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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갑신정변 이후 영향력이 커진 청나라는

이전에는 조선과 사대외교를 하며 형식적인 황제와 제후국 사이였다면

갑신정변 이후부터는 거의 총독정치급으로 노골적으로 조선내정에 간섭했고

많은 조선 이권들을 수탈하려 했습니다

 

그 기간동안 고종은 외국 문물들을 수입한다거나 했지만

내부 개혁보다는 위태로워진 왕실의 비자금 축적에 집중했고

그러한 기간동안 민심은 곯을대로 곯아

결국 1894년(고종 31년) 에는 '동학 농민운동' 이 일어났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조선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지역은

당연 호남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였던 '전라도' 였는데

대신 그만큼 관리의 토색질(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하는 짓) 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라서

관청에는 쌀이 쌓여가나 백성들은 항상 굶주려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먹거리를 찾아다녔고

 

전라도는 탐관오리들이 가장 들끓었던 지역인데

전라도 고부지역에서는 고부군수 조병갑이

부임하자마자 농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걷었고

본인의 어머니가 죽자 2000냥을 거둬오라는 요구를 했고

이에 동학접주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조병갑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습니다

 

또 조병갑은 백성들에게 돈을 거둬

자신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고

백성들을 동원해 '만석보' 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사용료를 받는등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일삼았고

논밭에서 농사를 지어도 절반은 지주에게 나머지는 조병갑에게 바쳐야했던

고부 농민들은 그해 먹을 곡식이 없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 외 고부 농민들은 1894년

죽창과 몽둥이 , 낫 등의 농기구나 무기들을 들고

고부 관아를 습격했고

조병갑은 도망쳐서 고부관아는 함락됬습니다

 

항상 관리들의 수탈아래 억눌려 울분을 참고 지냈던 백성들은

전봉준의 지휘아래 들고 일어나게 되었고

 

고부 관아가 함락됬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백성 , 농민들은

그에게 몰려들었고

이런 노래가 퍼졌습니다

 

<전봉준에게 가는 농민의 노래>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1894년은 갑오년이어서 가보세로 ,

1895년은 을미년이어서 을미적으로 ,

1896년은 병신년이어서 병신으로 표현한

언어유희적 농민가로서

 

당대에는 관리들의 수탈이외에도

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 등 여러 외부적 불안요소도 많았던 시기라

농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 세상을 만들지 못하면

영영 부패한 조선 봉건정부와 외세의 침략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조선 백성들의 절박한 심정을 담은 노래였습니다

 

결국 조선정부에서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안핵사' 직에 이용태를 임명해 고부에 보냈지만

이용태는 오히려 동학교도와 백성들을 탄압했고

이에 전봉준은 1894년 각 지역 동학접주들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 김개남 등과 농민 1만명을 모아

'동학 농민 운동' 을 일으켰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지도

 

전봉준은 체격은 작았으나 다부지고 뛰어난 농민 지도자였고

이에 사람들은 그를 작은 알맹이 곡식인 '녹두'를 따와

'녹두장군 전봉준' 이라 불렀습니다

 

전봉준은 농민들과 전라도에서 가장 큰 지역이었던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과 '전주 화약' 을 맺어 잠시 화친했지만

동학농민군의 거대한 규모에 놀란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던 상황이었고

이에 이전 '톈진 조약' 에 따라 일본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의 혼란속에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이권을 두고 조선땅안에서 '청일전쟁' 을 벌였고

전쟁터가 된 조선은 양 세력의 전쟁속에 파괴됬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봉준은

처음엔 탐관오리의 횡포에 일어났는데

이번엔 외세의 간섭에 맞서 다시 동학농민군을 모았고

농민군은 서울로 북진했지만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같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죽창이나 조총같은 재래식 무기로 맞서다

학살당했고

이후에도 전봉준은 다시 군사를 모아 재기하려했지만

부하의 배반으로 체포되 도성으로 압송되

교수형으로 사형당했습니다

 

우금치전투 민족기록화 (홍경래의 난 기록화라고도 하는데 농민의 분노를 담고 있는 그림 같습니다)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이 찍힌 그를 담고있는 유일한 사진

 

그의 반봉건 , 반외세 정신은 이후에도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 정신으로

계승되었고 전봉준은 농민지도자였기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도 정확하게 전해오지는 않지만

그의 죽음에 그를 그리워 하던 조선 백성들에게는 이런 노래만이

퍼져나갔을 뿐입니다

 

<조선 백성들의 노래>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당시 일본군복이 파랑색이었기에

일본군을 뜻하고

녹두밭과 녹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녹두꽃이 떨어지면 운다는 청포장수는

조선 백성과 민중을 상징하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는 한국의 유명한 민중 노래가 되었습니다

 

동학 농민운동과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녹두꽃' , 출처 : SBS 금토 드라마 녹두꽃 (2019) Mung Bean Flower

 

결국 한국사의 반외세 , 반봉건 운동이었던 동학농민운동이

외국군에게 처참하게 진압되버렸고

당시 일본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은 반봉건적 내정개혁을 실시하게 되었고

일본의 후원을 받는 김홍집 , 어윤중 등의 개혁파들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1894~1896)' 을 실시하는데

갑오개혁 내용에는

가장 먼저 오랫동안의 한국사의 악습이었던

노비제와 신분제가 폐지됬고 (국왕 제외)

도량형 통일 , 화폐개혁 , 재정개혁 , 과부의 재가 허용 , 조혼(어린나이에 결혼) 금지

, 과거제 폐지 , 연좌제(죄인의 가족까지 죄를 묻는 것) 폐지 등

여러 근대식 개혁들이 시작됬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적으로 심화했는데

청나라의 패배에 위기를 느낀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는 러시아가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되서 이번엔 러시아를 끌여들였고

독일과 미국에도 구조 요청을 했는데

독일은 별 힘을 못썼고 미국은 조선이 구조요청하는 틈을타

조선 금광만을 꿀꺽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황후의 정치개입을 금지시켰는데

일본은 고종으로 하여금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 '홍범 14조' 를 발표하게 했고

한편 고종은 러시아와 접촉하며

 

<고종>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 뿐이다

 

라며 러시아에 붙어버렸습니다

 

고종이 일본에 계속 반발을 보이자

조선 내부에서도 여러 분열이 일어나

친일 내각은 실각됬고

점차 조선이 러시아에 붙어버리며 '다된 밥' 이 러시아에게

넘어갈거 같은 낌새를 확인한

일본은 결국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를 시켜

일본 낭인(건달) 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하게 했고

 

일본은 일부로 만약의 외교분쟁사태에 대비해 일본군인이 아닌

일본 깡패 , 민간인 (농민 , 잡상인 , 약장수 , 교사 , 무직)들을 조선 정궁 경복궁에 보냈는데

당시 일본의 작전 암호명은 명성황후를 여우에 빗대어서

'여우사냥'

이라 했습니다 (한국사에서 작전 암호명이 유명한 사례로는

을미사변 '여우사냥' 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화려한 휴가' 가 있습니다)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 민씨'

 

일본 건달들은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군 친위대를 박살내고

닥치는대로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명성황후의 행방을 캐물으며

마구 구타를 가했고

태자비 민씨(순명효황후) 는 복부를 일본 건달들에게 가격당해

병상에 누워지내다 세상을 떠났고

조선 왕태자였던 순종 역시 일본 건달들에게 머리채를 잡힙니다 ,,

 

일본 건달들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냈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건달들을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에 건달들에 두 팔이 잘려나갔고

명성황후는 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건달들에 끌려나온 뒤 새벽 6시쯤 건달들의 칼에 맞고 사망했고

 

미우라 고로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명성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 한 뒤

건달들에게 증거를 인멸하라며

시체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건달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에 가서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태워버렸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된 드라마 '명성황후' , 명성황후 미화가 심한 드라마였지만 성악가 조수미의 ost '나 가거든' 은 크게 유명해졌고 결국 당시 작가나 한국사회에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힘약한 나라의 설움' 이라 할 수 있었고 드라마는 비참한 시대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 출처 : KBS 2TV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 (2001) 明成皇后 / The Last Empress

 

미우라 고로는 이후 고종을 만나 협박해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했는데

명성황후가 시해된 혼란속에서

일단 유길준 중심으로 을미개혁이 실시됬는데

 

을미개혁은 갑오개혁에 이어 중요한 내용들이 담긴

조선 말기 근대식 개혁으로서

 

'종두법 시행' , '단발령(머리[상투]를 짧게 자게 함) 시행' ,

'소학교 설치' , '양력(그동안 조선에서는 음력을 썼음)의 채용'

 

등 여러 중요내용들을 담고 있었지만

명성황후의 시해에 분노한 백성과 조선 유생들은 들고 일어났고

특히 단발령은 조선인들의 많은 반발을 받았는데

'신체발부 수지부모' 라고

사람의 신체와 털은 부모에게서 받은것이니

손상시키지 않는게 효도라는 유교적 효사상에

어긋나는게 서양같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단발령' 이었고

 

당대 척사파의 대표적 인물 최익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익현>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칼을 자를 순 없다

 

흥선대원군 이외의 한국 수구파(척화파) 선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마지막까지 '조선양반' 의 자존심을 지키려했던 인물 '최익현'

 

단발한 고종과 머리를 자르는 조선 백성들 , 당시 머리카락 및 상투는 조선인들의 자존심이었다 할 수 있고 시대가 시대고 당시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상황속에 급격히 시행되 많은 반발을 받았습니다

 

단발령도 단발령이지만 일본 건달들에게

국모였던 왕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조선인들은 매우 반발하며

결국 유생들은 일제히 격분하여

친일역적 제거 , 명성황후 복수를 명분으로

'을미의병' 을 일으켜 일본에 대항했고

이에 조선 조정은 그들을 어루만지는 관리를 파견하거나

세력이 너무 큰경우 관군을 보내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일국의 왕비가 외국 건달들에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 이 일으킨 영향은

엄청나게 컸는데

그러나 을미사변 이전 당시 조선 내의 조선 백성들에게도

'국왕(고종)은 일개 인형이며

왕비(명성황후) 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 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며

 

명성황후는 혼란한 시대속에서

사치와 향락을 위해 백성들을 쮜어짜는 인물이었고

당시 조선에도 명성황후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에 ,,

흥선대원군 , 우범선(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 유길준 등

여러 조선인들이 을미사변에 내통 , 협조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명성황후 사후 100년 넘는동안 일본은 조선과의 분쟁에

일본 건달들이 개입한 사건이라 주장해왔지만

2005년에 일왕이 을미사변을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됬고

보고서가 공개되건 말건 이전에도 일제가 시행한 범행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하여튼 명성황후는 당대 조선 내에서도 악녀로 이름높은 인물이었지만

아무리 독재자여도 자국민이 끌어내리는 것과

외국이 죽이고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그 성격이 매우 다르기에

명성황후 시해에 많은 조선인들이 분노했습니다

(단순히 명성황후 시해에 슬프다기 보다는

나라 왕비가 일개 일본 건달들에게 죽고

나라 궁궐이 일본 건달에 짓밟힌 수모감 등)

 

<라봉봉>동학 농민운동은 한국사에 거대한 민중 봉기이자 반외세 , 반봉건 운동으로서

크나큰 의의가 있어 '동학농민혁명' 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한국 독립운동이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됬고

전봉준은 '한국의 위인' 으로 이야기 되는 인물입니다

 

그들의 방식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할 수는 없지만

전봉준은 당시의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며

전봉준은 정의와 약자 , 민중의 편에 섰던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그렇기에 한국사에서 전봉준은

큰 의의가 있는 인물이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전봉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녹두꽃' 이 방영할 때

제 블로그의 '어린이 개인이야기' 카테고리의

'녹두장군 전봉준' 을 읽는 분이 매우 많았는데

드라마는 군더더기나 억지 산파가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희망을 본 거 같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탈을 본격화했고

끝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는데

명성황후는 미신을 좋아해

무당을 불러 굿할때마다 몇만냥씩 낭비하는 것을 물론이고

국가예산이 480만냥인데 100만냥을 선물로 주는 등

여러 공금횡령 , 사치를 일삼았다 하며

그의 응접실(손님맞이 방)에는 표범 48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이 깔려있었다는 등

조선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국가 예산을 사치에

엄청나게 쏟아부으며 낭비하던 인물이고

괜히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그녀를 죽이려 했다거나

임오군란때 분노한 조선 군인들이 그녀를 잡아 죽이려 했던 게 아닙니다,,

 

분명 조선백성들이 명성황후가 일본 건달들에게

비참하게 죽어 분노한 것은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명성황후의 죽음에 슬퍼한다기보다

무기력하고 힘없는 나라에 대한 설움과

일개 일본 건달에게 조선에서 가장 큰 궁궐이 함락될 만큼

무력감에 대한 슬픔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 명성황후가 그녀의 이미지를 갑자기 급격히 좋게 만들어

드라마속 명성황후의 '나는 조선의 국모다 !' 는 유행어가 되어

명성황후의 자존심 강한 도도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게 됬고

현실은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어려운 와중에도 백성의 고혈을 쥐어짠 인물로서

비참한 또 어두운 역사지만 괜히 을미사변때에도

조선인까지 그녀의 죽음에 가담 혹은 방조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에는 모두 일본이 관련되 있는데

한국 근대사는 근대사라기보다 보통 '일제 강점기' 라 불리는 경우가

보편적일 정도로 일본과 연관이 매우 많고

점차 일본은 무력해진 조선을 침탈하며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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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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