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은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오늘날 안동군 도신면 온혜리) 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황은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큰 스승이었으며

퇴계는 그의 호입니다


성리학을 발전시킨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선비였던

이황의 어릴적 이름은 서홍입니다


서홍은 양반집안에서 태어나서

형이 여섯에 누나가 한명 있었던 막내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습니다


서홍의 아버지대에는 연산군이라는 폭군이

사화라는 것을 일으켜서 온갖 선비들을

죽이던 시절이라 세상이 혼란스러워

선비들은 저마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숨어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서홍의 아버지도 벼슬보다는 학문쪽에 힘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서홍이 태어난지 7달만에 아버지는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서

서홍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채 자랐습니다


어머니 박씨부인은 32세에 과부가 됬는데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고

자식들을 교육시키면서 부지런하게 일하며

굳세게 자식들을 키워냈습니다


<서홍의 어머니>너희들은 아버지가 안계시니

남의집 자식들보다 더욱 행실을 조심하며 훌륭히 자라야만 한다


<서홍과 이황 형제들>네 어머니 !


서홍은 어렸을때부터 총명하며 단정하고 조신해서

보는 사람들이 누구나 탄복했습니다


<마을 사람 1>어린아이가 어쩜 그리

조신할까 ?


<마을 사람 2>자라서 큰 선비나 학자가 될 거 같아


서홍은 언제나 말과 행실을 조심하려 애썼고

자신의 일도 항상 남에게 넘기거나 미루려 하지 않고

스스로 하려 했습니다

글가르치는 스승도 부모처럼 공경했고 성실히 공부했으며

동네 아이들도 서홍의 모범적인 행동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이황은 형제간의 우애도 좋았습니다

8살때 서홍의 형이 작은 칼에 손이 다쳐서

상처에서 피를 흘렀습니다

이에 서홍은 형의 손을 잡고 슬피 울었습니다


이에 서홍의 어머니 박씨부인은


<박씨부인>서홍아 정작 손을 다친 네형은 울지 않는데

왜 네가 우는 것이냐 ?


하고 묻자

서홍은 울면서


<서홍>어머니,

형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 않을 뿐입니다

피가 저렇게 많이 흐르는데

형님이라고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어렸을때부터 착하고 고운 마음을 지닌 서홍이었습니다


서홍은 12살때부터

작은아버지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습니다

논어는 공자님의 제자들이 공자님의 말과 행동을 모아서

엮은 유교 사상, 철학 책입니다


이우는 어린 조카의 바른태도와 깊은 생각에 감탄했습니다

이황 역시 이우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황은 밥먹을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계속하며 독서하며 사색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서홍은 15살때 가재가 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시를 지었습니다


<서홍의 시 '가재'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집이 저절로 생기고

앞으로 가다가 뒷걸음칠을 치니 발이 많기도 하네

한평생을 살아도 한 웅쿰의 산 샘물 속에서 살 수가 있으니

강과 호숫물이 그 얼마인지 알아서 무엇하리


욕심을 버리고 분수대로 살며

소탈, 소박한 삶속에서 여유와 행복을 찾았던

그의 평생의 일생과 비슷한 시입니다


당시 조정은 밤낮으로 놀기만 했던 연산군의 폭정으로

사화들이 일어나서

선비들이 죽고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므로

서홍의 어머니 역시 서홍이 높은 벼슬자리에 가서

혼란에 휘말릴바에는 차라리

낮은 벼슬자리 정도나 하며 화를 피하며 사는 것이 낫겠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또 서홍은 18살때에도 시를 지었는데

작은 연못의 물빛깔이 너무 맑아서

중얼거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를 한 수 지었습니다


<서홍의 시>이슬에 젖은 풀은 물가에 곱게 둘렀는데

아담한 연못은 맑디맑아 티끌하나 없네

떠도는 구름과 나는 새는 서로 어울리고 있는데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을 찰까봐 두렵네


그렇게 이황의 어린시절은 학문의 연속이었고

동네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때에도

이황은 책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이황>성리학은 너무 재밌어,,

우주의 이치와 세상의 이치는 무엇일까 ?


오히려 너무 책에만 너무 몰두하는 이황때문에

이황의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서홍 역시 책만 보는 유약한 인물은 아니었고

공부하는 틈틈히 어머니의 농삿일들 돕기도 했습니다

서홍의 밭 가운데에는 길이 나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지나가다가

잘 밟고 그래서 서홍의 하인들이 길을 막아놓자

서홍은 자신의 이익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며

다시 길을 복구하도록 명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황은 21살에 진사 허찬의 딸과 결혼을 했고

23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황의 처갓집은 상당한 부유한집이었고

사위를 반가워하며 처갓집에서 살자한다거나

말과 논과 밭을 주며

여러 지원을 하려 했지만

이황은 거절하고 처가에서 주는 말과 논밭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황은 23세에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에 들어갔습니다

성균관은 태학이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당시 유학을 배우는 가장 높은 학교였습니다


당시에는 사화가 일어나 선비들이 죽어갔기 때문에

예의가 많이 무너졌던 시대라

글읽고 연구하는 것을 기피하고 우습게 여기던 풍조가 있었는데

이황은 그런거에 물들지 않고

항상 규범대로 지내며 조용히 공부만 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이황의 예의바르고

법도있는 생활습관을 우습게 생각했고

비웃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대단한 선비님 나셨군 ^^


그러나 김인후라는 선비만은 이황을 높게 여겼고

이에 이황은 김인후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김인후는 이황을 '영남(경상도)의 수재(뛰어난 인재)' 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황은 속된 풍조등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고

24살에 과거시험에 응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3번에나 과거에서 낙방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다른 유생들과 달리

시험에 나올만한 것만 공부하는 게아니라

그는 공부중에 유학에 깊은 뜻에 파고들었고

책들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시험공부보다는 학문의 본질적인 면에

집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당시 이황같이

학문의 본질에 집중하는 사람을

중요히 여기는데 관직 등용문인 과거시험은 그런 사람보다는

시험문제에 필요한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합격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시험에서 계속 낙방했던 이황이지만

학문의 즐거움을 느끼던 그였고

그러나 계속 집안 형편이 기울자 이황은 크게 걱정합니다

깊고 고요한 학문과 세속적인 과거시험, 벼슬길 사이에서 그는

큰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 이황은 열심히 공부했고

그러다 결국 27살에 지방과거시험인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후 생원시에는 2등으로 합격했습니다


이황이 향시에 1등으로 합격했을때

이황의 부인 허씨는 둘째아들 채를 낳고

한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젊은 이황은 뒷바라지만 하다

죽은 아내 허씨가 걱정됬으나

3년후 30세에

다시 권씨집안 권질의 딸 권씨부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권질의 아버지 권주는 갑자사화때 살해됬고

권질 역시 정쟁에 휘말려서 몰락한 집안이 됬고

이에 이황의 부인 권씨는 몰락해서 풍비박살난 집안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지적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귀향살이를 하고 있었던

이황의 장인 권질은 이황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권질>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맡아줄 사람이 없네


이황의 아내 권씨부인은 결혼후에도

제사가 시작되기 전 제사상에 있는 배를 몰래 치마속에

숨기는 등 이상행동을 했고

이황의 형수가 권씨 부인을 질책하자

이황은 예법도 중요하지만 조상님들도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것이라며

아내를 감싸주었고

이후 아내가 배가 너무 먹고싶어서 그랬다 하자

결국 이황은 아내에게 손수 배를 깎아주어 먹여주었습니다


이황 역시 두번 결혼했기에 여러 고통이 있었고

올바른 부부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이황의 명언>부부는 처음 만난 남녀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큰일이므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한편 부부관계는 서로에게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관계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


또 이황은 권씨부인을 맞기 전에

첫째부인 사별 직후 첩을 들였는데

그녀는 권씨부인이 있는 이후에도 장애가 있었던 부인을 대신해

실질적인 집안 살림을 해냈고

이에 이황은 첩에서 낳은 아들도 호적에 올려

동등히 대했다고 합니다

옛날, 유교적 사상으로 첩의 자식을 철저히 배격했던 풍조가 있었던

조선시대였고 그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음에도

비인간적인 풍조등에는 과감하게 맞섰던 그였고

지금까지도 이황가문의 족보에는

적서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황의 집안도 다시 안정됬다고 하나

이황은 과거를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황의 재능과 실력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설득했고

그러다 예순이 넘은 이황의 어머니는

이황에게 과거 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했고

결국 이황은 32살때

과거시험 문과 별시(특별 시험)을 보고 2등으로 합격했고

34세때 3월 대과(문과) 에 장원급제(1등합격) 했습니다

이황은 임금이 친히 하사한 어사화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이황은 그럴수록 더욱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황의 어머니는 장한 아들을 보며

눈물지었습니다


이황은 과거에 급제해서 서울로 올라왔고

첫 벼슬로 왕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짓거나

응대하는 예문관 검열 직과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부정자 보직을 겸해서 받았습니다


그러다 여러 자리를 거쳐 이황은 사관일을 하게됬는데

사관은 역사를 쓰는 직책입니다


그러나 이황을 시샘하던 이들,

특히 좌의정 김안로는 이황을 모함했는데

이황의 장인 권질의 동생 권전이 기묘사화때 죽었는데

좌의정 김안로는 권질의 사위를 사관의 자리에 앉힐 수 없다며

모함했고 결국 이황은 사관에서 물러났습니다


사실 김안로는 이황의 능력을 보고

이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다가

이황이 거부하자 이황의 내쫒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좌의정은 재상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안로의 편으로 가서

출세를 하려 했지만

이황은 대쪽같고 옳지 못한 것에 타협하지 않은 성품등으로

벼슬자리에서 항상 어려움이 있었고 본인 스스로도

그런 벼슬자리보다는 한가롭고 고요한 고향에서

책을 벗삼아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비록 사관에서 물러났지만

이황은 높은 학식과 능력으로 굳은 일도 성실하게 처리하며

임금의 사랑을 받아 여러 직을 거치며 승진했고

37살에는 승의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무렵 이황에게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황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이황은 아버지 없이 홀로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한없는 눈물을 흘렸고


이황은 고향 안동 온계리로 가서

어머니의 초상을 치루고

어머니의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상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죽으면 선비들은

부모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상을 하며 묘를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고 이에 이황 역시 3년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이황이었는데

3년상을 하며 몸이 마르고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경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시묘살이를 마친 이황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

세자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40세에 종6품 사간원 정언 ,

임금에게 바른말 하는 벼슬이 되었습니다

이황은 벼슬자리에 있어서도

항상 선비들간의 당파싸움을 경계하며

임금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선 중종 말기

이황은 암행어사가 됬습니다

암행어사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몰래 지방을 돌아다니며

지방관들의 부정부패나 민심등을 살피는 특별관리입니다


사람들은 유약한 이황이 암행어사를 잘 할까 걱정했지만

이황은 지방의 실정을 샅샅히 살피면서

못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관리들의 비행을 낱낱히 적어서 임금에게 보고했습니다


중종 역시 성실하고 고결한 인품의 이황이 간하는 말들을 듣고

관리들을 파직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당대 이황은 지식인이자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실천,행동가였습니다

항상 다정다감하던 이황이었으나

암행어사길에 나섰다하면 모든 관리들이 벌벌떨었다고 합니다


43세때 퇴계는 성균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늘 가지고 싶었던 책 '주자대전'을 구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주자대전은 송나라 대학자 주희, 주자가 지은 책으로

퇴계는 너무나 기뻐했고 곧 고향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고 열심히 주자대전을 읽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었는데도 주자대전책에 열중한

이황을 걱정한 사람들은


<이황 주변사람들>선생님 ! 더위에 탈이 나지는

않으실까 걱정되옵니다


<이황>이 책을 읽으면 속이 다 시원해져서

저절로 시원한 기운이 들어 더운 줄을 모른다

그러니 무슨 탈이 나겠는가 ?


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황은 인생을 주자책 연구에 집중하기로 생각하고

56세에는 주자대전을 요약한 '주자서절요' 라는 책을 엮었습니다


당시쯤 이황의 집 옆집에는 담장너머 밤나무가 있었고

밤나무는 이황의 집까지 가지를 뻗어서

밤들을 떨어트리곤 했고

마당을 산책하던 이황은 자신의 집 아이들이 주워먹을까봐

밤들을 주워서 옆집에 던져놓곤 했다 합니다

그만큼 청렴했다는 이황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황의 나이 45살때에는

계속 벼슬이 올랐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했다 하고

그해 7월 명종이 즉위하자

일본은 조선과 친하게 지내자고 애걸해 왔고

조정 신하들은 내치자는 의견이 많았고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 이황은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이황의 상소>현재 우리나라도 사정이 매우 어지럽습니다

북쪽 오랑캐도 위협이 되는데 왜국의 청까지 물리치면

한꺼번에 두 적을 막기 어려우니

신중히 처리해 주시옵소서


47년후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기에

미래를 내다본 대학자 퇴계 이황의 상소였습니다


이황의 나이 46세때는

두번째 부인 권씨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지내고 싶었던 이황은

고향 온계리를 흐르는 시내 토계 동쪽 바위 옆에

양진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귀향을 했습니다


양진암은 '참됨을 기르는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토끼 개울이라는 뜻의 토계 시내 이름을

퇴계, 시냇가로 물러감이라 고치고 그 이름을

자기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황을 퇴계 이황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종은 이황의 재능때문에

다시 그를 불러 벼슬에 임명했고

이후에도 사표를 내나 또다시 불러집니다,,


이황은 결국 단양군수가 됬고

이황의 선정에 단양 백성들도 이런 사또는 처음봐서

서로 칭찬하며 그가 떠날때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옮겨갈때

단양 관청사람이 관아의 밭에서 거둔 삼단을 선물을 가져오자

이황은 꾸짖으며

관가의 물건은 나라의 재산임으로 받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황은 이후 풍기군수를 사직할때도 짐이라고는

책 두권이 전부였던 검소한 선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이황은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돌아와서

한서암이라는 책읽는 집을 짓고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이황>몸이 물러나 분수를 지키니 마음은 편안한데

학문이 뒤늦어 늘그막에 든 것을 걱정하네

시냇물 위에 비로고 서처를 정하고

흐르는 물 바라보며 날마다 뉘우치네


다시금 뒤늦게라도 학문에 집중하고 싶었던 이황이었고

다사다난하고 번잡했던 벼슬길에 있는것보다

고요하고 여유로운

한적한 시골생활을 더 좋아했던

대학자 이황이었습니다


이황에게는 많은 젊은 선비들이 몰려들었으므로

결국 이황은 도산 남쪽에 서원을 지어

도산 서당이라 지었고 이는 오늘날 도산서원이라 부릅니다


<도산서원>


이황은 당대에 아무도 따르지 못하는 대학자였음에도

항상 겸손하고 조심해서 사람들은 이에 더 그를 높게 여겨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들었습니다

이황은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가르치고 읽게했고

성현들의 말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황의 도산서당에는 당대의 젊은 선비로 이름났던 율곡 이이가 찾아와서

이황에게 가르침을 얻기도 했고

이황은 도산 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다

명종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여러 고위관직을 거치며

68세에는 대제학이 됬습니다

대제학은 임금곁에서 문장을 맡아 일을 처리하고

임금이 하는일을 돕는

학자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벼슬이 대제학이었습니다


그러다 이황은 69살이 되자

나이를 핑계로 물러나서 한양을 떠났고

30년여년간 이런저런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훌쩍 떠났던 그였습니다


이황은 벼슬자리에 있는것을 싫어했고

학문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69살의 이황은

성합십도라는 글을 조선 선조에게 바쳤는데

성학십도는 유학의 원리를 10폭정도로 요약해 쓴 글이고

이황의 평생의 학문이 요약, 응축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성합십도로 병풍을 만들게 해서 거실에 두고

그것을 본받으려 햇습니다


이황은 또다시 벼슬을 그만두려 했고

결국 그를 말리던 선조는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고

결국  이황은 다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가기전 이황은 선조에게

신하들과 바른길을 가는 법을 조언했과

선조는 이황이 고향으로 돌아갈때

식량과 탈 말을 주고 병사들을 시켜 호위하라 분부했고

고향에 편안히 돌아갔는지까지 안부도 물었습니다


잠시 다른 이황의 이야기도 해보면,,

이황에게는 유명한 가족사랑 일화가 있습니다

이황의 둘째아들은 결혼후 얼마후 세상을 떠나서

이황의 며느리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됬는데

이황은 딸같이 여겼던 둘째 며느리를 볼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느날은 이황이 바람을 쐬려 마당으로 나왔는데

며느리방에 불이 켜져있었고

홀로사는 며느리가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황은 고심끝에 방을 몰래 엿보았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외로움에 인형을 남편삼아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고

당시 재혼이 금기시되는 조선시대였기에

이황은 어찌할까 고민했습니다


<이황>아무리 법도와 관습이 중요하다지만

다 사람살자고 하는 일들인데,,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것은 도덕도 윤리도 아니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결국 이황은 사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황>며느리가 불쌍하니

데려가서 알아서 하시라


아무리 여성에 대한 재가가 금기시된 조선사회였지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은 며느리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고


결국 이황은 며느리를 처가로 돌려보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 유학자였던 그였음에도

정작 부조리한 관습과 형식에는 얽매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그가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며느리는 울면서 처가로 떠났습니다


어느날은 이황이 길을가다 어떤집에 머물렀는데

그집 부인이 차린 밥상이 이황이 좋아하는 밥상에

간도 이황의 입맛과 꼭맛아서

이황은 혹시 둘째며느리가 이집에 시집갔나 생각이 들었다고 하고

집주인은 떠나는 이황에게 밤새 부인이 만든 버선을 한켤레 주었다고 합니다

버선은 이황의 발에 편하게 잘맞아서

이황은 둘째 며느리가 이곳에 재가했다는 확신이 들며

이황은 안심하고 길을 나섰고

구석에 숨어서 그 모습을 본 한때 이황의 둘째며느리는

이황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황은 언제나 검소하고 초라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놀랬고

도산서원의 방넓이도 좁아서 조금씩 늘리다가

돈이 생기면 짓고 비용이 다하면 중단하곤 하며

초라한 서당이었다고 합니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이불을 정돈하고

세수하고 옷을 갖춰입던 이황은 세수할때도 질그릇을 썼고

엉성한 삼베옷을 입었고

나들이 할때도 칡으로 삼은 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들었다고 하고

아침 산책을 하고 향을 피우고 책상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하고

이황의 이런 모습은 죽을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그의 검소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는

이런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한양에서 정승인 좌의정 권철이 이황을 찾아오자

이황은 권철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반찬은

보리밥에 나물이 전부였습니다

실제 이황은 평생을 소화불량으로 고생해서

야채등의 소박한 식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권철>아 이건좀 ,, ;;


권철 역시 청렴한 재상이었음에도

권철은 식사를 들지못했습니다


<이황>백성들은 이보다 못한 밥을 먹고있답니다


권철은 돌아가면서 스스로 부끄러워서 반성했습니다

조선 재상 권철은

임진왜란때 행주대첩의 권율장군의 아버지이자

개구쟁이 꼬마소년 이항복의 재능을 알아보고

손녀사위로 삼은 인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황은 자식들에게도 검소한 생활과

학문의 길을 가야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황은 항상 가난에도 소박하고 부지런하게 살았고

그의 집은 항상 조용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이황은 제자들에게도 너라 하지 않고

자네 또는 그대라 불렀다 하고

평생을 남을 공경하며 웃어른은 물론

하인에게도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황은 깨끗하고 순박한 마음을 좋아했고

평생 선비를 상징하던 매화꽃을 좋아했습니다


1570년 70세가 된 이황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가족들과 제자들에게 여러 훈계를 내렸습니다


1570년 12월 8일

70세의 나이로 꼿꼿한 대선비 이황은 조용히 사망했습니다


조정에서도 이황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이황은 영의정에 추증됬고

3월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에 장사지냈습니다


이황은 관직생활을 하던 평생동안 53번의 사직서를 냈고

능력이 부족하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언제나 벼슬자리에서 욕심내지 않고 떠났고

항상 의로운 일에는 두려움없이

임금에게 조언하고 벼슬아치들을 비판했습니다


또 항상 벼슬자리에서 나오고 싶어하며 조용이 고향에서

학문연구에 힘쓰고 싶었던 그였고

항상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이황은 유교를 발전시키며 수많은 학자들을 길러냈고

한국의 큰 스승이자

중국과 일본에서도 조선의 주자라 불리며

공자, 노자나 송나라 주희를 주자라 하듯이

성뒤에 자를 붙여서 이자 李子 라고도 불렸고

퇴계 이황 그는 동방의 위대한 학자로 이름알려졌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지폐 1000원의 퇴계 이황>


<라봉봉>한국, 조선시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조선시대의 고리타분함 등에 조선시대와 유학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지만 정작 진정 학문을 추구했던 이황의 삶은

고리타분보다는 세련됨이 느껴집니다

특히 그의 가족사랑모습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할 훌륭한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평생을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려 했던 퇴계 이황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여러 사람들의 모범이 됬습니다


반응형

'어린이 개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가모니  (2) 2019.03.20
아이작 뉴턴  (2) 2019.03.19
백범 김구  (4) 2019.03.16
알프레드 노벨  (0) 2019.03.14
퀴리 부인  (2) 2019.03.12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