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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카이사르는 갈리아(알프스 너머) 총독으로

부임하게 됬고

왜 그가 굳이 갈리아 지방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으나 갈리아 지역에서의

전쟁을 예감하고 공을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카이사르는 아직도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나 군사원정으로 돈을 벌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혹은 로마 가까이에서 로마 원로원의 눈을 피해

갈리아 지역에서 힘을 키우려는 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지방 ,

당대 로마인들에게 갈리아는

무법지대에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동쪽으로는 라인강을 경계로 라인강 너머에는

게르만족이 살고 있었고

나름 카이사르가 살던 시기에는 그래도

로마화 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당대 갈리아 지방은

로마의 동맹 하이두이족이 있었는데 게르만족에게

압박당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로마는 속주였던 스페인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려

갈리아의 남쪽지방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던 시기

라인강 상류, 스위스, 알프스 산맥쪽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스위스인들의 조상

헬베티족(오늘날 스위스 정식 국호는

헬베티아 연방으로 헬베티족에서 나왔습니다)

은 게르만족의 압박을 피하고

풍요를 찾아 프랑스 남서부인 지롱드 강 북쪽으로

대이주를 하려했고 가기전에

대이주를 작정했는지 자신들의 마을을 불사릅니다,,


먼저 헬베티족은 카이사르에게

이동을 위해 로마 속주를 통과하게 해달라했고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하고

곧바로 보루(방어 구축물)를 설치하고

또다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에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에게도 승인을 얻고

영토를 통과하려 했고 승인을 얻어 하이두이족 영토를 지나가는데

지나가던 헬베티족이 하이두이족 영토에서

약탈을 시도해서

하이두이족은 헬베티족을 적대하며

동맹국인 로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카이사르 역시 헬베티족이 지롱드 강가(프랑스 남서부) 에 정착할 경우

로마 속주들이 위협받을 수도 있었기에

이미 하이두이족이 도움을 요청하기 전부터

북쪽 경계를 넘었고

하이두이족의 보호요청이 카이사르에게 전달됬을 때

오히려 명분을 제공해 줬기에 환영할 일이 됬다고 합니다


결국 카이사르와 로마군은 하이두이족 수도쪽인

비브라크테 산 지역에서

헬베티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카이사르는 모든 병사들을

언덕위에 배치하고 기병대들도 말에서 내리게 하는데

이는 로마 기병대들이 두려움에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카이사르의 '배수진' 이었다고 할 수 있고

카이사르는 모범을 보이려 자신의 말을 베어버립니다

(말목자른 김유신 장군이 생각납니다)


로마군보다 수적으로 3배가 우세했다는

헬베티족은 9만명의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으로 진격했고

헬베티족은 로마군의 투창(창던지기) 공격에 방패에 창이 박혔는데

로마의 투창은 방패를 꿰뚫으면 바로 휘어져서

빼내기 어려운 창이라

헬베티족은 투창공격에 무너진 밀집대형 +

방패를 버리고 싸우다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보이족과 툴링기족도 로마군을 공격했는데

카이사르는 1열을 헬베티족,

2열을 보이족,툴링기족에 싸우게 했고

결국 로마는 헬베티족을 격파합니다


카이사르에게는

사실상 태어나서 한 제대로된 첫 전투였다 할 수 있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엇으나 로마군도 상당히 힘들게 이겼기에

3일간 큰 휴식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중에서,,>

(헬베티아) 전사자들을 매장하느라

사흘(3일)동안 발이 묶였다


(휴식겸 전사자 매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카이사르는 3일간의 휴식 후

헬베티족을 추격하게 됬고

주변 부족들에게


<카이사르>헬베티족에게 식량이나

숙소를 제공하면 적군으로 취급하겠음


이라고 포고를 내리고

이에 어느쪽에 설지 몰랐던 갈리아인들은

카이사르의 포고를 무서워해

헬베티족을 적대하게 됬고


결국 굶어가던 헬베티족은 항복하고

인질과 무기를 바쳤고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족의 고향인)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고

헬베티족은 이미 집도, 농경지도 불태워 버린 자신의 고향에

가봤자 답이 없었는데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에게 헬베티아족 식량을 원조하라 명령했고

이는 만약 헬베티족 땅에 아무도 없을 경우

게르만족들이 라인강을 넘어 올 수 있었기 때문이고

결국 대이주를 시작한 36만 8천명의 헬베티아 인들 중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11만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이 돌아가자

더이상 헬베티족을 간섭하지 않았고

헬베티족은 고향에 돌아가 겨우겨우 고향을 복구했고

덕분에 헬베티족의 후손 스위스인들은

이로 인해 스위스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카이사르의 헬베티족에 대한 승리는

로마의 갈리아 중부 지배권을 안겨주었습니다


<라봉봉>갈리아 전쟁시기에 대해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 라는 기록을 남겼고

오늘날 라틴어 연구에는 거의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합니다


사실상 카이사르 인생의 첫 대규모 전쟁이었다 할 수 있고

전쟁사에서는 그를 뛰어난 용병술 같은거보다는

타고난 감각, 카리스마로 승리했다고 하는데

카이사르는 수적 열세에도

단순히 야전에서의 전투 뿐만 아니라

갈리아족 포섭등으로 헬베티족 고립 등

외교전에서도 이미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시 사실상 대규모 전투에 경험이 없는

초급적 지휘관이었음에도

이미 노련한 감각등이 갈리아 전쟁 시기에

녹아들어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에서 내리게 한다거나 배수진이니 하는 것들은

전쟁 전부터 이미 승리를 예상한 상태에서

사기를 고양시키는 보조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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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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