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왕조는 진나라였습니다

진나라는 제자백가 사상중 '법가' 를 받아들여

엄격한 법으로 부국강병을 실현했고

주변 나라들을 정복했는데 당시 사용한 진나라의 전술이

원교근공 遠交近攻 이었습니다

원교근공은 먼나라와 친하고 가까운나라를 쳐서 점차 영토를 넓히는 방식이었고

이외에도 진나라는 국색이 검정색이어서 군복이 모두 검은색이었다거나

강력한 석궁무기 등이 있어서 당대 진나라 군사들의 분위기는

공포스러움과 기괴한 모습을 상대를 위축시켜 제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의 중국통일

 

진시황은 주변 중국 전국시대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했는데 이전 호칭이었던 '진왕' 보다 더 높은 호칭을 칭하려 생각했고

'황제' 라는 칭호를 만들었고 이에 첫번째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을 '진시황제' , '진시황' 라 부릅니다

 

진시황제

 

진시황제는 통일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중국을 통일하고나서 넓어진 제국을 통치하려

화폐나 서체(글자체) , 도량형 등을 통일했고

역시 이전과 같이 법가를 국가 주요이념으로 삼아 엄격한 정책을 폈고

통일 이전 진나라 실정에 맞게 설계되어 있던 엄격한 진나라의 법은

통일 이후 넓어진 영토의 정복지 백성들의 실정과는 달라 백성들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에 신음합니다

 

이외에도 진나라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로 인해

영지를 기반으로 제후들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현제를 실시합니다

 

봉건제가 왕은 수도에 있고 혈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삼아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방식이었다면

군현제는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서

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들이 가서 다스리는 통치방식이었습니다

 

또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북방의 이민족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지역교류를 원할히 하려 운하를 파기도 하고

자신의 거대한 궁전인 아방궁과 자신의 죽은뒤 묻힐 묘인 진시황릉을 건설하기도 했고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들로 수십만의 백성들이 동원되고 공사중에 죽어갔고

법가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진시황은 다른 사상에 대한 탄압을 해서

분서갱유를 일으켜서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제자백가서적 , 유학책, 역사책 등을

모두 태워버리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했습니다

이런 가혹한 진시황의 통치에 민심은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만리장성 , 만리장성은 이후 중국의 주요 국경 최후의 요충지 개념화 되었습니다

 

아방궁 , 아방궁은 사치와 향락스러운 집의 비유적 표현이 됬습니다

 

분서갱유 , 당대 책은 종이 발명전이라 대나무 묶음인 죽간이었고 책을 태우고 유학자들은 생매장됬습니다

 

또 진시황은 중국통일과 여러 개혁이후에 영원히 사는 것 , 불로불사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했고 먹으면 영원히 산다는 풀인 '불로초' 를 구해오라고

수많은 돈을 탕진한다거나 먼 외국에 사람을 파견하기도 했고

한국 제주도에도 불로초를 찾기 위해 서복이라는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진시황에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 했고

그럴때마다 진시황은 의심없이 자금을 내주었고

그뒤로 불로초를 찾으러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고도 하고

영생에 대한 집착으로 오래살려고 수은까지 먹다가

수은중독으로 겨우 50세에 사망했습니다,,

 

진시황의 죽음 이후부터

진나라 백성들의 민심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진시황은 죽을때 총명한 아들이었던 태자 부소를

후계자로 지정했지만 조고라는 환관(내시) 과 이사라는 인물이

권력에서 밀려날것을 두려워해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진시황의 18번째 아들 호해를 진나라 2대왕 , 진나라 2세황제로 옹립했고

호해는 조고에게 정치를 맡기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습니다,,

 

결국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부터 가혹한 정책들에 지방 세력들이 다시 일어나고

멸망이 가속화 되어 중국을 통일했음에도 15년만에 단명하는 왕조가 됬습니다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 농민 반란인

'진승과 오광의 난' 인데

그전까지는 그저 제후, 귀족들의 치고받고 하는 반란이 대부분이었다면

진승과 오광의 난은 중국사 최초의 농민반란이라 합니다

 

진시황 사후에도 진나라의 가혹한 법은 유지됬고

진승과 오광이라는 농민은 부역에 소집되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되서 공사지로 향하게 됬는데

도중에 큰 비가 내려 도로가 무너져서

도저히 예정된 기일까지 공사지에 도착할 수 없었고

융통성이 없었던 진나라법에 의하면 늦게 도착하면 곧 사형이기에

궁지에 몰린 진승과 오광은

늦게가서 죽으나 반란을 일으키다 죽으나 어짜피 죽는것은 마찬가지라 생각했고

당시 진승과 오광은 농민무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승과 오광>너희는 비를 만났으므로 모두 기한을 어기게 되었다

기한을 어기면 마땅히 죽음을 당해야 한다

만약 죽임을 면한다 해도 변방을 지키다 죽는 사람이

본래 10명 가운에 6, 7명에 달한다

하물며 남아로 태어나 쉽게 죽지 않는다 했는데 

만약 죽으려면 세상에 커다란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소 ?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진승과 오광의 난

 

이라 말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미 진나라에 등돌린 민심에 힘입어 크게 세력을 확대합니다

특히나 여기서 진승과 오광이 말한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는 중국역사의 명대사로 ' 왕후장상 영유종호 王侯將相寧有種乎 '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퍼져서

한국 고려시대 노비봉기인 '만적의 난' 당시에도

만적이 이 말을 말했고 한국고전소설 홍길동전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됬습니다

 

그렇게 진승과 오광은 민심을 힘입어 큰 세력을 떨쳤지만

그러나 그래도 아직은 오랜 정복전쟁으로

군사경험이 풍부했던 진나라 군사들에게 진압됬고

대신 진승 ,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진에게 멸망한 육국의 후예들이

점차 자신의 세력을 키워 진에 대항하며 일어났고

초한지의 배경이 되는 한나라의 백수건달 유방과

초나라의 귀족 항우가 맞서는 초한전쟁기가 시작됩니다

 

<라봉봉>진나라와 진시황대 이야기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등장이라는 배경과 더불어

상당히 고전적인 개념, 사건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후 진시황이 지정한 '황제' 라는 표현은

중국의 왕을 뜻하는 표현이 되었고

서양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쥴리어스 시저)의 이름이

'카이사르' , '카이저' 즉 황제라는 뜻이 됬듯이

비슷한 느낌입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