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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개혁군주였던 조선 21대왕 영조는

이복형 경종과 함께 모두 숙종의 아들이었고

경종의 세제(왕이 세자[아들 후계자]가 없을 경우 동생을 세제[동생 후계자] 로 임명하기도

했음) 출신으로 연잉군에서 경종 사후 조선 21대왕 영조가 됬습니다

 

영조 어진

 

이미 이전에 숙종대에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자

장희빈을 밀던 남인들은 몰락하고 서인들의 시대가 왔는데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서인들은

경종대부터는 소론은 경종을 , 노론은 연잉군을 밀다가

연잉군이 영조가 되자 노론들의 세상이 오게 됬습니다

 

그러나 경종의 죽음에는 경종시기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치대립속에

위기에 몰린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독살설이

있었을 정도로 의문의 죽음이었고

이에 영조 즉위초반에 이인좌는 남인과 소론을 규합해 초거대 반란을 일으켜

'이인좌의 난' 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적 거대반란으로서 서울 , 충청 , 전라 , 경상 ,서북지역에서 일어났고

이인좌와 이인좌의 난의 세력들은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며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했고

영조에 독살당해 죽은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일어났지만

결국 조정군에 의해 진압됬습니다

이인좌의 난은 진압됬지만 규모가 너무 컸고

이후부터 소론들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결이나 이인좌의 난 등으로

목숨을 잃을뻔하거나 큰 위기를 겪었고

나름 형 경종이 파가 달랐음에도 자신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평생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고

이에 정파에 관련 없이 능력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붕당의 폐해를 막기위해

능력있는 인재를 뽑으려 하는 '탕평책' 을 실시했습니다

 

여러 빛깔의 재료가 들어가 여러색(붕당을 의미) , 여러당파가 고루고루 화합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영조대 개발된 궁중요리 '탕평채 (묵무침 , 묵비빔)' , 한국인의 화합과 탕평정신은 오늘날 '비빔밥 문화' 로도 이야기됩니다

 

영조는 학문도 좋아하고 총명하고 검소하며 계산적인 왕이었는데

관리들에게 사치하지 못하게했고

특히 왕실과 관리같은 지배층들에게는 부정부패의 죄를 매우 엄격히 물는 등

매우 엄격했던 왕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따뜻한 모습을 보인 임금이었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백성들에게 가혹한 형벌이나 잔혹한 형벌을 없앴는데

당시 허벅지에 무거운 것을 올려 무릎에 엄청난 고통을 주는

'압슬형' 이나 불에 달군 쇠를 몸에 지지는 낙형 , 죄인의 얼굴등에

문신을 새기는 자자형 , 시체를 꺼내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 , 주리를 트는

전도주뢰형 등같은 잔인한 고문들을 없앴습니다

 

영조가 폐지한 잔혹한 형벌 '압슬형'

 

또 영조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고 사회적 폐단이 심했던 서원의 중복설립 금지 ,

서얼(서자 , 첩의 자식) 차별 완화 등을 했고

백성들의 군역(군대일) 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균역법' 을 실시해서

2필씩 징수하던 군포(군대에 내는 옷감 세금) 를 1필로 감해주었고

여름마다 홍수등으로 범람하는 청계천 공사를 실시했는데

이때 백성들에게 나라에서 임금(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등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따뜻한 면을 보인 임금이었고

 

점차 한국이 중세 혹은 근세국가에서 근대국가화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는 왕입니다

 

이번에는 관제나 관료들에 대한 영조의 모습으로서

영조는 영조 22년인 1746년에 문신들에게 조선의 통일 법전인 '속대전' 을 편찬하게 했고

세조~성종대 편찬된 조선 법전이었던 '경국대전' 편찬이후

추가된 법 중에서 시행할 법들을 요약해 만든 법전으로

경국대전은 중세시대적 법전이었기에 서민들에게 가혹한 형벌등이 있었고

이에 영조의 속대전은 서민들에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고

관리들이 남용하던 악형을 폐지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영조대 편찬된 법전 '속대전'

 

또 영조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쥐어짜 괴롭히는

지방 탐관오리들을 잡기위해

박문수를 '암행어사(왕명을 받고 변장해 지방으로 파견되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 및

지방 실태등을 살펴 보고하는 직책)'로 임명해서

신분을 숨기고 지방을 돌아다니게 하며

민심을 살피게했는데 박문수는 고작 1년간 활동했지만

박문수는 민초들의 삶에 밝았던 인물이었고

거지꼴로 다녀 아무도 박문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방의 실태와 정보들을 꼼꼼히 수집했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

 

암행어사들이 들고다니던 '마패' 는 암행어사의 신분 및

왕의 권위를 위임받는 징표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부패해 백성들이 도탄을 겪고있다 판단되면

마패를 보이고 관리를 왕명으로 처벌할 수 있었고

남루한 옷을 입고 신분을 숨기던 어사 박문수가 탐관오리들에게

 

<박문수>암행어사 출두야 !

 

하고 외치면 육모 방망이를 든 역졸들이 관아에 몰려들어

사또 및 이방들을 포박하고 암행어사는 윗자리에 앉아

사또를 심문하는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야 ! , 암행어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서 실존인물 박문수와 소설 춘향전 속의 이몽룡이 생각납니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지방관들에 대해

영조에 꼼꼼히 보고하고 이외에도

백성들의 고충들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등

항상 백성들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려했던

청렴한 관리였고

자신이 책임을 지고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음에도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박문수>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에 타협하지 못하는 성품등에 박문수는 영조의 큰 신임을 받았음에도

평생 영의정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고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됬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기록과 달리 백성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민담 , 전설적 내용들이 많고

조선 백성들은 그의 사당(서낭당)을 만들어 신처럼 모시기도 했고

여러 풍문을 남겼는데

공식기록 이외에도 암행어사가 말그대로 몰래 파견하는 직책이기에

실제 영조는 몰래몰래 박문수를 틈틈히 지방에 보내

조사하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청렴하고 유능한 관리였던 박문수는

자신의 곳간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부정부패의 지방관리들을 벌주고 관직을 빼앗아

영조의 신임을 얻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그의 이름은 암행어사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조는 총명하고 백성들에게 인자했던 왕으로서

조선후기 개혁을 이끌던 개혁군주로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무수리(궁녀보다 낮은 천민궁녀)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평생 출신 콤플렉스 등이 있었고

권력유지에 냉혹하리만큼 신경을 썼던 인물이고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농업사회였던 조선에서 술을 만들경우 많은 곡식이 소모되는데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술만드느라 곡식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십년간 금주령을 내렸는데

술을 빚은 관리를 참수형에 처하는 등 융통성 없는 법률등을 시행했고

대신 일반백성들에게는 엄격하지 않아

유세교라는 백성 한명이 술을 빚어 고발됬는데

유세교는 그것이 식초라 주장했고

영조는 좌의정에게 한 잔 마셔보라 했는데

좌의정은 술인 것 같다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우의정에게도 한 잔 마셔보라 했는데

가난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영조의 마음을 알아챈 우의정은

마셔보고는 틀림없는 초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유세교에게 무죄판결을 내리고 석방해주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술

 

그러나 금주령은 역시 잘 지켜지지 않아

마실 사람은 만들어 먹게 되었고

결국 정조대에 금주령은 풀렸는데

대신 영조는 연애소설을 좋아했는데

정조는 즉위 후 연애소설을 다 불태웠다 하고

순조는 담배피는 것을 혐오했다는 등

왕의 취향이 정책적으로 공론화 되거나 반영되는 경우들이 있었고

 

개인의 취향 , 혹은 개인이 안한다고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영조 이야기로 가서 ,,

또 영조는 매우 검소해서

침실에는 이불과 베개만 있었고

식사는 밥과 김치같은 채식위주 반찬에

소식을 하되 식사를 매우 규칙적으로 하며 꼭꼭 씹어먹었고

여자들에게 사치스러운 가체(가발) 을 금지시키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했고 왕실 물품들에 사치를 막게했습니다

 

평소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했던 영조는

51년 6개월 6일을 재위하는

조선왕조상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이 되었고

81세를 살아 조선의 '장수왕'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하여튼 엄격하고 까다로운 또 유능한 임금이었다 보여지고

영조는 성격이 독특하고 개성강한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출신은 무수리(천민 궁녀) 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미약해 출신 컴플렉스가 있었지만

평소 독서를 좋아해 신하들도 똑똑한 왕앞에서 함부로 하지 못했고

백성들에게는 따뜻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권력 앞에서는 냉혈한 모습을 보인 인물이기도 했고

자기 자식에까지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이다

아들을 쌀보관상자인 '뒤주' 에 가두어 잔혹하게 죽이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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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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