열리는 날들을 매번 공휴일로 선포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의사진행을 방해했고


결국 원로원, 보수파의 많은 반대를 받았던

카이사르는 귀족들에 대한 모든 '배려' 를 중단하고

뒷배경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강력한 힘, 삼두정치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민회로 출동한 폼페이우스의 옛 군인 출신 부하들이

집단적으로 몰려와서 난리를 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연설하던 귀족파 인물 카토는 농지법 반대 연설을 하려하자마자

연단에서 끌려나와 맞아 죽을 뻔 하고

또다른 집정관 비불루스는 이에 쫄아서,, 점괘가 안좋다는

핑계로 발언을 포기했으며


또다른 삼두의 일원이었던 로마 제일의 부자

크라수스는 부유층 평민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또 인기 최고의 스타정치인 (얼굴마담격) 폼페이우스가

열변을 토해내며 지지를 선언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농지법이 통과됬고

위협을 느낀 원로원에서도 역시

결국 처음과 달리 농지법 시행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서약에 서명했고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은 도시에 집결해서

무력시위를 해댔다 할 수 있고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다른 집정관 비불루스는 자기 집으로 도망치며

그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며

이따금 불길한 얘기를 한마디씩 했고


이에 로마 시민들은 이를 풍자해서

원래는 두 집정관 이름을 붙여서

예를들어 2018년에 김철수 이영희 라는 인물이

두 집정관일 경우

2018년을 '집정관 김철수와 이영희의 해 ' 라고 불렀는데

(집정관 임기는 1년이었음)


당시 또다른 집정관 비불루스는 이미 카이사르에게

밀려 힘을 못쓰는 상태였기에

이 해를 ' 집정관 율리우스와 카이사르의 해 '로 풍자합니다

(카이사르의 본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런 토지법 통과로 삼두의 힘을 숨기고 있던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칼을 뽑았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로마 시민들에게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3인이

비밀리에 맺엇던 동맹

'삼두정치' 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농지법이 통과된 부로부터

사실상 카이사르가 제출한 법안은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 비쳐졌으며

(어짜피 통과 안시켜주면 또다시 무력시위대

데려올거니까,, )


농지법에 이어서 또다른 법률들이 뒤따라서

폼페이우스법이 실행되고

소작농의 소작료 일부를 면제해주는 법 등이 실행됬고

특히 농지법은 폼페이우스의 늙은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됬고

수도에 거주하던 로마 주민들도 토지를 얻고

자녀가 많은 가족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농지법 통과 이후 원로원파에서도 여러 말들이 나왔으나

민중파 개혁의 핵심이었던 군대에 참여했던

무산자(재산 없는 사람) 들에게 땅을 나눠주자는 것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너무 높았고

전쟁영웅 폼페이우스도 원로원에 많은 것을 양보한 상태였는데도

일방적으로 폼페이우스를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던 원로원에 대한

지지도 이미 냉랭해져 있었고

뭔 말을 하려해도 당대 로마에서 언변력이 가장 뛰어났던

카이사르의 발언에 제대로된 반박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결국 '이상만 앞서있었던' 평민파 그라쿠스 형제가 끝내 못이뤄냈던

'농지법' 은 무력과 자금력이라는 '현실' 을 갖추고 있었던

카이사르에 의해 통과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농지법 통과가 어느정도 마무리된 사건으로 보인듯했지만

로마인들도 점점 카이사르의 법 통과 절차가

합법적인가 불법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게 되었고

반대자들은 카이사르의 집정관직이 끝나면

카이사르를 재판에 회부할 수도 있었는데

집정관직이 끝나면 '전직 집정관직' 이라는 다음 단계로 가서

전직 집정관의 안전보장, 법정 회부 면제 등

집정관직에 대한 예우를 받을 수 있던 로마였기에

결국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카이사르의 임기 종료후 카이사르의 '전직 집정관직' 을

속주 총독직같은 강력한 권한직이 아닌

이탈리아 목초지와 숲을 맡기는 '산림 감독원' 을 시켜서

카이사르의 권력에 제약을 두려 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에게 알프스 남쪽의 갈리아 속주를

5개 군단과 함께 3년동안 카이사르에게 맡김으로서

카이사르의 집정관직 만료 후에도 권력유지를 가능케 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반대자들이 이에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카이사르는 매우 기뻐하며


<카이사르>나는 내가 원했던 것을 이루었으며

이제 모든 사람들을 쥐고 흔들 수 있다


라고 말하게 됬습니다,,


<라봉봉>카이사르의 업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것이 있는데

저는 보통 갈리아 전기나 역법(달력. 율리우스력) 만든것을 주의 깊게 봤고

야심있는 독재자의 모습 위주로 그를 생각했는데


저도 카이사르가 세계 최초로 신문의 조상격인 '악타 디우르나' 를

만들었다는 점은 처음 알았고

인류 역사 최초로 언론,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일단 그를 '천재' 라고 표현한 역사가들의 말들은

단순한 그를 높이기 위한 표현은 아닌 거 같기도 합니다


농지법 시행 이야기에서는

반대하는 원로원 귀족들에게

무력을 동원해 농지법을 통과시킨 카이사르였고

옛날 그라쿠스 형제가 법을 이용하다가

원로원 귀족들의 칼에 맞아 죽고 '법보다 주먹' 이라는 말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당대 로마사회에서 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미 집정관 당선 이전부터 삼두정치 등으로 힘을 길러놓은 상태여서

이번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때와 반대로

원로원 귀족들이 법이나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 등 여러 방법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다가

귀족들이 '법보다 주먹' 에 당하는 역현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변 능력도 상당해서 당대 로마인중에서는 그를 언변으로

감당할 인물이 없었다고 할 수 있고


왜 원로원, 귀족들이 이 별다른 것도 없어보이는

인물 한명에 쩔쩔 맸는지를 알 수 있고

또 왜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에게 빠져들었는 지 역시 알 수 있는

카이사르의 행보였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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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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