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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조선) 은 일제(일본) 에 외교권을 뺏겼는데

외교권에는 국경문제(간도) 등도 포함되어 있기에

외교권 강탈은 곧 주권 상실을 의미했고

대한제국이 외국에 설치한 공사관들도

일제에 5달러라는 푼돈에 매각되거나 양도되는

국가적 치욕도 겪었습니다

 

광무황제(고종) 은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반발해

미국과 영국에도 도움을 요구했지만

이미 미국은 이전 일본과

'가쓰라 테프트 밀약' 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

일본은 대한제국을 먹기로 합의했고

당시 동양의 대세 역시 서구열강들이 중국에서의 이익 확대 및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을 택했기에

결국 광무황제는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 외교적 상황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광무황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목숨을 걸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런 '만국평화회의' 에

이준 , 이상설 , 이위종을 몰래 '헤이그 특사(밀사)' 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습니다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광무황제가 헤이그특사들에게 당부한 말>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광무황제[고종] 역시 무능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한국의 황제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일제에 끝까지 반발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는

말이 평화회의였지 실상은

강대국들의 땅따먹기 및 친목 도모회였기에

고생끝에 헤이그에 간

헤이그 특사들은 만국 평화회의 입장이 거절됬고

헤이그 특사 이상설은 회의장에 나가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상설>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헤이그에 특사로 갔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홧병 혹은 병등으로 호텔에서 이준 열사는 사망하셨고

독립운동가를 하다 친일파로 변절한 장지연은

그의 죽음을 높이기 위해

그가 분개해서 할복자살했다고 조작해서 썼고

하여튼 광무황제가 몰래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의 흉계를 세계에 알리려 한 것을 알게된 이토 히로부미는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중이라 생각했지만

광무황제의 반발에 깜짝 놀라 원래보다 대한제국 병합을 서두르게 됬고

이토는 친일매국노 이완용 , 송병준에게 광무황제를 퇴위시키라 압박하게 했고

이완용과 송병준은 광무황제의 전화선을 끊고 광무황제를 고립시키고

친일단체 '일진회' 를 앞세워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고

1907년 그의 아들 순종 , 융희황제를 즉위시켜버렸습니다

(말이 황제지 일제의 허수아비)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융희황제)'

 

단 융희황제(순종) 즉위식날 반일단체 동우회 회원들은

이완용 자택으로 몰려가 이완용 집에 불을 질렀고

이완용의 전재산이 거의 모두 불탔고

그의 조상 신주(죽은사람 이름 , 관직들을 적은 나무조각)까지

다 불태워졌고

성난 군중들은

 

<성난 군중들>매국노(이완용) 의 일족들을 잡아죽여라 !

 

라 고함쳤고

이에 이완용의 가족들은 그들에 쫓겨 몸만 피했고

대한제국 백성들은 광무황제의 억울한 퇴위에 대한 분노 , 반발의 화살을

일제와 이완용에게 쏘았습니다

 

집에 불이 날 동안에도 이완용은 자기 집에 불난지도 모르고

융희황제 즉위식을 관리하고 있었고

뒤늦게 '이완용을 죽여라' 라 외치는 함성소리에

사태를 깨달았고 이완용 일가는 겨우 이토의 보호로 살아나고

이후에도 친일 , 매국행위에 앞장섰지만 결국 이토는

안중근의사의 총에 맞고 사망하고

이완용은 이토 장례식에 침통한 표정으로 참석하고

안중근을 조선인의 이름으로

맹렬히 비난했는데

이토 사망 2달정도 후 군밤장수로 위장하고 있던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덮쳐 그를 칼로 찔렀고

이완용은 칼에 폐가 관통됬지만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고

이재명 의사는 일제순사에 잡혀 교수형에 쳐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완용은 이후에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계속 매국행위에 앞장섰고

대신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은 이후부터 얻은 폐병으로 평생 고통스럽게 살다

이 질병으로 사망하게 됬습니다

 

(가끔 '주는데로 돌려받는다' 는 말이 생각나는데

조선을 정복하려 했던 이토는 안중근의사의 총에 바로 죽었고

야비하게 매국 , 자국민을 팔았던 이완용은

칼을 맞은 휴유증으로 평생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됬습니다 ,,)

 

하여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광무황제도 강제퇴위시켜버린 일제는

아예 대한제국을 합병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시키게했고

순종황제(융희황제) 가 즉위하고 12일 뒤

일제는 융희황제로 하여금

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했습니다

(실제로는 융희황제의 조칙을 이완용과 이토가 위조했다 합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당시 일본군에 무장해제 당하는 대한제국군 , 일제는 중무장한 군인들로 대한제국 군인들을 둘러싸고 즉석에서 한사람 한사람씩 계급장을 떼게 했다 합니다

 

결국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수도 한양(서울) 에서부터

군대해산이 시작됬고

대한제국 마지막 보루였던 군대마저 해산됬습니다 (대한제국군은

광무황제의 노력으로

신식화되서 나름 일제의 위협이었음)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군대해산을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장교들을 집합시키자

대한제국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소령)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병영에 머물러 있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분노해 권총자결했습니다

 

<박승환 참령>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박승환 참령은 이전에도 광무황제가 강제퇴위할때

대한제국 군대를 이끌고 일제를 공격하려 했지만

광무황제에게 피해가 갈까봐 중지한 인물이었던 인물이고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박승환 참령 뿐만 아닌 많은 대한제국군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박승환 참령

 

박승환 참령 자결 이후

결국 분노해 일어난 대한제국 시위대 2개 대대는 일본군과 시가전

'남대문 전투' 를 벌였지만 일제의 압도적인 화력에

결국 패전했습니다

 

박승환 참령의 자살순국과 대한제국군의 봉기를 그린 민족기록화 , 출처 : 박승환의 자살순국 - 박기태(1976)

 

그러나 남대문 전투 이후에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반발해

전국적으로 의병(정미의병)이 일어났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군대해산에 반발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식무기들을 가지고 탈영해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에 참가해

의병들의 전투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한국 의병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유명한 '정미의병' 사진 , 가운데쪽 대한제국 육군제복을 입은 의병도 보입니다

 

남부에서는 이강년 , 신돌석이

북부에서는 홍범도 , 안중근 같은 인사들이 활발히 의병활동을 벌였으며

이에 이후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장군' 이라고도 불립니다

 

남부지역 의병인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

 

북부지방 의병인 홍범도 장군

 

하여튼 이 해(1907 정미년)에 의병활동은 대한제국군의 합류에 더욱 격렬했고

전국 의병들이 모두 모여 서울로 진공하자는 '13도 창의군' 이 생겨났습니다

 

1908년 초에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이 펼쳐졌지만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진공작전을 앞두고 아버지가 별세하자

아버지 제사를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고,,

일제의 압도적인 전력앞에 실패로 돌아가 13도 창의군은 해체되

전국에 흩어져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이에 일제는 대한제국 합병을 확실히 하려

의병세력을 한국에서 뿌리뽑으려 했고

또 일본은 대한제국 남부의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 을 실시해

특히 가장 강렬하고 활발한 의병활동이 있었던

대한제국 곡창지대 호남지방(전라도) 지방의 민간인들의 의병 지원을 차단하게 하고

민간인들을 탄압 , 학살하며 의병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잡히면

해당 마을을 초토화 시켜 호남지역 민간인들은 이후부터

의병을 지원하거나 숨겨주는 것을 기피하게 됬고

호남 지역 및 한국 전체 지역은 삼엄한 일제의 감시 및

일제의 계속된 공격으로 의병세력들은 근거지를 상실해가며

결국 만주나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군' 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남한대토벌 작전 등으로

한반도 내에서 일제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던 의병 및 군사조직이 붕괴하자

일제는 드디어 대한제국을 완전히 합병하려 했고

1910년(경술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는 '한일병합조약' 으로

융희황제의 서명도 받지 않고

대한제국 총리 이완용과 일제의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협의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게했고

많은 한국인들은 이 사건을 경술년의 나라의 치욕이라 해서

'경술국치'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 경술국치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유명하나 실제로는 1915년에 찍었다 합니다

 

경술국치(1910)부터 일제의 2차 세계대전 패전(1945)까지 한국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라 불리게 되었고

자그마치 35년간의 치욕스럽고 지옥같은 한국사의 시작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최근들어 아가씨 , 미스터 선샤인 , 사의찬미 등

일제강점기가 낭만적으로 그려진 드라마 , 영화들이 우후죽순 나온거 같은데

물론 그런 영화나 드라마들이 일제강점기를 좋은시기라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뭔가 제가 어릴적 혹은 실제로 책에서 보고 배운 역사와는 다르고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그런 큰 거부감 같은게 듭니다

 

굳이 일제강점기 시기 '낭만' 과 가까운 인물이라면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 , 천재시인이라 불리는 이상 , 윤동주 같은 류의

삶에 대한 철학과 고민 , 깊은 무게가 있는 낭만이 생각나는데

요즘 나오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대한 낭만은 뭔가 알수없는 억지산파 및

억지감동 , 억지사랑과 미화 , 판타지가 점철된 느낌이라 별로 좋아하지도 , 배경도 엉터리느낌이라

시청률이 높던 수익이 어떻던 재밌다는 말에도 별로 공감도 안되고

뭔가 역사에 대한 진실함과 진정성이 빠진 느낌이라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

(일제미화가 아닌 그시대 자체를 뭔가 역사에 어긋나게 이상하게 미화시키는 느낌)

 

하여튼 제가 어릴적에는 일제강점기를 매우 비극적이고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시기로

배웠고 그것이 일본에 대한 반발심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사료이자

실제 일제에 당하거나 일제강점기를 겪은 분들도 많이 살아계셨기에

진정 가슴에서 나온 분노감이었고

치욕감을 배웠는데 점차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들이 하나둘 사망해가는 오늘날에

이상한 일제강점기 드라마 , 영화들이 제작되는 것에 대한 역겨움같은게 있고

(사실 영화 '군함도' 도 마찬가지 , 까려면 제대로 까던가,,)

 

물론 영화 드라마작가들이 저보다 극이나 어문학능력은 우수하다 생각되나

제발 사극같은거 만들때는 역사공부좀 제대로 하고 만들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기 이전부터

잔인하고 추악한 방법을 동원하는 등 여러 만행을 일삼았고

매우 잔인하고 어두웠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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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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