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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후기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선이 무너지면 곧 명나라까지 위험해 질 수 있었기에

명나라는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며 지원합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지원등으로 변방이었던 만주지역을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만주지역의 여진족 중 '누르하치' 라는 인물이 나타나 여진족을 통합하고 

금나라를 건국하는데 이전 여진족들이 세운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금' 이라 합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군대를 편성했는데

8가지 색의 깃발로 구분하는 군사를 조직했고

이를 '팔기군' 이라 합니다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아이신기오로는 성)

 

팔기군

 

이후 누르하치는 명나라 전투를 했는데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사용했던 서양식 신식 무기 '홍이포' 라는 대포에 맞아

부상으로 누르하치는 사망하고 (혹은 패배의 후유증으로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은 누르하치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부족명을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고치고

청나라의 태종 홍타이지는

나라 이름을 불을 상징하는 명나라의 명 明 과 반대되는

물을 상징하는 '청 淸 ' 으로 고치고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 을 일으킵니다

 

청나라 국기

 

병자호란을 일으킨 이유는 청나라는 조선과 명의 우호적 관계를 주시하고 있었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조선들 제압해 놔야 후방이 안정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조선 국왕 인조에게 항복을 받는 '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과 군신관계를 확립합니다

 

삼전도의 굴욕 , 청태종에게 무릎꿇는 조선인조

 

이보다 전에 명나라에서는 명나라의 멸망을 알린 농민반란

'이자성의 난' 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으로 명나라 수도 북경, 자금성은 이자성군에게 함락되고

궁지에 몰린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나무에 목을 메서 자살하고

명나라는 멸망합니다

 

회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숭정제

 

이 틈을 타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했고

당시 만리장성 최동단이자 중국의 관문이었던 요충지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 라는

명나라 장수는 애첩이 이자성군에게 뺏겨서

이자성이 아닌 청나라 군에 투항해서 청의 중국 진입을 돕습니다

그렇게 청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자금성을 함락시키고 중국 내부로 들어와

이자성의 난을 종결시키고 중국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됬습니다

이후 오삼계는 청나라에 의해 토사구팽(이용하다가 숙청) 당했고

명나라인이었던 해적 '정성공' 이라는 인물은

'반청복명' 의 기치로 대만섬(타이완)에서 명나라 부흥운동을 했는데

정성공 사후 흐지부지됩니다

 

정성공

 

이후 청나라에는 강희제라는 명군이 등장하는데

대만을 정복하고 러시아와 국경조약 '네르친스크 조약' 을 맺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백과사전 '강희자전' 을 편찬합니다

 

네르친스크 조약

 

그 다음황제 옹정제라는 명군은

세금제도 '지정은제'를 확립했고 지정은제는 세금을

은으로 내게하는 제도입니다

또 그다음에는 건륭제라는 명군도 등장해

건륭제는 몽골과 티베트 등을 정복해 국토를 크게 넓혔고

건륭제 시기 '홍루몽' 이라는 중국 고전소설이 쓰여졌습니다

 

청나라 영토

 

이렇게 청나라는 초기부터 누르하치부터 시작해

여러 명군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특히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이 라인은

청나라 전성기 시대라 이야기되며

이 시기를 '강건성세' 라 부릅니다

 

그렇게 청나라는 중국의 새왕조로 일어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니다

청나라의 시대가 시작됬고

청나라는 정복왕조였기에 중국인들인 한족들에게 '한화' 되지 않으려 했고

청나라인 만주족들은 중국인 한족들에게

자신들의 풍습인 '변발' 을 강요하고

그들의 '중화사상 (중국[한족] 중심 사상)' 을 탄압합니다

 

변발하는 청나라인들

 

대신 소수의 만주인들이 다수의 한인을 강압적으로만 통치할 수는 없었고

회유책으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세금을 줄여줬고

또 관리 채용시에도 만주인과 한인들을 1 : 1 비율로 뽑았는데

이를 '만한병용제' 라고 합니다

 

청나라는 유목민적 특유의 실용적인 기풍이 강한 나라였고

'고증학' 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는데

고증학은 탁상공론이나 두루뭉술한 담론을 펼치는 학문이 아니라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학문이었고

또 청나라대에는 백과사전 격인 '사고전서' 가 발간되어

중국의 여러 문헌들이 보존됬는데

대신 청황실의 강경책으로 '문자의 옥' 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황실을 은근히 비판하면 처벌한다거나

한인들의 명나라 부흥운동 조짐이나 중화사상 등을 탄압하며

사상 탄압 , 정신 통제를 하려 합니다

또 청나라에서는 '금서령' 이 있어 금지된 책을 읽지 못했고

이런 이유들로 학문의 현실비판, 자유성들이 상실되서 고전을 근거로

실증적 연구에 집중하는

고증학이 발달한 또다른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이외에도 청황실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극진히 예우하며

티베트 불교를 믿는 티베트 , 몽골 지방을 안정시키려 했고

유럽 세계와도 교류하며 유럽에 도자기 , 비단 , 차 등의 중극 특산물들을 팔아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됬습니다

청나라와 교류했던 대표적인 유럽인은

독일 출신 예수회 신부 '아담 샬' 이라는 인물로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와서 청나라시기 까지

중국에 서양 역법과 천문학을 알린 인물입니다

 

아담 샬

 

<라봉봉>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와의 왕조 교체기 기간 사이동안에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 되고 있고

인구도 적은 만주족들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명군들 +

명나라인(한인) 들의 계손되는 분열 등으로

기존 정복왕조들보다 손쉽게 중국을 장악하고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대신 이는 청황실의 불행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결국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족은 점차 시대의 흐름에

전성기 이후부터 서구 열강의 도전에 

'종이 호랑이' 혹은 '잠자는 사자' 로 불리며

점차 중국인들은 청나라의 마지막 번영을 마지막으로

잠속에 빠지고 말았다는 비유같은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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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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