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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

[고아원의 소녀]

[코코 샤넬]

[사교계에 들어가다]

[첫사랑 , 아서 카펠]

[코르셋을 없애다]

[카펠의 죽음]

[샤넬 No.5]

[예술과들과의 교류]

[리틀 블랙 드레스]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

[뉴룩의 유행]

[샤넬의 복귀]

[핸드백과 샤넬 슈트]

<라봉봉>

 

코코 샤넬

 

[고아원의 소녀]

가브리엘 샤넬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시장을 떠돌던

장돌뱅이로서

시골장터 누비며 물건을 파는 인물이었고

 

샤넬의 아버지는 난폭하고 방랑벽이 있어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습니다

 

샤넬은 그게 싫었으나

피는 못속이는지 샤넬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방랑벽이 평생 따라다닙니다

 

샤넬의 어머니는 5명의 자식을 낳고

30대에 결핵으로 사망했고

이때 샤넬의 나이 12세였습니다

 

다섯자식이 부담스러운 아버지는

샤넬을 프랑스 오바진 지방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샤넬은 평생 아버지를 사랑했고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성공한 포도주 사업가라 거짓말을 쳤습니다

 

어린 샤넬이 맡겨진

오바진 수녀원은 엄격한 수녀들의 생활 및

온통 검정과 하양으로만 이뤄진 숨막힌 곳이었고

이곳에서 샤넬은 수녀원의 건물 , 기하학무늬와

검정과 흰색이라는 단순한 색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또 샤넬 브랜드의

C자가 반대로 겹친 로고는

어릴적 햇빛에 비친

수녀원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샤넬 로고에 영향을 준 오바진 교회의 무늬

 

샤넬은 오바진 수녀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수녀들에게 직업훈련으로 바느질을 교육받았는데

재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의상디자이너를 꿈꾸게 된

샤넬은 죽기전까지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직접 모델의 의상을 살피는 샤넬

 

슬슬 성장한 샤넬은 이후 고아원에 나와서

생마리 의상실의 보조 재봉사로 일했습니다

 

이때부터 영화 , 대하소설 같은 샤넬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코코 샤넬]

보조 재봉사로 일하게 된 샤넬이었지만

박봉이어서 생계유지가 되지 않았고

결국 자유분방했던 그녀는

술집 카바레 밤무대에서 무명가수로 노래를 불랐습니다

 

그녀가 카바레 밤무대에서 즐겨부르던 노래가

'코코리코 , '누가 코코를 보았나요 ?' 였는데

코코리코는 프랑스어로 닭이 우는 '꼬꼬댁' 을 뜻합니다

 

(꼬꼬 샤넬ㅋ)

 

이에 흥겨워진 사람들은 샤넬의 별명을 코코라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샤넬은 원래 이름이 가브리엘 샤넬이었지만

이때부터 이름이 코코샤넬이 되었습니다

 

평생 그녀의 이름이자 트레이드 마크가 된 코코 Coco

 

코코 샤넬은 이후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음에도

가난한 카바레 가수시절 얻게된 코코라는 애칭을 싫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평생 코코라 불리게되었습니다

 

<샤넬 명언>난 내삶을 창조했다. 이전의 삶이 싫었기 때문에

 

[사교계에 들어가다]

샤넬은 백옥같은 피부와

매혹적이고 강렬한 검은 눈동자 , 검은 머리로 남성들을 한눈에 사로잡았고

25세에 샤넬은 술집에서 부유한 상속자이자 고급 기병장교였던 에티엔 발장을 만나

애인이 되어 그의 저택에서 살게되었습니다

 

에티엔 발장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사며 상류 사교계에 소개시켰고

처음으로 일에 바삐 쫓기지 않던 그녀는

한가로운 저택생활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이내 곧 상류층의 한가로운 잉여생활이 지루해지게 됩니다

 

샤넬은 발장의 애인으로

상류층 사교계에 참여했는데

에티엔 발장 주변에는 주로 돈많고 할일없는 부유층 자제들이 많았고

샤넬은 처음으로 상류층 사회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흙수저임을 숨기던 이 미스터리한 여인은

유창한 언변과 빼어난 손재주로 상류층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에티엔 발장은 승마를 좋아했는데

야심만만한 처녀 샤넬은

여자가 치마를 입고 승마하던시절

홀로 바지를 입고 나타나 상류층 사람들을 놀라게했습니다

 

말덕후였던 에티엔 발장(가운데) 과 바지를 입은 샤넬

 

그러다 샤넬은 홀로 모자를 디자인 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은

온갖 장식을 단 무거운 모자를 쓰고 다녔고

아예 모자 위에 과일을 달거나

너무 무거운 장식을 달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샤넬이 등장하기 전 20세기 초 유럽 여성들의 모자

 

자신이 디자인한 심플한 모자를 쓴 샤넬

 

샤넬은 발장의 저택에서 이런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한

가볍고 우아한 모자를 디자인하며 유명해졌고

사교계 여성들에게 자신이 만든 모자를 선물해줬는데

모자는 매우 예쁘고 실용적이었기에

입소문이 퍼져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결국 여배우와 부유층 여성들은

다들 샤넬에게 모자를 선물받고 싶어했고

샤넬은 결국 모자가게를 열기를 결심했습니다

 

[첫사랑 , 아서 카펠]

당시 샤넬은 발장의 친구였던 몹시 잘생긴 영국신사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졌고

카펠은 낭만적인 신사였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Boy 소년) , 보이 카펠이라 불렸던 인물입니다

 

코코샤넬과 에티엔 발장 , 그리고 아서 카펠(맨 오른쪽)

 

샤넬은 발장에게 모자가게를 열겠다는 생각을 말했고

발장은 반대했습니다

 

결국 샤넬은 발장과 이별하고

샤넬은 새로운 남자친구 카펠의 도움을 받아 (;;)

1910년 파리 캉봉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 라는

모자가게를 내며 패션 브랜드 '샤넬' 이 시작됩니다

 

카펠과 샤넬

 

샤넬 매장

 

샤넬의 첫사랑이자 영국 출신 사업가였던

아서 카펠은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후원해주었습니다

 

이 둘의 사랑이 참 안타까운게

둘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의지했지만

도중에 바람을 피거나 다른 이와 결혼을 하다

결국 카펠의 사망으로

올바른 연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카펠은 이해타산적인 사업가였지만

자신이 지원한 샤넬의 가게만큼은 간섭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샤넬의 운영을 존중해주었고

 

또 카펠은

직관은 강했지만 다방면의 교양 , 지식이 부족했던 샤넬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기위해

가급적 전문적인 이야기는 피하고

샤넬의 직관력 같은 장점을 칭찬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를 통해 샤넬은 자신도 몰랐던 장점과 자신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훗날 샤넬>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존재를 만난 것이다

 

카펠의 도움으로 모자 가게를 연 샤넬은 처음엔 블랙을 기본으로 한

소박한 모자를 판매했고

패션피플들에게는 빈곤해 보인다 외면받았고

심지어 샤넬 가게의 첫 손님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유행은 알수 없는 것이었고

점차 파리 여인들은 샤넬의 패션에 홀리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유명 여배우

가브리엘 오르지아는 샤넬 모자의 열성팬이었습니다

 

샤넬의 패션 철학은 단순하고 실용적이고 편안하면서

우아함을 잃지않는 스타일이었고

혁명가였던 샤넬은 여성의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을 제거하고

실용적인 원피스를 선보였습니다

 

<샤넬 명언>일부러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왜 한가지 방식으로만 해야 하고 ,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당시까지 온갖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옷입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프랑스 여성들에게

이것은 혁명이었고 억압적 관습에서 해방이었습니다

 

<샤넬 명언>편하지 않으면 럭셔리가 아니다

 

[코르셋을 없애다]

이후 샤넬은

1913년 노르망디 휴양도시 도빌에서

새로운 부티크(프랑스어 : 값비싼 옷이나 선물을 파는 가게) 를 열어

모자뿐만 아닌 옷까지 만들었고

 

샤넬의 도빌 부티크

 

여성의 몸을 옥죄던 코르셋을 제거하고

주렁주렁 길었던 치마는 무릎까지 짧게 잘라냈고

머리카락은 소년같이 짧게 자릅니다

 

샤넬의 옷은 당시 파격이었고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랑스에서 그녀의 옷은 혹평을 받았지만

유럽 각지에서 휴양지 도빌에 몰려든 수많은 부자들은

그녀의 옷의 독특한 매력에 매료되고

그녀의 옷 , '샤넬룩' 은 전 유럽의 유행을 이끌어

샤넬은 성공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지금보기엔 당연한 여성 사회인들의 옷이 된

'샤넬 룩' 이었지만

여성들이 발까지 꽁꽁가린 무거운 옷을 입고다니던 시대에

샤넬룩의 등장은 파격적인 것이었고

처음엔 많은 여성들이 거부했지만

 

1914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져

남성들이 전쟁터에 나가자

남겨진 여성들은 농사 ,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처음으로 사회인이 되었고

 

당시부터 샤넬의 간결한 옷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입어야 하는 옷이 되어버립니다

 

19세기 유럽 여성들이 가슴과 엉덩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입은 '코르셋' , 코르셋으로 인한 신체기형이나 심한경우 사망에까지 이르렀다합니다

 

19세기 유럽여성의 복식

 

1910~20년대부터 여성의 사회진출과 함께 퍼진 '샤넬룩'

 

1920년대 단발머리를 한 샤넬

 

[카펠의 죽음]

카펠의 도움으로

사업적 성공을 거둔 샤넬이었지만

카펠은 결국 다른 여인과 결혼을 했고

곧 1919년 카펠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샤넬>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카펠을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

 

카펠은 애인인 동시에 나의 오라버니였고

나의 아버지였고 나의 가족이었다

 

카펠은 샤넬에게 처음 가게를 열수있게 도와준 장본인이며

사업 방법을 알려준 인물이었고

한때 결혼을 확신했던 인물이 사망하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샤넬은 이후에도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젊은시절 낙태수술을 받느라 불임이 되서

후계자를 원하던 공작과 결혼도 하지 못했고

이후부터 샤넬은 죽을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88살까지 연애만 하다 죽습니다

 

카펠 사후 샤넬은 피카소와 염문을 뿌리고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후손 드미트리 대공 ,

영국 대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도 사귀었고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사귈때

영국에서 영국의 위대한 총리

'윈스턴 처칠' 과도 인연을 맺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샤넬

 

샤넬과 처칠 , 쎈캐와 쎈캐의 만남

 

불우한 과거를 숨기던 그녀는

항상 신비주의를 유지했고

강렬한 눈빛 수줍은듯하며 자신감있는 미소의 그녀는

독설과 직설적인 재담 등 온갖 말을 남겼습니다

 

처음 카펠이 사망할 당시

샤넬의 나이는 36세였고

샤넬은 충격을 받고 은둔생활을 하고

방을 온통 검정색으로 바꾸었습니다

 

샤넬은 고통을 잊기위해서 일에 매달렸고

워커홀릭이 되었습니다

 

<동료에게 샤넬이 한말>너무나 상심해 있는 날, 

이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없다고 생각될 때 

언제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당신의 친구… 

그건 바로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

 

[샤넬 No.5]

1919년 조향사 에레네스트 보는 샤넬을 위로하려고

최초의 인공향 향수 '샤넬 No.5' 를 개발합니다

 

샤넬 No.5

 

이름 뜻은 보가 만든 향수 10가지중에서

5번째를 샤넬이 택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었고

샤넬은 '샤넬 No.5' 를

'뉘메로 생크' 라 불렀습니다

 

이는 결핍된 여성 샤넬을 상징하는 향수였고

향수는 개발 2년뒤 대중들에게 공개됩니다

No.5 는 미국에서 팔리며 점차 전세계로 뻗어나가며

꽃향과 조화된 이 인공향수는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연예인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한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기자>당신은 잘때 무엇을 입고 잡니까 ?

 

이에 마릴린 먼로는

 

<마릴린 먼로>샤넬 No.5

 

라고 대답합니다

 

마릴린 먼로는 잘때 잠옷이 아닌

벌거벗은 알몸에 샤넬 No.5 향수를 뿌리고 잔다는

뇌쇄적인 발언을 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마릴린 먼로와 샤넬 No.5

 

[예술과들과의 교류]

샤넬의 첫사랑 카펠은 독서를 좋아했던 인물이라

생전에 샤넬에게 수학 , 과학 , 역사 , 철학 등의 책을 권했늗네

샤넬은 카펠이 살아있을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

카펠의 죽음 뒤 카펠의 결핍을 카펠이 남긴 책을 읽는 것으로 채워갔습니다

 

독서하는 아서 카펠

 

특히 샤넬은 책속에서 주체적인 왕비의 이야기나

혁명적 여성성에 깊이 공감했고 (페미니즘의 시초)

 

이후 샤넬은

파블로 피카소 , 살바도르 달리 등 여러 예술가 , 작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예술활동을 후원했습니다

 

샤넬과 피카소

 

[리틀 블랙 드레스]

샤넬은 1926년

당시까지만 해도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색이자

하인들의 옷에나 쓰였던

검정색을 옷에 집어넣어서

샤넬은 올블랙 드레스인 '리틀 블랙 드레스 (Little Black Dress)' 를 출시했습니다

 

리틀 블랙드레스를 입은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는 우아한 복식으로

프랑스 여성들의 유니폼 , 국민복이 되었고

 

당시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포드가

도색염료를 아끼고 포드 자동차 판매가격을 낮추기 위해

오직 검정색으로된 자동차를 내놓아 자동차를 대중화시키고 있었기에

 

같은해 패션잡지 보그(Vogue) 지에는

이 블랙 드레스를

 

'샤넬의 포드(Chanel’s Ford)'

 

라 불렀습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샤넬은

1935년 4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캉봉가에 5개의 빌딩을 소유할만큼 커졌지만

점차 프랑스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며

1939년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샤넬은 몇몇 점포만 남긴채 가게를 모두 정리하고 프랑스 패션계를 떠났습니다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

그러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개전 6주만에 독일군에 항복하고

샤넬의 조국 프랑스는 독일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나치에게 함락된 파리

 

애국자가 넘쳐났던 프랑스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무기를 들고 독일군에 맞서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며 투쟁하고 있었고

 

레지스탕스 , 프랑스의 의병들

 

그시기의 샤넬은

나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샤넬은 독일장교의 비호아래

전쟁중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하였고

 

그러다 1944년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 ,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시켰습니다

 

프랑스인들은 그동안 나치에 협력했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숙청 , 처형했는데

 

샤넬은

프랑스에서

 

'나치스에 프랑스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

 

라는 비난을 받으며

나치 장교를 애인으로 둔 죄로 반역자 신세를 받고 조사를 받게 됩니다

실제 그녀는 나치 스파이 활동도 했다 합니다

 

그러나 샤넬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도움으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었고

 

당시 샤넬은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 항변했지만

프랑스와 애국시민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시선은 싸늘했고

 

결국 샤넬은 프랑스를 떠나

애인과 함께 스위스 로잔으로 망명해

객지생활을 시작합니다

 

[뉴룩의 유행]

그런데 샤넬이 패션계에서 은퇴하고

스위스에서 잠수타는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기괴한 패션들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샤넬은 평생동안 여성들을 옥죄이는 옷과 싸운 인물이었는데

샤넬이 프랑스를 떠난 사이에

남성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디올)는

여성에게 필요한 실용적 옷이 아닌

남성의 눈에 괜찮아 보이는 옷 , '뉴룩' 을 만들었고

 

샤넬이 싫어한 것만 모아놓은 '뉴룩' , 코르셋과 하이힐의 부활

 

다시 여성의 몸을 옥죄이는 옷들이 유행하자

샤넬은 디올에게

 

'반동(반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샤넬의 복귀]

이런 것들을 극혐하던 샤넬 장군은

결국 반동을 진압하기 위해

가게의 문을 닫은지

15년만에 객지생활끝내고

1954년 71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컴백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샤넬의 2차대전 당시의 행실때문에

샤넬 혐오감이 엄청나있었고

샤넬의 나치 부역혐의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혼란에 빠졌고

그런 와중 샤넬은 묵묵히 패션쇼를 준비합니다

 

당시는 한창 코르셋이 다시 부활하며

젊은 여인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샤넬은 나이든 의사사모님이나 사업가 사모님들이나 입는

덜떨어진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54년 샤넬은 패션계에 돌아오며

'샤넬 컬렉션' 을 선보였는데

샤넬의 패션쇼는

수많은 샤넬 골수팬들이 모여 조용히 치뤄졌고

샤넬은 항상 패션쇼가 열릴때마다

자신의 계단 위에 지긋이 앉아서 그것을 구경했습니다

 

모델의 옷을 점검하는 샤넬

 

계단에 앉아 내려보고 있는 샤넬

 

내려오며 전신을 볼 수 있는 샤넬의 거울계단

 

프랑스 언론들은 그녀의 컬렉션이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혹평을 쏟아냈지만

실용주의 나라이자 한창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던

미국에서는 샤넬에게

 

'패션의 혁명' 이라는 평을 하며

샤넬을 환영했고

할리우드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을 애용했고

샤넬은 부활하며 다시 패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핸드백과 샤넬 슈트]

1955년 샤넬은

2.55 핸드백(1955년 2월에 만들어서 2.55 , 샤넬백) 과

이전 만든 군복에서 영감을 받은 트위드 재킷(샤넬 슈트)을 재발표하며

패션계에 또다시 혁명을 일으켰고

2.55 백에는 체인 끈을 달아

여성들의 양손을 핸드백에서 해방시킵니다

 

'샤넬백' 으로 유명한 2.55백

 

'할머니옷' 으로도 유명한 '샤넬 슈트'

 

샤넬은 1955년 미국에서

과거 50년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디자이너로

'모드 오스카상' 을 수여받습니다

 

<샤넬 명언>내가 바로 스타일이다 (짐이 곧 국가다의 샤넬버전)

 

샤넬은 평생동안 일과 사랑에만 매달렸습니다

샤넬은 일요일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휴일에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여서 였습니다

 

공교롭게도 1971년 1월 10일 일요일에

88세를 일기로 샤넬은 파리 리츠호텔에서 사망했습니다

 

샤넬은 프랑스 배반혐의로

프랑스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했고

망명 생활을 했던 스위스 로잔에 매장됩니다

 

패션 혁명가였던 코코 샤넬이 20세기 여성에게 남긴것은

 

'자유'

 

였고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세기(20세기) 에서는 프랑스에서 세 이름만 남을 것이다

 

드골 , 피카소

그리고

가브리엘 샤넬'

 

<샤넬 명언>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샤넬은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절제미를 보이는

옷을 만들고 현대 여성의 옷을 새롭게 만들었고

 

남자의 전유물로만 입은 바지를 여자가 입게했고

불편한 모자장식을 제거하고

코르셋을 없애고 검은 옷을 선보이고

향수를 만들고

가방에 끈을 달고

주머니달린 슈트를 만들고

때가 금방타는 신발 앞에 검정칠을 했던 인물이고

 

샤넬의 창의성은 전세계로 널리 알려져

샤넬은 전세계 패션인들에게 최고의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샤넬 브랜드

 

샤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코코 샤넬 (Coco Before Chanel, 2009)'

 

<라봉봉>옛날에는 정치인 , 과학자 , 발명가 , 군인 등의

위주로만 어린이 위인전이 있었는데

요즘은 운동선수 , 연예인 등 다양한 인물들까지 위인전이 나오는 추세이고

샤넬 역시 최근들어 어린이 위인전이 생겨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샤넬은 패션계에서는 뛰어난 위인이지만

여자로서 , 사회인으로서는 문제와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고

극우 , 스파이 인물로 유명하며

이런 모습은 항상 경계해야할 모습이고

 

이 사람은 저의 이상형은 아니지만

매력이 너무 강해서

자칫 빨려들어갈 수가 있는데 (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지 ?)

 

워낙 파란만장 , 대하소설 , 영화같은 인생을 산 인물이기에

수많은 찐따들이 '쿨찐병'에 걸리듯이

여자들도 자신의 인생에 샤넬을 빙의시키는 '샤넬병' 같은게 있다 생각되고

 

하여튼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가 된 샤넬 브랜드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패션계에서는 여성들의 수명을 연장시킨

엄청나게 뛰어난 업적을 세운 인물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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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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