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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년개혁군주였던 정조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요절치고는 나이가 있기는 하지만 요절이라고도 봄)

 

정조의 차남이 11살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

조선 23대왕 '순조' 가 되었고

조정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영조의 부인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됬습니다

 

불타버려 반만 남은 순조의 어진

 

정순왕후는 사망할때까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활을 했고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했는데

이후 순조의 장인이자 정조의 충신이었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들은 이들을 몰아내고 60년의 장기집권을 하게 됬는데

이를 왕이 아닌 외척 가문 혹은 특정인과 추종세력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는 정치형태로 '세도 정치' 라고 합니다

 

1대 세도정치 집권자 안동김씨 '김조순' (초대는 정조대 홍국영이라고도 함)

 

왕이 아닌 특정 가문 혹은 외척들에게 이루어진 정치체계 '세도정치'

 

순조는 영조나 정조와 달리 신하들을 잘 관리나 단속하지 않았고

이전부터 격렬한 정치대립이 있었던 조선 '붕당정치체계' 는

순조대에 이르러 한 가문이 독점해 권력을 잡고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 비유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는

'세도정치'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뇌물들은 권력을 잡은 특정가문에 가게 되었고

결국 이로인한 폐해와 고통은 백성들이 부담하게 됬고

부패한 조선의 멸망이 가속화되게 되었습니다

 

순조대에는 혼란의 연속이었고

순조 11년인 1811년에는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의난' 이 일어났는데

평안도 사람 홍경래는

과거시험에서 계속떨어졌는데

조선왕조는 대체적으로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국경지대이자 거친 습성 및 차별등에 자주 반란이 일어났던

평안도인을 관리로 채용하지 않았으며 (반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인해 지역 전체가 연좌됬으므로 잘못된 것이었음)

서북지방 , 조선 북방지역사람들은 조선 양반세계에서 철저하게 왕따당했습니다

(+전라도 지역 역시 유배지거나 안좋은 시각이 있었고

풍문이 아니라 조선에는 실제 지역 차별등이 존재했음)

 

이에 실제로 평안도사람은 능력이 있음에도 과거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에서>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서울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 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홍경래는 과거를 치룰 만큼 여러 교양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고

영조와 정조대에 나왔다 이야기되는 조선 예언서 '정감록' 에

통달한 인물이었는데

정감록에는 '이씨(조선왕실)가 망한다' 라는 구절이 있고

정도령이라는 진인(수행을 마친 선인)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이야기가 있어

조선왕조에서는 금서로 여겨졌고

민중에서는 몰래 읽혀지며 민중저항 서적으로 몰래몰래 퍼진 책입니다

 

조선의 금서이자 예언서 '정감록'

 

당시 조정은 북방지역민 차별 이외에도

세도정치 , 삼정의 문란(세금제도의 문란) 등으로

조선 전지역의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있었던 시기입니다

 

삼정의 문란

 

결국 민생도탄 및

북방지역민에 대한 차별에 대해 분노한 홍경래는 결국

같은 처지의 조선 정부의 차별에 불만이 많은

조선북방지역민들을 끌어모았고

이에 북방지역의 돈많은 상인 , 양반들도 그와 함께했습니다

 

물론 서북지역이 좋지 않은 지역이였냐면 그것도 아닌게

당시 서북지방은 그나마 농업생산력도 높은 편이고

자원이 많아 수공업과 광업이 활성화됬고

청나라와의 국경교역에서 상업도 발달했고

평양 , 개성 , 의주 , 정주 등 여러 도시들에서

상인 집단인 송상과 만상등이 활약하는 등 무역 중심지로 발달했고

북방 방어를 위한 국가지원이 다른 지역보다 넉넉했기에

나름 풍요로운 지역이어서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다'

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평안감사는 한번하면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만큼 재산을 모은다는 등

(물론 수탈과 뇌물)

조선시대 꿈의 벼슬이라 할 정도로

'아주 좋은 일' 의 대명사가 되었고

곡창지대 전라도나 상업지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은

단순한 차별이라기보다 풍요로운 지역에 대한

지역민들의 선망과 질투도 담겨있다 볼 수가 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두가 농민이나 상인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관직 진출 등 역시 지역민에 대한 차별은 분명 존재했고

이에 큰 불만을 가진 홍경래는

서북지방이 흉년이 들때

금광에서 금을 캔다 속이며 사람들을 모았는데

모인 광부들은 직업답게 당연 거칠고 힘이 강한 사람들이었고

홍경래는 모인 사람들을 군사훈련시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홍경래의 난 지도

 

홍경래는 우발적 농민봉기가 아닌

부패했던 '조선정부 전복' 을 목적으로 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 홍경래는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기해

청천강 이북의 서북일대를 빠른 속도로 장악했는데

역시 조선정부의 차별에 불만이 많았던 많은 북방 상인과 지역 유지들의

지원이 컸습니다

 

홍경래의 난 민족기록화

 

그러나 홍경래군에 대항하는 의병들도 일어났고

순조의 지시아래 관군이 출동해 홍경래군이 대패하자

 

전투에서 패한 홍경래는 정주성에 들어가서 농성하게 됬습니다

관군은 정주성을 포위하고는

땅굴을 파들어가서 화약을 성밑에 묻어 폭발시켜서

성으로 돌입해 함락시켰고

결국 홍령래의 난은 농상 100여일 , 거병 5개월만에 끝나게 되었고

홍경래는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저항하다 총에 맞아 죽고

그의 부하들은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형되었으며

2983명이 체포되 여자 842명과 열살 이하의 소년 224명은 모두 노비가 되었고

이들을 제외한

1917명이 한명도 예외없이 전원 처형됬습니다

 

관군측 화원(화가)이 홍경래의 난을 그린 조선시대 전쟁기록화 '홍경래진도 (1812)'

 

왠만하면 조선 정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면

오늘날로 치면 조선시대 농민봉기등은 농민의 수탈에 대해 일어나기에

오늘날 파업이나 민주화 운동 같은

당시 조선 농민의 불만의지 표현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조선 정부에서는 농민봉기는 주동자와 핵심 인사만 죽이고

지역민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위로하는게 보통의 경우였는데

 

홍경래의 난 같은 경우는 일반적 불만표출봉기라기보다는

워낙 준비가 철저했던 홍경래의 조선 전복 목적의 반란이기도 했고

조선정부의 평안도 지역민에 대한 차별의식까지 더해져

그 유례가 없이 잔혹한 조선정부의 진압이 있었습니다

 

이에 북방지역에 자리잡은 오늘날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이름을 '조선(북조선)'이라 부르지만서도

원래부터 북방지역에 대한 차별때문에

이성계의 조선을 비하하며 싫어하기도 하고

홍경래의 난은 묘청의 난과의 마찬가지로

북방지역민들이 일어난 봉기였기에

높게 치고 있다 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홍경래의 난은

서북민의 차별에 대한 봉기 및 봉건적 사회모순에 대한 봉기라 이야기 하고 있고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큰 위기감이 있었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겨우겨우 진압됬지만

이렇게 순조시대에는 세도정치의 발발 및 홍경래의 난 등으로

내부적 모순과 혼란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는데

순조는 그럼에도 무능하기만 한 임금은 아니었고

일단 평등한 모습도 보여

 

<순조>아무리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

 

라고 말하며 1801년 나라에 속한 6만 5천명의

공노비(나라의 노비) 를 해방시키라는

어명을 내리는 뛰어난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또 순조대에는 이전부터 이어진 조선 후기 상업발달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북방지역에서는 임상옥이 청나라를 오가며 인삼무역을 통해

조선의 '거상(큰 상인)' 으로 성장했고 일단 그는 홍경래의 난대에는

당시 북방 재력가들과 달리 관군에 협조해 살아남았던 인물이고

(저도 애초에 홍경래가 조선을 전복할 힘은 없었다고 생각되기에

임상옥은 거상답게 판세 보는 눈은 뛰어났다 생각됩니다)

 

임상옥은 조선의 카네기나 록펠러 혹은 오늘날 식으로는

빌게이츠나 이건희(이름이 부의 대명사같이 됨)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조선 거상 임상옥 (1779~1855)

 

임상옥은 배포가 컸던 인물로서

북경에서 청과 무역할때

조선 상인들이 얼마후 돌아가야 되는 것을 안 청나라 상인들은

담합해서 조선인삼을 저가로 후려치기 하는 농간을 부렸는데

(당시 조선인삼 ,홍삼은 약효가 좋고

아편중독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 중국에서 어마무시한 고가에 거래됬음)

 

이에 분노한 임상옥은 청 상인들 앞에서

인삼을 쌓아놓고 주저없이 불을 지르며

안사면 계속 인삼을 불태우겠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놀란 청나라 상인들은 임상옥에게 인삼을 태우지 마라 애걸복걸하며

결국 원래 값의 배에다가 타버린 인삼값까지 치뤄주었고

이로 인해 임상옥의 이름은 국내외로 떨치게 됬습니다

 

청나라 북경상인들의 농간에 맞서 인삼을 불태우는 임상옥 , 출처 : 출처 :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상도 (商道) (2001~2002) The Merchant

 

임상옥은 조선의 이익과 권리를 지켜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로인해 조선의 경제력은 크게 높아졌으며

또 임상옥은 단순한 상업행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의리와 상도등을 중요시여기며 오늘날에도

'한국형 상인' 의 모범이 된 인물이 되었다 할 수 있는

조선의 '거상' 이었습니다

 

<거상 임상옥의 명언>상즉인(商卽人)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거상 임상옥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상도' , 출처 :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상도 (商道) (2001~2002) The Merchant

 

이런 일들이 있었던 순조시대였고

나름 순조는 유능한 영조와 정조시기의 시대를 이어

왕위에 욕심없는 모습을 보이며

어느정도는 왕노릇은 하며 좋은 임금 소리는 들으며 버텼는데

그러나 순조대 조선은 마치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자신이 언제 죽어가는 지도 모르며

무기력한 임금의 무관심(세도정치 견제실패)과

봉건제의 모순 및 정치의 부패속에

'평화롭게 몰락' 해가던 시기였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순조는 그의 아버지 정조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신하들에게는 워낙 급진적이고 과격했던 인물이라

아버지 시대에 대한 반동 에너지 같은것 때문에

일부로 신하들을 간섭하지 않고 온건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생각되나

하여튼 너무 무심하고 충분한 정통성과 힘이 있었음에도

신하관리 실패 및 외척에 대한 안일함으로

외척 및 세도정치 세력들은 조선의 거대한 암덩어리같이 자라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 시켰다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옛날부터 외척 단속은 엄청나게 중요해

조선초 태종 이방원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처가와

아들 세종대왕의 처가까지 모두 쓸어 없앤

'숙청왕' 이었다 할 수 있고

왜 외척이 이렇게 정치사에 나설 수 있었냐면

일단 왕이 어린시절부터 함께한 인물은 권력자이자

나랏일에 바쁜 아버지(왕) 가 아닌 어머니나 어머니의 친척들일 확률이 높아

친분이 높다 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왕이되고나서 왕과의 친밀감을 이용해

한자리씩 얻거나 하게 되다 점차 조정 주요 일까지 자신의 가문들의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며

여러 병폐를 낳는 것인데

예로부터 중국은 황제를 바로 옆에서 모시던 환관(내시)이 큰 문제가 됬고

한국은 왕의 어머니나 부인쪽 가문이 나서는 '외척' 문제가 컸다 할 수 있는데

갑자기 순조시대 세도정치의 시작이나 임상옥 이야기를 하니

지금은 병상에 있지만 한국 재벌이자 부자의 대명사였던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경영할때 '마누라랑 자식빼고 다바꿔라' 라는 말을 하며

그만큼 절박하고 혁신적인 경영을 하라는 말이 한때 크게 이야기 되기도 한게 생각나는데

 

순조대부터 일어난 세도정치와 외척세력들의 이야기 및

한국사에서 이전부터 꾸준히 있어왔던 외가와 처가의 정치개입 병폐가 컸기에

 

'마누라랑 자식도 바꿔야 하는게 아닌가 ?'

 

라는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집안에 권력자나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일 것이고

어떻게든 콩고물같은 것 혹은 낙수효과는 있다고 생각되는데

과연 가족이나 친척 , 친하다는 이유로 정당한 노력없이

공적인 일까지 개입한다면 그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크고

오늘날에도 한국 정치권에서는 역대 대통령들까지 가족비리가 엮여있어

큰 문제가 되었다 할 수 있기에

황제 가까히 있던 내시나 2인자등에 의해 정치가 조정된 경우가 많았던 중국 ,

막부(군사 통치기구)에 의해 정치가 일어났던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정문화' 때문에 가족 , 친척 비리가 크나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마누라랑 자식도 바꿔야하지 않나 ?' 라는 의문이 생겨난거 같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법의 특혜를 받는다면 그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막장 자신의 가족이 위기에 처하면 나설 수 밖에 없는게 사람의 인정이라

하여튼 세도정치 같은 경우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한국의 고질적 병폐라 할 수 있습니다

 

홍경래의 난같은 신분제의 모순과 조선정부의 병폐들이 드러난 사건도 있었고

나름 순조시기에는 임상옥같이 여러 인물들이 활약하기도 하고 여러사건도 있었고

순조는 영조 , 정조와 마찬가지로 '조' 자 칭호를 받았기에

영조 정조 순조 3대왕 시기는 나름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 혹은 태평성대 시기라 이야기 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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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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