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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1885년 조선시대 말기

전라도 고창현 덕정면 당촌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응애 ! 응애 !


아기는 작았으나 울음소리만큼은 컸고

그 아이는 탐관오리들의 폭정과 외세의 침탈에 일어났던

바로 훗날 한국의 민족운동 동학농민운동의 주역이 되었던

전봉준이었습니다


전봉준의 어렸을때 이름은

전명숙이었습니다


명숙이(전봉준)는 커서도 몸이 참 작았습니다


<전봉준의 어머니>여보 명숙이(전봉준)는 또래애보다

너무 키가 작아서 걱정이에요


<전봉준의 아버지>피죽 먹일 형편도 안되니,,

못먹여서 그런거지 뭐,,


어린이 전봉준은 어렸을때부터 먹을게 없었고

이는 전봉준의 주변 어린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어린 전봉준과 또래 어린이들은

매일 죽한그릇 정도 먹고는 여러 먹을거리가 있었던

산과 들 , 냇가에서 놀았습니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항상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며

쌀을 쌓아두고 있었고

백성들은 항상 굶주려 산과 들 , 냇가에서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했던 시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전봉준은

유독 키가 작았고

대신 용감하고 힘이세며 다부졌고 글을 배우는 속도도 빨라서

또래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할때에도 항상 그는

대장 역활을 했다고 합니다


전봉준의 어린이 친구들은 키가 작으나 다부졌던 그를

'녹두' 라고 불렀습니다

녹두는 알맹이가 작은 곡식이어서

전봉준의 별명은 녹두가 되고 훗날 사람들은 그를 녹두장군이라고

부릅니다


전봉준은 계속해서 키가 작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왜이리 키가 작은지 물었습니다


<전봉준의 아버지>음,, 우리집 말고도 다른집도 배곯는 것은

마찬가진데,,

아 ! 명숙아


'작은 고추가 매운 법'


이란다 !


전봉준은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습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몰락한 양반이었는데 양반일지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가세가 기울면

직접 일을 찾아다녀야 했었고


전창혁은 당시 부패하고 무능하며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짯던

탐관오리들의 행패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관리들이 돈으로 벼슬을 사서

지방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장사를 하듯이 하는게

유행이었고 그렇기에 백성들의 원망은 나날히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전창혁은 백성들이 살기 편안하고 행복한 세상이

올 것임을 믿고있었고

작았으나 똑똑하고 다부졌던 아들 전봉준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은

전창혁이었고


그런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은 전봉준은

언젠간 큰 일을 할 것임을 생각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린이들은 댕기머리를 하다가

성인이되면 혹은 결혼을 하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비녀를 꽂았는데

20살이 되서 전봉준은 상투를 했고

이름을 어린시절 이름이었던 전명숙에서

전봉준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전봉준은 상투를 틀고 결혼을 했고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룬 그였으나

가난한 그의 환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이는 전봉준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당대 조선시대 말기 정치는 부패했고

외세는 조선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전봉준은 여러 고장을 떠돌며 살다가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한의사 , 풍수지리 등 여러 소일을 하다가

30대에 '동학'에 들어가서 접주가 됬습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조선에서 만든 종교로

서양 학문, 서양 종교 천주교에 대응해 만든

동양의 종교라는 뜻으로 동학이라 이름지어진 종교였고

양반, 농민할거 없이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으로 인해서

수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동학에 가입했습니다


이당시 전라도 고부군수이자 탐관오리였던 조병갑은

백성들을 수탈했던 인물이고

조병갑은 본인의 어머니가 죽자 2000냥을 거둬오라는 요구를 했고

이에 전봉준의 아버지가 항의하러 갔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습니다


또 이후에도 조병갑은 백성들에게 돈을 거둬서

자신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고

백성들을 동원해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사용료를 받는 등 백성들을 수탈하며 가렴주구를 일삼았고

전라도 지역 백성들의 원망은 커져 갔습니다

당시 전라도 농민들은 논밭에서 수확을 하면 절반 이상은 지주에게,

나머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조병갑에게 냈고

그러면 그해 먹을 곡식이 없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농민들과 함께

죽창(대나무로 만든 창) , 몽둥이 , 낫 등의 농기구 등을 들고

고부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비록 농민 반란이었다고도 볼 수 있더라도

당시 백성들에게는 무엇을 해도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선택권이 없었고

이에 조선시대 말기에는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됬습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이 고부관아를 들이치자

이미 소식을 알았던 조병갑의 도망에

고부 관아를 손쉽게 함락시킵니다


전봉준은 그곳에서


<전봉준>쌀들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오 !


라며 관아의 쌀들을 백성들과 나누었습니다

이미 도망친 조병갑이었으나

당시 분노한 농민군은 조병갑이 있던 관아를 부수고는 했습니다


<전봉준>조병갑은 다시 잡으면 됩니다 !

먼저 관아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있던 백성들을 풀어줍시다 !


전봉준을 깊이 신뢰했던 농민군은 곧바로

관아의 감옥에서 농민들을 구출했고

또 조병갑의 부패의 대표작이었던 만석보를 헐어버렸고

농민들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농민들>조선농민 만세 ! 만세 !


항상 억눌려 지내왔던 조선 농민들이었지만

당당하고 불의에 저항했던 전봉준의 지시 아래

농민들은 단결하며 새로운 삶,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전봉준은 탁월한 지도자이자 혁명가였고

당시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고부관아 함락소식을 들은

조선 백성들은 그를 '동학대장 전녹두' 라 부르며

자유나 신분없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서

녹두대장 전봉준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전봉준에게 몰려가는 농민들에게는

이런 노래가 퍼졌습니다


<전봉준에게 가는 농민의 노래>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이는 '언어유희'적 표현의 노래인데

당시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습격한 시기가

1894년 갑오년이었고 이를 갑오세=가보세 라 표현한 것이고

1895년 을미년을 을미적으로

1896년 병신년을 병신으로 표현한 노래여서

빨리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하면

영영 부패한 봉건정부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심정을 담은 농민들의 노래였습니다


잠시 조선정부에서는 백성들을 위문하는 안핵사 직을

이용태에게 맞겨서 고부에 파견했으나

이용태는 오히려 동학교도와 백성들을 탄압했고

결국 몰려든 조선 농민들과 함께

1894년 3월 전봉준은 각 지역 동학 접주들에게 글을 보냈고

손화중 , 김개남 등과 함께 농민 1만명을 모아서

'동학농민운동' 을 일으켰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민족기록화>


전봉준과 농민들은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큰 지역이었던

전주성을 점령했고

조선정부는 결국 동학농민군과 '전주 화약' 을 맺어서

잠시 화친했지만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커진 규모에 놀라

이미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던 상태였고

일본도 이에 핑계를 대고 군대를 몰아서 조선땅에 들어왔습니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익을 다투었고

이에 '청일전쟁' 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제압했고

그결과 조선정부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조선에 일본식 개화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옛날에는 비록 탐관오리의 횡포에 일어난

반봉건 운동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일본이라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또다시 농민군을 모았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결국 서울로 향해 북진했으나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우금치에서

기관총같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에

죽창, 조총 등 재래식 무기로 맞서다

크게 패배했습니다


이후 전봉준은 다시 군대를 모아서 재기하려 했으나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서 도성으로 압송됬고

재판후 1895년 4월 24일 교수형으로 사형당했습니다


<전봉준의 마지막 모습>


전봉준은 유언으로 시를 남겼습니다


<전봉준의 시>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뜻과 같더니

운 다하여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허물이 되겠는가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겠는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

그를 그리워하던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런 노래가 퍼져나갔습니다


<조선 백성들의 노래>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 군복이

파랑색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뜻한다고 하고

녹두밭과 녹두꽃은 당연히 전봉준을 상징합니다

청포장수는 조선 백성, 민중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라봉봉>한국의 위인 녹두장군 전봉준 이야기였습니다

전봉준은 민중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거나 하며 각각 기록이 다르거나

불분명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정신들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고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백성, 일반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당시에는 실패로 끝났지만

결국 그의 소망들이 계승되어 한국 민주주의, 민중운동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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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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