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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부잣집 아들 정환이]

[머리를 깎다]

[천도교와의 인연]

[청년구락부와 독립운동]

[어린이 운동]

[어린이날]

[어린이]

[일제의 감시]

<라봉봉>

 

소파 방정환

 

[부잣집 아들 정환이]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현재 서울 종로) 에서

태어났습니다

 

방정환의 할아버지는 야주개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쌀가게) 을 운영했는데

이에 방정환은 9살때까지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방정환의 집은 큰 기왓집 한채도 부족해서 두 집을 사서 이어붙여 만들었다 합니다

 

이로인해 방정환은 지역유지 , 부잣집 아들로서

어릴때는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들어가

엿 , 과자 ,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간식을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주었기 때문에

콩고물을 얻기위한 동네 아이들은 항상 정환이를 따라다녔습니다

또 그럴때마다 가게 주인은 방정환의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갔습니다

 

[머리를 깎다]

7세때 방정환은 할아버지에게 한학 , 한문을 배웠습니다

 

옛날 서당의 댕기머리 소년들

 

한문공부하던 방정환은

이 해에 신식학교 보성소학교를 다니는 삼촌을 따라 학교에 놀러갔습니다

 

교실 엿보던 정환이에게

보성소학교 교장 김중환 선생님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김중환>정환이가 학교다니고 싶구나

하지만 학교를 다니려면 댕기를 자르고 머리깎아야된단다 ^^

 

그때 정환이는 할아버지를 생각했으나

학교를 다니고 싶어

머리를 깎겠다 말했습니다

 

정환이가 머리를 깎고 들어오자

할어버지는 천자문만 하면 되는데 서양공부는 왜하냐며

처음엔 화가나서 정환이를 때렸지만

결국 신식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정환이의 뜻을 존중했고

방정환은 열심히 학교를 다녔습니다

 

소년시절 방정환

 

정환이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10살때 소학교 친구들과

방에 모여 뜻있는 모임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다가

'소년입지회' 라는 모임을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정환이는 동화구연회 ,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정환이 집안은 사업실패로 가난해져서

조그만한 초가집으로 이사하게 됬고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져서

결국 자퇴합니다

 

[천도교와의 인연]

1915년 

17세의 방정환은

일제강점기 시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해서 서류필사 업무를 했는데

일을 하며 독서에 힘쓴 방정환이었으나

 

이 토지조사국이 조선인들의 토지를 수탈하는 기관이었기에

결국 방정환은 곧 사직하고

민족 종교였던 천도교(동학에서 발전한 종교) 청년회 , 천도교 소년회에 들어가

천도교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천도교청년회원들과 방정환 , 가운데

 

1917년

19세의 방정환은

천도교인의 중매로

천도교 3대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딸과 결혼합니다

 

3.1운동 민족대표 손병희

 

한국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손병희 선생은 방정환을 처음보고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결혼한 해 방정환의 어머니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청년구락부와 독립운동]

방정환은 이후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학교) 에 입학했고

'경성청년구락부(구락부=클럽의 옛날 한국식 표현)' 를 조직해서

젊은 청소년들의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1919년 21세의 방정환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인쇄해서 돌리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을 받다가 일주일만에 풀려났고

이로인해 일제에 독립해야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어린이 운동]

점차 방정환은 한국이 일제에 독립하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린이 운동에 힘써야 함을 느꼈고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합니다

 

어린아이들 좋아했던 방정환은

'천도 소년회' 를 조직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순회강연합니다

 

<방정환>어린 아이들에게도 인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

 

방정환은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

어린아이들을 존중해야 할 것을 강연했는데

당시 어른들은 방정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거나

애새끼라 불리는 등 어린아이에 대한 인권이 없다싶이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

 

[어린이날]

방정환은 1922년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 로 선포하고

 

<어린이날 노래>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아이들에게 책읽히는게 필요하다 생각해서

아이들을 위해 외국 동화책을 엮어

'사랑의 선물' 이라는 세계명작동화집을 펴냈습니다

 

사랑의 선물 , 방정환 재단

 

사랑의 선물에는

안데르센 , 오스카 와일드 등

세계적인 위대한 아동문학작가들의 동화들이 담겨있었고

방정환은 한국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주고 싶었습니다

 

그전까지 어린 아이들은 딱히 부르는 표현이 없고

아이 , 아기 , 애 , 애새끼 , 새끼 등

여러 표현 , 비하적 표현으로 불렸지만

방정환은 어린 아이들을 존중하자며

'어린이' 라는 말을 최초로 부르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1904년 광화문 해태상위에서 놀고있는 한국 어린이들

 

[어린이]

방정환의 호는

소파 小波 인데

작은 물결이라는 뜻으로서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방정환>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어린이문학 , 어린이들이 즐길 문화가 없다.

나는 조선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써야겠다.

 

1923년 방정환은 아이들만을 위한

순수아동잡지 '어린이' 를 창간하고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 를 조직합니다

 

색동회 회원들과 , 가운데 방정환

 

잡지 '어린이'와 어린이날

 

<1923년 5월 1일 방정환>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조선 민중들은 여유가 없어 독서를 사치로 여길정도로 여겼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동화로

어린이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잡지를 광고했고

수많은 문학가들이 어린이에 작품을 투고하며

한국의 아동문학계가 발전합니다

 

방정환은 소년 , 어린이 운동에 힘쓰며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인격 배양 , 독립의식 고취 ,

민족 계몽을 위해

어린이 잡지 편집에 힘썼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해 외국의 유명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

어린이등 아동잡지에 실었고

그가 번역한 세계아동문학은

 

'선량 , 정직 , 노력 , 권선징악 , 어린이 인권'

 

등의 숭고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문학작품들이었습니다

 

[일제의 감시]

방정환의 독립운동 전력과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이 독립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안

일본은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늘 감시했는데

사복차림으로 몰래 방정환의 어린이 연설을 듣던 일본 경찰은

방정환의 뛰어나고 의로운 연설에 오히려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도 합니다

 

<방정환의 어린이 찬미>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 !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항상 방정환을 감시하던 일제 고등계형사는

방정환의 눈물나는 동화구연등에 상당히 괴로워했고

방정환의 강연을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나왔기에

위인을 감시하는 것에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옥중의 안중근을 감시한 일본간수 지바 도시치와 비슷)

 

<일제 형사 미와 와사부로>방정환이라는 놈 ,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야인시대의 두한이 형님을 괴롭히는 '그새끼' 로 나오는 미와 와사부로 , 방정환 안창호 김구 김좌진 김두한 윤동주 이봉창 등 수많은 한국위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악명이 높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 ,

잡지사의 재정난 , 소년운동 진열의 분열 ,

과로와 스트레스 , 비만으로

방정환은 건강이 급속도록 나빠졌고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서울대 병원) 에 옮겨졌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1931년 7월 23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실에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정도로

밝은 성격의 방정환은

마지막까지 어린이를 생각하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방정환의 유언>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

 

소파 방정환 동상

 

<라봉봉>한국 어린이들에게 생일만한 특급이벤트 날은

어린이 날이었고

우리들에게 항상 어린이날은 재밌는날 , 선물받는 날이라는

행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이날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님의 시대는

어린이 인권은 커녕 온 민족이 수탈받는 한국사 최악의 시대였는데

그러한 와중에서도 소중히 피워낸 꽃같이

 

어린이 사랑을 남기고 돌아가신 한국사의 큰 위인입니다

 

당시 한국은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며

근대사상까지 수용하던 시기였고

서양의 클럽문화(춤추는 야밤의 클럽이 아니라

영국인들은 모임문화인 '클럽' 을 만드는 것을

되게 좋아합니다) , 출판문화 , 어린이문화들이 들어왔는데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들을 위하는것이

일제에 맞서 한민족이 독립을 이뤄내는 것이라 깊게 생각하신 분이고

어린이들의 위인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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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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