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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3대왕 순조에게는

총명한 아들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 '효명세자' 라 불린 인물입니다

 

효명세자 상상화 , 권오창 화백

 

효명세자는 외모가 출중하고 영특하고 재능이 있었던 인물로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지냈던 순조의 기대를 받았고

순조의 건강이 나빠졌을때 순조의 명을 받아 대리청정을 해

4년간 조선 국정을 운영했는데

순조의 세자의 대리청정 어명에

신하들도 크게 환영했을 정도였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고

수령들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효명세자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기용하는 등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났으며

세도정치로 약화된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조선 후기 명대신이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담당관리 '박규수'

 

그러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려 22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렸고

순조는 기대가 컸던 뛰어난 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습니다

 

<순조가 직접 쓴 효명세자의 제문>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 上帝 (하느님)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스럽지 못하여 신명 (神明 천지의 신령)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 (胤嗣 대를 이을 자손)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을 하려고 하면 소리가 먼저 목이 메니

 

천하 天下 (하늘과 땅)와 고금 古今 (옛날과 현재)에

혹시라도 국가를 소유하고서

나의 정경 (情景 형편) 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말로 다할 수 없겠지만

총명했으며 유독 기대가 컸던 조선의 개혁군주가 될 자질을 보였던

효명세자의 죽음은 순조 뿐만 아니라 조선 백성들에게도 비극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태평성대를 이끈

영조 , 정조 , 순조의 3명의 '조' 라인에 있는

마지막 군주 순조가 사망하자

효명세자의 외아들(독자) 인 왕세손이 8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조선 24대왕 헌종이 되었고

 

세상물정도 모르는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가뜩이나 순조대부터 급격히 커져버린 안동김씨 및 신하들의 세력에 의한 정치인

'세도정치' 는 더욱 커져버렸습니다

 

세도정치

 

처음에 헌종은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및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의 힘이 커져 있었는데

신정왕후 조씨는 '풍양 조씨' 였는데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이후 조선의 마지막 '왕' 이었던

고종을 데려와 왕위에 앉힌 인물로서 이후에도 왕실 최고 어른으로

주요 활동을 하기는 했으나

일단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의 친정가문인 풍양조씨 세력들은 조선 조정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잡았고

이에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 할 정도로

조선에서 큰 위세를 누리게 되었고

헌종대에 이르러 세도정치는 절정을 찍습니다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 (로 추정하는 초상화)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시기에는 '척사윤음'이 반포되

천주교 신자에 대한 큰 탄압과 박해가 있어

많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되어 고문당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헌종대에는 부패하고 혼란스러웠던 조선 조정과 달리

뛰어난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일단 한국 천주교의 큰 인물이자 한국의 위인 김대건 신부(김대건 안드레아)님이

조선 헌종대의 인물이었는데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천주교를 믿던 김제준의 아들로 태어났고

김대건의 집안은 대대로 이어진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김대건의 할아버지 김택현은 가세도 기울고

나라의 탄압으로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어려워지자

탄압을 피하고 종교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경기도 용인 골배마을이라는 산골짜기로 가족들을 데리고 이주했고

 

김대건은 골배마을(골배마실) 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는데

골배마을은 천주교인들이 옹기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천주교 복음을 전파하던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 지역이었습니다

 

한국의 위인 김대건 신부

 

김대건은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피에르 모방신부가

은이공소(경기도 용인)에 왔을때 세례를 받았고

모방신부는 선교지 주민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교육하는

전통에 따라 신학생 셋을 선발했는데

이에 최양업 , 최방제 , 김대건 세 명이 뽑히게 되었고

김대건은 그렇게 한양에서 한문과 라틴어 및 기초적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모방 신부는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살던

김대건 집안의 이력을 듣고 김대건을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신학교가 없었기에 김대건이 신부가 되려면

신학교가 있는 청나라로 유학을 가야했고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가까운 북경신학교를 탐탁치 않아해서

마카오(포루트갈의 영구 임대영지였기 때문)까지 보내게 됬습니다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중국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 최양업 , 최방제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나 만주와 요동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마카오에서 김대건은 비밀리에 사제수업을 받았고

프랑스어 , 라틴어 , 신학 , 서양철학 등을 배웠습니다

 

신학생 김대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상당히 성숙해서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계몽사의 김대건 신부님 위인전)

 

<신학생 김대건이 남긴 글>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떤 신자도 잡혀갔고

경기장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알아보고 양순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사자도 제 주인을 알아보건만

사람들은 왜 천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

 

김대건은 학문 이외에도 외국어와 미술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고

신학교 공부를 마친 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고 있었던 조선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고

1845년(헌종 11년) 1월에서야 국경을 넘어 한양에 몰래 들어왔는데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거세서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고

그해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서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사제 정복(비레타)을 입은 김대건 신부 (청나라식 중국모자가 아니라 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다시 프랑스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으로 몰래 들어왔고

방방곡곡을 돌며 비밀리에 천주교 전도할동을 펼쳤습니다

 

이듬해 김대건 신부는 동료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비밀 입국 통로(선교사 입국길 개척)를 알아보려 백령도를 돌아보다 붙잡혀서

한양으로 압송됬고

 

그를 심문하던 조선 조정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가 서양 글자를 필기체로 능숙히 쓰는 것에 놀랐습니다

세계지리에 밝은 김대건 신부가

조정 대신들의 부탁으로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해

한국어로 옮김과 동시해 색칠했고

김대건이 번역한 세계지도를 헌종도 보게 되었고

조선 조정은 김대건 신부가 라틴어 , 중국어 , 프랑스어가 가능한

조선에서 없다싶이한 뛰어난 엘리트임을 알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프랑스어에 밝은 김대건 신부를 이용해

조선정부의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항의하던

프랑스와의 외교문제를 해결하려는 등

천주교를 믿음에도 너무 재능이 아까워 처음엔 그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조선 조정 대신들>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

 

그러나 신념을 지키려는 김대건 신부는 결사코 거부했습니다

 

헌종도 말하기를

 

<헌종>김대건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

 

하자

영의정 권돈인은

 

<권돈인>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 요상스러운 종교)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 요사스러운 학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 위험한 말을 하여 두려워지게 함)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 법으로 누름)하여 주벌(誅罰 벌을 줌)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성리학 지배층들의 이권보호 이외에도

천주교를 중국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때의

황건적이 믿던 민간신앙들 같은

국가의 잠재적 위협이단종교세력으로 인식했던거 같습니다)

 

결국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서

순교(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유언>주교님 ,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1846년 9월 16일 서울 용산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는 순교하셨고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실때 나이는

겨우 26세셨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학문을 공부한 유학생이자

한국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했고

1984년 한국 가톨릭 200주년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원래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으로 사형을 받은 신자들은

3일 뒤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예외로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고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 군줄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해서 그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산길로 밤에만 걸어 5일만에 경기도 안성에 도착해

안장시켰고 이 곳은 오늘날 '미리내 성지' 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천주교를 알리려 순교하셨던 그는

옛날 신라시대 자신의 목을 베게 해 불교를 알리려 했던

'이차돈' 과 비슷하다 할 수 있고

한국은 '고등종교' 라 불리는

'불교' 나 '기독교(천주교)' 등을 들여오는데

이렇게 엄청난 진통을 겪었습니다

 

한국(신라) 불교를 들여오기 위해 순교하신 이차돈 , 한국의 고동 종교들은 이렇게 들어올때부터 탄압이 있었고 그나마 유학(유교 , 성리학) 은 큰 마찰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한국과 오랫동안 교류한 중국에서 발달한 유교와 달리 인도에서 나온 불교나 서양에서 온 기독교 탄압은 이질적인 외부세계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외에도 헌종대에는 추사 김정희가 활동했는데

김정희는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영특한 재능에 감탄한 실학가 박제가의 제자가 되서

실학사상을 배웠습니다

 

조선의 명대신이자 실학자 '추사 김정희' , 이한철(김정희의 제자) 작품

 

김정희는 순조 9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했고

24세에 사신으로 간 아버지 김노경를 따라서 중국 청나라에 간 김정희는

중국 학자들과 사귀며 영향을 받아

중국의 실학사상이라 할 수 있는 '고증학' 을 배우게 됬습니다

 

이후 김정희는 암행어사로도 활동하고

헌종대에는 이조판서가 됬고

정치적 정쟁에 휘말려 고문을 받다가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를 갔습니다

 

김정희는 권력가 양반자제로서 새로운 실용적 사상을 접하며 성장해

고위관직을 거치며 조정에서 승승장구하던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제주도로 유배되버리자 여러 부적응이 많았고

중간에 부인도 죽는등 여러 고통을 겪고

엄청나게 오랜 귀양살이를 했으나

절망하지만은 않았고

그 시간동안 공부를 열심히하고 글씨를 다듬어

학자의 길을 걷게 됬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글씨체인

'추사체' 는 그의 호를 따 추사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추사 김정희는 동양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았고

뛰어난 시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시와 그림과 글씨가 들어가있는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또 추사 김정희의 난초그림은 엄청나게 유명해

난초를 잘그렸다는 쇄국정책의 조선 말기 정치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의 난초그림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헌종대에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발흥과

거대해진 세도정치 이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왔던 (그러나 탄압받았던) 시기였고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세금제도 문란) 으로

백성들의 삶은 파탄에 이르렀고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 거듭되는 조선 바다에서의 이양선(서양배) 의

출몰 등 여러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린나이에 즉위한 헌종은 나름 성년이 되며

안동김씨들을 밀어내려 시도했지만

겨우 22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렸고

이에 헌종에게 공격받은 안동김씨가 헌종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헌종이 너무 젊은나이에 후사없이 사망하자

효종대부터 이어진 조선왕실 직계왕통은 단절됬고

조선을 장악한 안동김씨들은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만만하고 어리숙해

허수아비 왕위에 앉혀 조종하기 쉬운 조선 왕족을 찾아나섰습니다

 

<라봉봉>헌종은 무언가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너무 일찍 요절해 버린 인물이고

조정은 이미 왕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동김씨나 풍양조씨들의 세력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할 수 있습니다

 

헌종대 활동한 한국의 위인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를 알리고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 순교하신 인물이고

그의 일생을 보니 저가 최근에 본 영화 '핵소 고지 (핵소 고지 [2016]

Hacksaw Ridge )' 가 생각나는데

 

국가 , 정부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

소시민 혹은 개인이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는데

핵소고지 영화의 실제 주인공 '데스몬드 도스' 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군복무를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종교적 신념으로 총을 집을 수 없다는 이유로 미 육군 의무병으로 복무하며

동료들을 구했던 인물이고

데스몬드 도스의 의사를 존중한 당시 미국정부였는데

 

자유를 기치로 건국된 나라이자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요시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특히나 사회적 통념 및 집단주의 및 이미 자리잡은 세력들의 텃세가 강한 나라로서

이전에도 이미 무속신앙 세력들이 불교를 견제하며 이차돈의 순교끝에서야

신라에 불교가 겨우 공인됬다는 이야기가 있고

조선대에도 반복되 지배층이었던 성리학 사대부들은

자신의 향촌 , 향교 , 서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선 후기부터 유입된 서양 종교사상 천주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했던 것으로 보이고

결국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유학생으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던 김대건 신부조차도

이러한 극단적인 배타주의와 탄압을 피해가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김대건 신부는 단순한 한국 최초의 신부라기보다

국가 앞에서 개인의 신념을 지킨 인물로서도 의의가 있다 생각되고

이게 말은 쉬울지언정 매우 어려운 것임을 저는

살아보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순교보다는 김대건 신부나 조선 정부가 조금 더 양보하거나 타협해서

서로의 이익을 도모했으면

조선에 서구 기술 , 문화 유입도 더 빨리지지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고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보는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봐도

유능한 인물의 아쉬운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양가서 학문의 길로 간 추사 김정희의 예도 마찬가지로

헌종대에는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분명 나오긴 나왔는데

이미 세도정치 가문들의 권력장악 속에

당연 안동김씨나 풍양조씨에 연이나 줄 , 뇌물등이 없으면

조정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할 수 있어서

 

뛰어난 인물이 나와도 쓰지를 못하고 그대로 묻혀버리거나

탄압받던 시기였다 할 수 있고

물론 그냥 조선을 비하하고 '헬조선' 이라고 쉽게 말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조선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던지 후기 , 말기를 보면

이러한 정치의 부패 및 망국의 조짐은 보여진다 할 수 있고

번영했던 통일신라도 , 고려도 예외가 아니었듯이

조선 역시 후기는 답이 없다 생각될 정도로

부패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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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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