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19년 경상도 동래군 (오늘날 부산) 사람 안용복은
평소 왜관(조선의 일본 대사관 + 일본무역소 격인 일본인 집단거주지역)
을 자주 왕래해서 일본어에 능통했는데
그는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한국영토인 울릉도에서 불법어획하는 일본의 고기잡이 배 발견했고
그들에게 따졌습니다
<안용복>어째서 남의 나라 땅에 일본인이 함부로 들어왔냐 !
일본인들 역시
<불법어획하는 일본어부들>우린 80년 전부터 여기서 고기를 잡았는데
여기가 조선 땅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
우린 쇼군(일본 지배자)에게 받은 어업 허가증이 있다 !
라고 반박했고 결국
안용복은 허가증을 보기위해 일본 오키섬까지 가게 됬습니다
원래 울릉도와 독도는 오지라 도망가는 사람들이 살거나
일본해적인 왜구의 침략이 많아
조선정부에서는 울릉도와 독도 지역주민들을
육지로 옮겨살게 하는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 을 시행했고
이에 풍요로운 어업자원이 많은 땅이자 사람없는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어선들이 일본정부에 요청한 후
불법어획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다 일본 어부들은 원주인인 조선 어부 안용복과 충돌했고
오키섬에 간 안용복은 오키 도주에게
당당하게 울릉도는 조선땅이라 했고
결국 오키도주는 상위기관인 에도막부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에도막부는 그런 작은 섬을 힘으로 뺏는것은 쉬운 일이지만
작은섬때문에 이웃나라와 우호를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 판단해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일본 어업가문들에게 울릉도에 가지 못하게 했고
안용복에게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써서 안용복에 주어보냈습니다
<당시 일본막부의 서계(외교문서)>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鬱陵島非日本界)
그러나 대마도주가 부하들을 보내 시모노세키에서 안용복 일행을 잡아 고문하고
쇼군(일본 지배자)이 준 편지도 빼앗아버렸고
결국 대마도주는 안용복일행을 2년간 가둬버렸고
조선과 일본의 울릉도 외교분쟁이 일어났는데
조선은 온건히 대응하다 계속 일본이 우기자 강경한 태도로 전환했고
겨우 풀려난 안용복은
다시 울산에서 11명을 모집해 울릉도로 출항해서
아직도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일본어부들을 쫓아내고
일본으로 가서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 이라는 벼슬이라 사칭하고
항의한 후 조선에 돌아왔고
다음해 에도막부는 조선정부에 자신들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월경 금지를 시키겠다 말했고
안용복이 쫓아낸 일본인 어부들은 월경죄로 사형당했습니다
일본인들이 한국 고유의 섬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 우기지 못하게 확정짓는 공을 세운 조선어부이자
민간 외교관 안용복은 일본에서 조선 강원도로 돌아왔지만
강원 감사는 안용복을 잡아 뭐하다 왔는지 캐물었고
일본에 갔다왔다하자 월경죄로 하옥후 의금부(조선 사법기관)로 보내 조사하게했고
안용복에 대한 조선 조정의 논의가 벌어졌는데
원로대신이었던 남구만과 윤지완은
<남구만과 윤지완>그(안용복)로 인해 울릉도를 침탈하려는
대마도주의 음모가 드러났으니 무조건 처벌할 수는 없다
좌의정 윤지선은
<윤지선>후세에 그와 같이 법령을 어기고
일본으로 가는 자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
했고 오랜 논의끝에 결국 숙종은
안용복의 공을 인정해 사형은 면하게하고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안용복은 이름없는 평민어부였기에
직접 발로뛰며 뛰어난 공을 세웠음에도
출국 금지를 어긴것과 공무원 사칭등의 이유로
생전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유배된 그가 이후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지만
오늘날 일본의 말도안되는 독도영유권 억지주장이 있는 와중에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 독도를 지킨
안용복은 더욱 높여지게 되었고 그 이름이 빛나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3권>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안용복기념사업회에 남긴 휘호>
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 (國土守護, 其功不滅)
울릉도 및 울릉도 부속도서인 독도는
이전에 삼국시대에 '우산국' 이라는 한국의 소국이 존재했던 곳으로
우산국 사람들은 사납지만 우둔했으므로
신라 지증왕시기 신라장군 이사부는 군사를 이끌고
그들에게 나무사자를 보이며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들을 섬에 풀겠다 위협했고
결국 우산국 사람들의 항복으로 한국의 영토가 됬고
조선 안용복에 의해 또다시 일본의 침탈에서 지켜진 것입니다
숙종대에는 안용복의 일본의 침탈에 맞선 독도수호 이야기 이외에도
또다른 영토 이야기가 있는데
이번엔 중국과의 영토분쟁인 '간도' 이야기인데
조선은 숙종의 아버지 현종대에 '경신대기근'이라는
기상이변으로 인한 대흉년 , 대재앙을 겪어
수많은 인구가 굶어죽었고
이에 많은 백성들이 조선을 떠나 사람이 없고 풍요로운 북방지역인
만주로 이동했고
또 청나라 지배층인 만주족(여진족)들은 만주지역을 자신들이 일어난
신성한 지역이라며 중국인인 한족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봉금령을 시행해
인구가 매우 적고 풍요로운 땅은 넓어 조선 북부백성들이 몰래 인삼이나
모피들을 얻으러 다니고 있었고
결국 이로 인한 조선과 청의 영토분쟁이 발생하자
청나라 강희제는 조선과의 국경을 확실하게 정하고자 해서
'백두산 정계비' 라는 경계 표지물을 설치해
조선과 청의 영역을 지정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문>
오라총관 목극동이
국경을 조사하라는 교지를 받들어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고
서쪽은 압록강으로 하고
동쪽은 토문강(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하여
강이 갈라지는 고개위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노라
강희 51년(숙종38, 1712) 5월 5일
여기서는
'서쪽 국경으로는 압록강 , 동쪽 국경으로는 토문강(두만강)'
이라 했는데
청나라 대표단 관리 목극동은 물의 지류를 정확히 보지 않고
저게 두만강이겠거니 하고 대충 비석을 세웠고
또 토문강=두만강으로 파악했는데
조선에서 국경선 푯말을 박고있는데
목극동이 본 토문강은 두만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점차 만주지역으로 흘러가는 다른강인 것을 알게됬고
조선조정은 당황했지만 조선영토가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때문에
이 사건을 조용히 묻어두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이북지역인 이 지역은
조선과 청 사이에서 매우 애매한 땅이 되어버렸고
사이섬이라는 뜻의 '간도' 라 불리게 됬는데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흉년기 등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자주 북방 간도지역으로 이주했고
결국 조선(대한제국) 은 불어난 간도지역의 조선인들을 관리하기위해
1903년 간도에 관리를 파견해 실효지배하기도 했는데
당시 간도관리사로 이범윤이 파견되 간도를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 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뺏기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리자
일본은 조선이 관리하던 간도를 점령하다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청나라에게 경제적 이익인
철도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넘겨버렸지만
을사늑약은 일제가 한국대신들을 총칼로 위협해 맺은
불법조약이기에 무효라 보는게 정설이고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라 공식인정했습니다 (2011년 9월 21일)
이후에도 간도는 일본의 관리가 허술했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넘어가며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간도는 중국 공산당군이 점령했다가
중국의 영토로 귀속됬고
오늘날에도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시기
흉년과 가혹한 식민지배등을 피해 간도로 이주해간 한국사람들이
간도 및 만주지역에는 많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을 '조선족' 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해도
조선족은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만주와 고구려 역사왜곡 및
민족주의 열풍 등으로 만주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인 조선족들은 동포인식으로
좋은 이미지가 생겨나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오게 되었지만
오늘날 점차 조선족들은 대림동 등 여러 지역들에 모여살며
중국과 연결된 범죄와 연루되거나 엽기적 살인범죄등을 일으키기도 해서
한국의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고
또 한국어와 중국어가 둘다 가능해 한국(대한민국)과 중국 , 북한과 중국을 잇는
징검다리 역활도 하고 있고 단순히 편견어린 시선으로 봐서도 안되지만
하여튼 오늘날 인식은 썩 좋지 않아보입니다
<라봉봉>하여튼 숙종시기는 강력한 왕 숙종의 추진력으로
크나큰 경제발전도 이뤄졌고
숙종은 나름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바꾸는 개혁정책을 시행했다는 의의가 있는 인물이고
중국과 일본과의 영토분쟁도 현명하게 넘겨 조선의 권리를 지켜냈다는 의의가 있는 인물입니다
안용복과 독도이야기는 일본의 주장이 너무 비과학적인 사이비적 주장이라
별 감흥은 없었는데
간도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읽으며
역시 한국인들에게는 고구려와 한민족의 긍지가 서려있는 땅이어서 그런지
아쉬운 점이 많았고 하여튼 오늘날 대한민국은 간도는 커녕 남북통일도 안되 대륙으로 향하는
그 어떤 기운같은게 탁 막혀있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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