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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평생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힘쓰셨던

한국 민족지도자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의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김구의 어린시절 이름은 김창암입니다


<아기(김창암)>응애 ~ 응애 ~


<김창암의 아버지>아기가 체격이 크군,,


창암이는 어렸을때 마마라는 병을 앓아서

평생동안 그의 얼굴에는 굵은 마마자국이 남았습니다


창암이는 가난한 환경으로 태어났지만

몸집도 컸고 집안의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어느날은 엿장수가 창암이의 집 근처를 돌아다녔습니다


<엿장수>엿사려 ~ 고물을 가져오면 엿으로 바꿔주지롱 ~


엿이 먹고싶어진 창암이는

돈은 없었고 대신 아버지의 숟가락을 부셔서

그것으로 엿을 바꿔먹었습니다


바꿔먹은 엿은 너무 맛있고 달콤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숟가락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창암이 아버지>숟가락이 왜 부러져있지,,


창암이는 혼날까봐 무서웠지만

솔직하게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창암이를 혼내려다가도


<창암이 아버지>에혀 ,, 없는 형편이어서 그런지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구나,,


조용히 창암이를 타일렀습니다

창암이는 체격도 커서 많이 먹었고

아버지는 가난한 형편에 그랬던 창암이를 안쓰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창암이는 집안의 돈을 훔치는 등 계속 말썽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창암이는 어느날 글공부를 하고 싶다했습니다

아버지는 글공부를 해서 벼슬길에 나가려했던 창암이를 보고

기특히 여겨서 창암이가 글을 배울 수 있게 도왔습니다


창암이는 열심히 글공부를 해서

17살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과거시험을 보려했는데

결국 당시 과거시험은 실력이 아닌 돈과 인맥 , 연줄 등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김창암>이미 시험전부터 돈을 쓴자나

권력가 자제들로 합격자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군,,


그렇게 창암은 당시 부패했던 조선시대 말기 사회현실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창암이는 이름을 창수 , 김창수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 창수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한국의 종교인

동학에 가입했습니다


<동학교인들>동학에는 양반도 , 상놈도 없답니다

모두가 평등한 사람입니다


<김창수>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창수는 어렸을때부터 신분제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양반도, 상놈도 없다는 동학의 사상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19세에 창수는 동합 접주가 되서 수천명을 거느리고

부패한 양반을 혼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건달) 들에게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조선팔도 온나라가 이에 일본에 분노하고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다 김창수는 치하포 주막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을 발견했습니다


<김창수>저자는 분명 우리나라 국모(나라의 어머니 , 명성황후) 를

시해한 일본군일 것이다,, 시해한 자가 아닐지라도

칼을 찬 왜놈은 우리 민족의 독버섯이다


결국 김창수는 그 상인의 죽였고

그의 소지품을 뒤져보니

신분증에 이름은 쓰치다 조로이고

직위는 일본군 육군 중위였다고 하고

짐에서는 800냥이 나왔다고 합니다


<김창수>내가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 !


얼마후 창수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창수는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국모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 하며

당당했습니다

김창수는 이 일로 결국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김창수를 높이 여기며 옥에 갇힌 창수에게

음식을 보내주거나

여러 많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창수는 그것을 옥의 죄수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창수는 많은 조선인들이

글자를 모르는 등 무지등으로

죄인이 되어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김창수>우리민족이 이토록 일본에 당하는 이유는

글을 몰라서이다,,


그는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감옥안의 조선인 죄수들에게 글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김창수가 교수형(목이 메어죽는 형벌) 에 쳐해지려 한 날에

조선 고종황제는 명을 내려서

김창수의 사형을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중지하려 했던것이지

풀어준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결국 창수는 감옥을 탈출할 것을 계획합니다


창수의 감옥 교도관은 아편쟁이였고

창수는 교도관에게 몰래 아편을 주고

그가 아편에 취해있는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


탈옥한 김창수는

조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당시 김구는 잠시 머리를 깎고 스님도 됬다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이름도 창수에서 거북구 龜 자를 써서 구로 바꾸어서

김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김구는 교회에도 나갔고

교회에서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은 만났습니다

김구는 결국 조선의 독립에는 교육이 중요함을 깨닫고

아이들에게 역사,산수,지리 등 여러 신학문들을 가르쳤습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려고

강제적으로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맺었습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는 주권이 없음을 의미하고

곧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김구는 교회 사람들과 함께

을사조약을 반대하며 시위를 했으나

일본이 총칼로 저지하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김구는 다시금 힘없는 나라의 힘을 키우려면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조선인들 교육에 집중했고

일본은 이런 김구를 눈에 가시로 여겼습니다


그러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합니다

조선에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됬고

이에 김구는 독립운동단체 신민회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일제에 붙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김구는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나

굶기거나 일부로 잘해주는 척 하면서

끊임없이 한국인들의 조국 독립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김구>너희 왜놈들이 !

비록 내 육체는 빼앗을 지라도

대한독립을 향한 내 정신만은 빼앗지 못할것이다 !!!!!


김구는 그렇게 서대문 감옥에 갇혔습니다


서대문 감옥에 갇힌 김구에게 면회온 김구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구의 어머니>이 애미는

네가 (일제에 항거하다) 옥살이를 하는 것이

네가 경기 감사가 된 것보다 자랑스럽구나


이는 단순히 김구의 어머니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대 수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들은

아들, 딸이 일제에 맞서다 옥에 갇히거나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안 재산을 팔아서 아들 김구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김구는 옥에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김구>하나님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면

정부 건물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해보고 죽게하소서


그러다 김구의 형량이 줄어

1914년 7월 김구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출옥한 그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김구는 출옥후 일제 경찰의 감시속에서

조선 농민들을 일깨우는 일을 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3.1 만세운동을 일으켜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3.1 운동은 수많은 식민지배국에 영향을 끼친

전세계적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에 진압되었고

국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좀더 조직적으로 일제에 맞서려

임시정부를 조직하려 했고

일제의 영향이 없는

중국 상하이로 몰려들었습니다


김구 역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옛 동지들과 모여서 그당시 상하이에 조직됬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갔습니다


김구는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났습니다


<안창호>반갑습니다 김선생님의 명성은 이미 들은바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지요 ?


<김구>문지기일을 하고 싶습니다


안창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나라가 독립될 수 있다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할 수 있고

그 뜻을 이해한 안창호 선생은 김구에게

경무국장 자리를 맡겼습니다

경무국은 일본과 친일파들의 활동을 막고

독립운동가 동지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곳이었습니다


김구는 문지기같이 하찮은 일까지 하겠다는 그의 태도처럼

온갖 굳은 일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얼마후 아내와 어머니도 상하이로 건너왔습니다


1923년

김구는 48살에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됬습니다


1924년

김구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점점 재정이 나빠져서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자 임시정부 사람들은 김구에게

국무령(대통령) 직책을 맡겼습니다


<김구>시골뜨기인 제가 어떻게 그런 직책을 맡겠습니까 ?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재정난으로

전부 국무령 자리를 피하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마침내 어쩔 수 없이 김구는 국무령이 되었습니다


김구는 어려워진 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운영했고

위기를 타파하려고 1931년 일본인 암살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합니다


<김구>한인애국단의 기치는

한 사람을 죽여서

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김구는 홍보를 통해서 청년 단원을 모집했고

1931년 김구에게

이봉창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김구에게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힘쓰고 싶다 했지만

김구는 당시 일본어를 잘했던 이봉창이

혹시 일제가 보낸 사람이 아닌가 싶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봉창은 다시 찾아와서

임시정부 직원들에게 대들었습니다


<이봉창>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천황 하나도 못죽인단 말이오 ?


그때서야 김구는 이봉창과 가까히 지내면서

그를 신뢰했습니다


<이봉창>선생님 제 나이가 31살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결국 김구는 이봉창에게 일을 맡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해 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이봉창을 불러서 태극기 앞에서 이봉창에게 선서를 시키고

수류탄 두 개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김구>폭탄 하나는 일본천황을 죽일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동지가 자살하기 위한 것이오


그렇게 이봉창은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태극기 앞에서 이봉창 의사>


김구는 한창의 젊은이를 죽음으로 보내야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김구>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이봉창>김구 선생님 ㅎㅎ

걱정하지 마십시요

저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가는것이니

슬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ㅎㅎ


오히려 김구를 위로한 이봉창이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도쿄 거리로 가서 일본 천황이 탄 마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

마차 여러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나

어느 마차가 일본 천황의 마차인지 몰랐습니다

두번째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수류탄은 일본 천황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곧 체포됬고 일제에 의해 사형당해 순국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김구가 이를 시켰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어느날은

윤봉길이라는 젊은 야채장수가 김구를 찾아왔습니다

윤봉길 역시 이봉창같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김구와 계획을 세웠습니다


<윤봉길>김구 선생님

저를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주십쇼


마침 일본군 대장은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행사를 하려했고

김구는 윤봉길을 이때 보내서 일본군 대장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태극기 앞에서 윤봉길 의사>


마침내 4월 29일이 되었습니다

김구는 윤봉길과 같이 아침밥을 먹었습니다

윤봉길은 이 식사가 자신의 마지막 식사임을 알고

김구에게 말했습니다


<윤봉길>김구 선생님 이 시계는 6원에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요

제 시계는 앞으로 몇시간 밖에 쓸 수가 없으니까요


김구는 침울하게 그와 시계를 교환했습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시계>


김구는 윤봉길에게 물통과

도시락모양으로 된 폭탄을 주었습니다

일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후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만 가져오게 제한했고

이에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은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윤봉길은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대장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힘껏 던졌습니다

일본군 대장과 일본군 고위 인사들이 폭탄에 죽었습니다


윤봉길은 자결용 폭탄을 터트리지 못한 채

곧 일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그곳에서 일제 경찰들에게 엄청나게

구타 당하며 얼굴이 피로 멍들면서도

윤봉길은 목이 터져라


<윤봉길>대한독립 만세 ! 대한독립 만세 !


를 외쳤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24세의 나이로 일제의 총에 맞고 순국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제는 큰 두려움에 떨었고

세계는 한민족이 독립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김구는 다른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위해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김구>나 김구가 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을 시켜

일왕 저격사건과 상하이 홍커우 사건을 일으킨 것일 뿐

다른 조선 기관이나 조선인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자 일제는 김구에게 현상금을 크게 높혔습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역시 일제에 맞서고 있었던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였던 장제스 역시

감탄하며


<장제스>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 용사 1명이 해냈다 !


라고 말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은 재정난에 빠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지원으로 한국 청년들은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점차 독립의 꿈을

현실화 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또 이해에 김구의 어머니가 중국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김구에게 어머니 곽낙원은 어머니이자

자신의 생일잔치에 쓸 돈으로

총 두자루를 사서 김구에게 주었던 독립군 동지였습니다

김구는 어머니가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하시고

아들 뒷바라지만 하다 사망하신 것에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러다 중일전쟁때 중국이 계속 일제에 패전하자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독립적인 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구는 결국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군대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광복은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로

광복군은 빛을 되찾는 군대 , 일제에 뺏겨버린 주권을 되찾는

대한민국의 독립군을 의미합니다


한국 광복군의 규모는 200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중국과 연합하면서 여러 활약을 했습니다


그당시 일제는 미국의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해서

2차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전국민을 전쟁터로 보내거나 전쟁에 동원시키는 등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지역에서도 일제에 전쟁무기로 쓰일 쇠붙이 등을 수탈당하거나

사람들은 위안부, 징용 , 일제의 총알받이로

끌려가는 등 당시 일제는 미쳐 날뛰고 있었습니다


김구는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인 영국, 미국등과 연합해서

한국인들의 일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연합군에

일제의 약점을 제공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김구는 광복군으로 한국국내로 쳐들어가는 훈련을 받게하며

한국을 독립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본토에 2개의 핵폭탄을 떨어트렸고

궁지에 몰린 일본은 결국

1945년 8월 15일 미국에 무조건 항복합니다

이날 일제는 패망하고 한국은 일본에게 독립을 했습니다


김구는 너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 광복군의 힘이 아닌

미국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김구는 11월 23일

임시정부 사람들과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고국을 떠난지 27년만에 어느새 71살의 나이로 노인이 되서

한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된 한국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습니다

국내에서는 사상이 다른 좌파와 우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또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한국을 남북으로 갈라서

남쪽은 미국 , 북쪽은 소련이 다스리기로 했고

이에 한국인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김구 역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힘썼습니다


<김구>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되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김구는 1948년 4월 38선을 넘어서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방문해서

북한 지도자였던 김일성과 만나서 회담을 합니다


<38선을 넘는 김구일행>


김구의 의도는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김구의 의도와 달리 김구의 명성을

이용하려 했고 김구의 북한 방문은 실패로 끝나고

김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한국은 북쪽을 제외한 남쪽만의 총선거를 했고

나라가 두동강 난채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에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던 김구는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러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는 김구를 찾아왔습니다

안두희는 김구에게 총을 쐈습니다


백범 김구는

그렇게 안두희의 총에 맞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백범 김구의 나이 74세였습니다


이후 안두희는 풀려나서 호의호식을 하다가

김구 선생의 죽음에 분노하셨던

운전기사였던 평범한 소시민 박기서씨에게

몽둥이를 맞고 사망합니다,,


백범 김구는 평생을 대한민국의 독립에 힘썼던

독립운동가이자 지도자이자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 애썼던 인물이었고

온 국민들은 백범 김구의 죽음에

한결같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구 나의소원>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라봉봉>백범 김구선생님의 호 백범은

'평범한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애국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담겨있다고 하고

평생을 한국의 독립에 힘쓰셨던 한국사의 위인

백범 김구 선생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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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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