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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성년이 된 고종은 직접 친정(직접 정치) 을 시작했는데

고종은 정말 뛰어나지도 , 그렇다고 폭군도 아닌 인물이었고

되게 평범한 인물이었다 할 수 있는데

나름 이전 시기 왕이 됬다면 고종은 적당히 좋은 임금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던 군주였지만

문제는 고종이 재위하던 시기는

서구 열강의 '서세동점(서구 세력의 동양 정복)' 이 시작되며

계속해서 식민지를 팽창해갔던 제국주의 서양 열강 및 서구 기술을 일찍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야심을 펼치던 시기였고

평범한 농경국가 조선은 새로운 시대의 거대한 바람앞에

급격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는데

주변에 호랑이들이 득실득실한 환경에서는 마땅히

뛰어난 용기나 지혜등이 필요한 법이지만

하필 고종은 그냥 저냥한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진짜 무색무취한 감도 있습니다 ,,)

 

일단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22세의 성년이 된 고종은 직접 정치를 하려는 의욕을 보였고

초기에는 여러 세력들을 등용해 조정의 균영을 잘 맞추고

대원군 세력을 견제하려 부인 명성황후 민씨의 일가인

민씨 세력을 밀어주었습니다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조선말기 격동기의 인물로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본 건달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점 이외에도

드라마로 인해 크게 유명해진 인물인데

이름은 민자영이었으며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 때 안동김씨들을 견제하기 위해 직접 간택한 인물이었는데

 

원래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전 안동김씨 가문의 딸 중에서

고종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지만

(권력을 유지하려 한때 견제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도 딸을 시집보내려했던 안동김씨들도 참 대단 ;;)

 

흥선대원군은 약속을 뒤집고 민씨가문의 딸 민자영을

며느리 및 왕비 명성황후로 만들었고

분노한 안동김씨들은 흥선대원군에 등을 돌렸습니다

 

명성황후

 

그러나 고종이 성년이 되자

이전부터 이어진 왕의 부인 일가들이 정계에 나서는 '세도정치' 의 병폐는 계속되어

명성황후의 민씨 일가들이 조정에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고

명성황후는 힘이 힘이 빠질대로 빠진 시아버지를 견제하려

흥선 대원군에 등을 돌린 안동김씨 일가와 힘을 모았습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왕비가 됬지만도

당시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기에

결혼 첫날에도 고종은 명성황후의 처소가 아닌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하며 (;;)

 

고종과 사이에서 낳은 왕자도 항문이 막힌채로 태어나

5일만에 죽어버리는 등

원만하지 못한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정계의 뒷편에서 암약(뒤에서 활동)했습니다

 

일단 명성황후는 고종을 적극적으로 부추겨

자신의 일가 등을 정계로 오게하고 흥선 대원군을 몰아내려 했고

젊었던 고종 역시 완강하고 고집셌던 아버지에 지쳤는지

이 젊은 왕과 왕비 부부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점점 듣지 않기 시작했고

 

결국 흥선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견제하려 자신이 뽑은 며느리의

견제를 받아 물러나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명성황후는 정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인데

나라 문을 닫자는 '쇄국정책' 을 완강히 시행한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달리

나라 문을 열자는 '개화파' 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이미 이전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마친 일본은 서구 기술을 도입한 무기를 만들고

징병제를 시행해 군대를 키워

서구 제국주의 열강대열에 동참했고

1875년 조선에 군대를 보냈는데

 

일본 해군 함선 운요호는 이전 프랑스와 미국과 마찬가지로

조선 수도 한양을 흐르는 한강이 바다로 나가는 곳이자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강화도' 에 들어와 초지진을 파괴시켰고

 

일본 해군은 영종도에 기습 상륙해

신기술이 도입된 함포를 발사해 아무런 전사자도 내지 않고

조선 수군 35명을 전사시켰고 성내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는데

이 사건을 일본의 무력시위 사건이라 불리는

 

'운요호 사건(1875)'

 

이라고 합니다

 

일본 군선 '운요호'

 

이미 이전 흥선대원군 시기

프랑스와 미국과 교전하며 서구 열강의 힘을 알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게 되었는데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묻게했고 (제국주의 시절 흔한 열강들의 깡패짓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문호개방을 했는데

강화도조약(1876) 은 한국 최초의 외국과 맺은 '근대식 조약' 이자

'불평등 조약' 이라 이야기 하는 조약이며

이 시기부터 한국 근현대사가 시작된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즘이나 보통 흥선대원군 시기부터 한국에서는 근현대사라 이야기함)

 

강화도 조약

 

일단 근대식 조약은 그렇다치고

강화도조약이 불평등 조약일 수 밖에 없었던게

애초에 일본의 행패 및 무력시위로 맺어진 조약이었고

강화도 조약 내용에는 여느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양 국가에 했던 것처럼

일단 양국은 평등하다고 형식적으로는 명시되 있지만

일본국 항해자들이 조선 해안을 측량 할 수 있다는 내용 및

일본인들이 개항한 조선항구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들은 일본에 보내 판결한다는 내용(치외법권) 이

담겨있는 일방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고

당연히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살인같은 중범죄가 아닌 한

일본 법원은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철저히 일본에 유리한 판결을 했다 할 수 있고

이 '치외법권' 은 근대사 시기 열강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인 구실이었기에 불평등 조약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조선은 흥선대원군시기 서구 열강에 격렬히 저항했던과 반대로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허무하게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명성황후 역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하고

쇄국을 버리고

김홍집 , 어윤중 , 김윤식 등의 개화파 인물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개화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말도 있음)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대표인물이자 마지막 조선 영의정(조선 1등벼슬) '김홍집'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철저한 서구식 개혁을 하며

동양이 아닌 서구열강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일본에 개항한다는 것은 곧 서구 열강들에게도 개항하는 것과 동일했고

일본이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에 첫 길을 뚫자

서구 열강들도 새로운 맛집이 생겼다는 눈치로

조선에서 이권을 얻기위해 하나 둘 조선과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됬습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속에

조선이 일본에 반강제적으로 개항하자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첫 발걸음을 내딛었으며

산업화된 일본 경제는 빠른 속도로 조선에 들어와

취약했던 조선의 농 , 상업에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조선을 경제식민지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고

조선에서 화폐로 통용되던 조선 쌀들을 일본으로 엄청나게 실어갔으며

이에 지주나 관리는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조선 농민 , 도시 빈민층은 급격히 몰락하게 됬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이끌던

조선 조정은 일단 개화정책을 중요 국가정책으로 삼아

조선도 강력한 서양식 군대를 육성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

1881년 서양식 군대인 '별기군' 을 창설했고

별기군 교육은 일본 육군 소위가 맡았는데

별기군들은 기존 조선군에 비해 급료나 옷 등에서 엄청난 특별대우를 받았고

하루아침에 구식 군대가 된 조선군들은 급료지불도 체불당해 원활히 못받는 등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큰 분노심이 생겼습니다

 

조선의 신식 군대 '별기군' , 별기군은 양반자제 출신이고 구식군대는 하층민 출신이었다고도 합니다

 

그와중에 고종은 황태자비와 순종의 가례 (왕실의 혼인) 을 위해

일본 회사에서 대량의 비단을 혼수품으로 구매했고

이로 인해 급여를 체불당한 구식군인들은 매우 화가 나게 됩니다

(고종이 '군밤왕'이라 비하되는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전라도에서 쌀이 도착해서

차별당한 구식군인들은

밀렸던 급료(쌀) 를 지급받게 됬는데

곡식을 빼돌리는 관리들의 농간으로 쌀에는 썩은 쌀겨와 모래가 섞여있었고

결국 구식군인들은 집단으로 선혜청에 몰려가

새로 달라 요구했는데

지급 담당자였던 병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하인이

새로 못주겠다고 받기 싫으면 가라는 식으로

구식군인들을 모욕하며 자극했고

결국 구식군인들은 분노해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고종 역시 구식군인들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렸는데

1개월치 월급을 받았는데 그조차 엉망이었다는 소식을 알게 됬고

 

<고종>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내가 봐도 해도해도 너무하군 그동안 반란을 안 일으킨게 대견하구만)

 

라고 말했을 정도였는데

이는 조선말기 관리들의 부정축재 및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고종 역시 딱히 대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일단 선혜청 관리 폭행 사건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은 잡혀가서 매질을 당하고

갇히게 되었고

그들이 사형당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결국 다른 구식군인들 역시 무능한 조정 등에 엄청나게 폭발했고

결국 구식 군인들은 수도 한성의 백성들과 합세해 (사실 군인들도 백성들의 가족이기에,,)

실각해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갔고

 

(일단 흥선대원군이 관리들에게는 엄격해 실각했으나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했던 인물이라

당시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흥선대원군은 일단 구식군인들의 난리를 진정시키려

일단 그들을 달래주고 군중들에게는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나

자신의 심복을 군인으로 변장시키고 비밀리에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게 해서

결국 구식 군인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병장기를 탈취해 무장했고

포도청과 관가를 습격해 갇혀있던

흥선 대원군 지지파 및 위정척사파(수구파) 인물들을 석방시키고

왕비 명성황후 민씨의 오빠 및 민씨 친척일가 , 개화파 인물들의 자택을 습격하고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을 임오군란(1882) 이라 합니다

(임오년 군인들의 난리)

 

임오군란

 

정부의 무능에 대한 분노 및

대원군의 지휘아래 폭동을 일으킨 백성 및 구식군인들은

단숨에 왕궁으로 몰려갔으며

이미 기울대로 기운 민심 및 조선 병사들은

성난 그들을 '아무도' 제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궁에 들어간 군인과 백성들은 임오군란의 원흉 민겸호 및

관리를 잡아 살해했고

결국 모든 이런 일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었던 명성황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그녀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옷을 입고 궁녀로 변장해 궁궐을 탈출해

충주로 피신했고

고종 역시 사태 수습을 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으며

흥선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 하에

입궐했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 다시

흥선대원군의 통치가 시작됬고

이에 군인과 백성들은 환호했고

흥선대원군은 군인과 백성들을 다시 달래서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돌아오자

결국 명성황후 세력들은 귀양가거나 처벌받았고

군인들의 밀린 급료들은 전부 지급됬으며

이전 시행됬던 고종의 정책들은 다시 개정되기 시작됬습니다

 

다시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시작되고

나름 훈훈히 끝날 수도 있는 임오군란이었지만

명성황후 혹은 누군가는 임오군란을 막기위해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불러들였고

결국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흥선대원군을 납치 감금해

청나라로 데려갔고

결국 흥선대원군의 섭정통치는 끝나고 다시 명성황후는 궁궐로 복귀했습니다

 

한편 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은 일본은

조선에 보상을 요구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해 피해를 보상하고

일본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도록 허용시켰고

 

제물포 조약

 

결국 임오군란은 허무하고 짧게 끝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발을 붙이는 계기가 된

 

'여우 잡으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혹은 벼룩잡으려 초가삼간 불태운 꼴)'

 

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임오군란으로 인해

개화파들은 다시 정권을 잡고 일본에 우호적인 개화파들이

힘을 얻게 되었고

김옥균을 필두로

일본의 지원을 얻은 조선의 새로운 청년 급진개화파들은

새로운 조선을 만들려 생각하게 됬습니다

 

<라봉봉>한국 근현대사부터는 역사 자료가 엄청나게 많아지는데

기술이 발달하며 역사 자료 , 사진들이 엄청나게 방대해지기 때문에

호흡도 훨씬 빨라지고 사건도 엄청나게 격동적인 부분이 많아집니다

 

보통 한국근현대사 이야기를 할때

강화도 조약 혹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를 처음으로 이야기 하고 있고

이 시기부터 한국은 본격적으로 근대사 혹은 근현대사가 시작되는데

내부 모순이외에도 빠르게 밀려오는 강대했던 서구열강들 앞에

허망하게 무너져가던 조선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근대사 시기는

잘나가던 시기로 이야기 하는 서양 혹은 일본과 달리

(그래도 제국주의 시기가 전세계적으로 야만의 시대였고 좋은 시기는 아니었음)

한국 혹은 식민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게는

상당히 어둡고 암울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불평등한 조약 강화도 조약 이외에도

명성황후는 옛날에 제가 어렸을때 드라마로 방영해주며

성악가 조수미의 '나가거든' 이라는 비장한 ost 및

'국모(나라의 어머니)' 였던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일본 건달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들 때문에

좋은 이미지가 생겨났기도 했으나

임오군란 시기 분노한 구식군인들은 명성황후부터 잡아 죽이려 했을 정도로

좋은 인물은 아니었고

아무리 독재자가 나와도 자국민이 잡아서 끌어내는거랑

뜬금없이 외국이 개입해 죽이고 식민지로 삼는거랑 그 성격이 다르기에

오늘날에도 '까도 우리가 깐다' 라며

일단 명성황후는 드라마 거품도 점차 꺼져가며

조선사 악녀의 이미지가 다시 생겨났다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고종 및 명성황후는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속에서도

자신 및 왕실의 안위를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백성들의 삶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무능한 봉건군주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조선 내부에서도 이러한 것들때문에 외국의 침탈속에서도

여러 내부 정쟁은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의 불만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일단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고

일제 역사관들에 의해

조선 및 고종의 무능한 이미지 씌우기 조작은 계속됬지만

실제 조선 말기나 고종이 그렇다해서 엄청나게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고종에게는 일본에게 강제 합병당하기 전인 1910년까지 나름 충분히 긴 시간이 있었고

수많은 '골든타임' 들이 지도세력의 무능 , 내부정쟁 및 백성들의 반발 속에

계속해서 날라갔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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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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