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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부지방에는 금나라 , 남쪽지방에는 송나라(남송) 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을 당시

그보다 더 북부지방의 몽골지방에서는 테무진이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예수게이'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인데

타타르 부족에 피살당했고

테무진은 도망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며 성장하게 됩니다

 

테무진은 부하들과 함께 통일전쟁을 벌여서 흩어진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고

몽골 대족장회의 '쿠릴타이' 를 열어서

'칭기즈 칸' 자리에 오릅니다

 

칭기즈 칸

 

이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 테무진 대신

그를 징기스칸 , 칭기즈 칸 등으로 부르게 됬고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건국 배후에는

그의 용맹한 8명의 부하

'사준사구 四駿四狗' 가 있었는데

사준사구는 4마리의 준마(말) 와 4마리의 충견(개) 라는

뜻입니다

 

칭기즈칸은 몽골통일 이후

몽골 문자를 제작하게 했고

또 이 몽골문자로 몽골 역사책을 집필하게 했는데

이 역사책을 '원조비사' 라고 합니다

 

몽골 문자

 

칭기즈칸은 법을 제정하고

몽골 내의 악습 등을 폐지하며 몽골을 개혁했고

이를 바탕으로 통합된 몽골인들은

남쪽지방 등과 교역하려 했으나

충돌이 발생해 몽골인들의 정복전쟁이 시작됬다고 합니다 ,,

 

칭기즈칸은 서하를 정복하고 이후 금나라를 정복합니다

(금나라의 완전멸망은 징기스칸 사후)

당시 금에 멸망해 금에 원한이 있었던 거란인들은 몽골에 적극 협조했고

이당시 칭기즈칸은 실무와 정치 , 행정에 능한 거란인 '야율초재' 라는 인물을

등용하게 됬고 징기즈칸은 금나라 정복후 그곳 농민(중국인)들은 전부 죽이고

그곳을 말키우는 방목지로 만들려다가 야율초재에 조언에 그만두고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야율초재

 

야율초재는 한자를 잘 모르고 문서행정등에 약한

몽골인들을 대신해 몽골제국의 기틀을 잡았다고 하고

세금제도가 없었던 몽골인이었기에 야율초재가 세금을 거두어주자

몽골인들은 갑자기 막대한 부가 들어오는 것에 놀라

계속해서 세금을 엄청나게 거뒀다고도 합니다,,

 

이후에도 칭기즈칸은 비단길(실크로드) 지역의 서요와

중동지방의 호라즘 등도 공격해 정복했고

조그만한 소부족에 불과했던 몽골부족은

칭기즈칸대에 이르러 중동지역과 동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칭기즈칸은 서하를 정복하고

얼마후 사망하는데 그의 뒤를 이은 몽골제국의 후계자들은

이후에도 금 , 남송 , 중동 , 동유럽 등을 정복해서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했고

나라이름을 '원' 이라 했습니다

 

원(몽골제국) 의 영역

 

몽골제국이 단기간에 크게 팽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효율적인 유목민적 기풍 이외에도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은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타고 생활했기에

자연히 기병이 되었고 가볍게 무장한 몽골기병은 우수한 기동력 등으로

하루 70km를 달렸다 하고

한명의 몽골기병은 여러마리의 말들을 데리고 다니며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갈아탔다고 합니다

또 몽골인들은 이동식 , 텐트형 집인 '게르' 에서 생활했습니다

이에 몽골인들은 초원을 넘나들며 여러나라들을 정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기병

 

이동식 집 '게르'

 

원나라의 수도는 대도 , 오늘날 북경이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몽골제국이 운영됬으며

넓어진 영토로 동서 무역로가 단일 무역로로 개편되자

먼 지역의 영토까지 말들을 바꿔탈 수 있고 숙박소로도 이용되는

'역참제' 라는 시스템을 이용해 원나라의 넓은 행정구역이 관리되었습니다

 

당시 원나라를 찾은 서양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폴로' 는

원나라의 거대한 부와 문화에 놀랐고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가

'동방견문록' 이라는 기록을 남겨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을

넓혀주었습니다

 

마르코폴로

 

몽골인, 원나라인들은 다른 정복왕조들과 달리 중국인들을 엄격하게 차별했고

원나라에는 4등급의 신분제가 존재했습니다

 

가장 고위신분은 인구가 가장 적었던 '몽골인' 들로

주요 관직을 독점했고

 

서역인, 유럽인들 같이 같은 재정 , 행정에 밝은 출신들은

'색목인' 으로 분류되서

중국 민족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준 지배계층으로 우대받았습니다

 

세번째로는 중국 북방 금나라지역의 중국인들로

이들은 '한인' 으로 불리며

지배받았고

 

네번째 최하위 계급으로는 가장 인구가 많았지만

몽골에 오랫동안 저항했던 남송인들로

'남인' 이라 불리며 피지배층이 되었습니다

 

<원나라 신분과 인구>

1) 몽골인 : 100만명

 

2) 색목인 : 100만명

 

3) 한인 : 1000만명

 

4) 남인 : 6000만명

 

원나라의 신분구조

 

원나라는 이런 신분제 이외에도

평소 상업을 중시했기에

칭기즈칸은 정복전쟁 당시에도 이슬람상인들의

상행위를 보장해줬기에 우수한 기동력 이외에도

이슬람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빠른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고

상업을 중시했던 대표적인 원나라의 화폐로는

지폐화폐인 '교초' 가 있습니다

 

원나라 화폐 '교초'

 

이외에도 원나라는 종교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하고

이에 다양한 종교가 발달했는데

원나라 황실에서는 특히 티베트 승려들을 중시해서

라마교(티베트 불교) 가 원나라의 국교화 됬습니다

 

또 원나라인들은 몽골문자 제작 이후에 '파스파 문자' 라는

표음문자가 개발되었습니다

 

파스파 문자

 

이외에도 몽골제국은 서민문화가 발달해

희곡 , 잡극(연극)들이 유행했는데

당시 원나라는 유목적 기풍이 우대받고

문인들이 차별되고 과거제가 폐지된 시기였기에

(원나라 후기 과거제는 다시 생깁니다)

문인들은 희곡에 몰두하며 여러 문학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원나라 시기 나온 대표적인 중국 문학으로는

원나라 말기 ~ 명나라 초기에 쓰인

'나관중' 이라는 인물이 쓴 '삼국지 연의' 가 원제목인

유명한 중국 고전소설 소설 '삼국지' 가 이시기에 나옵니다

 

삼국지 소설을 쓴 '나관중'

 

그러나 원나라는 후기에 황위쟁탈전이 격렬하게 일어났고

민족차별 정책 등으로 분열하다가

중국인들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 으로

멸망하고 원래 있었던 북방의 초원으로 다시 쫒겨나게 됩니다

당시 홍건적들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에 홍건적이라 불렸습니다

 

결국 '홍건적의 난' 을 이끈 중국 지도자 '주원장' 이라는 인물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모처럼만에 중국에는 다시 정통 한인(중국인) 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라봉봉>몽골제국 시기 당시 한국 고려나 일본 , 베트남 , 인도 , 유럽 등 여러 국가들이

몽골제국에 맞서 침략을 저지하기도 했고

몽골제국 , 원나라 시기는 동양의 중세시대 격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원나라의 풍습이었던 변발과 양꼬치 요리 등이

알게 모르게 이후에도 전파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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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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