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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을 꿈꾸던 효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효종의 맏아들이자 세자가

조선 18대왕 현종이 되었는데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봉림대군시절에 인질로

청나라 심양에 가있었을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현종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난 임금이기도 했습니다

 

현종이 효종 생전 효종의 맏아들로서 세자시절에 있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효종에게 귀여운 아기곰 한마리를 바쳤는데

1년뒤 곰이 커서 사람들 말을 안듣자

내시가 곰은 사람을 해칠수도 있으니 죽이라 청했고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세자였던 현종이 나서서

 

<세자였던 현종>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

 

라며 곰을 산에 풀어줄 것을 청했고

효종은 어진 마음의 세자에 기뻐하며

 

<효종>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착했던 현종은

조선에서 얼마 안되는 세손(왕의 손자) , 세자를 거쳐 임금의 자리까지 오른

정통성이 뚜렷한 인물이었지만

현종은 착했지만 몸도 약하고

유약해서 15년의 재위기간내내 신하들의 권력다툼에

이도저도 못하고 휘말렸던 군주였습니다

 

현종이 재위할 동안에는 청나라도 조선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조선 역사상 최악의 흉년이 들었고

이 사건을 '경신대기근' 이라 합니다

17세기쯤 지구기온이 1℃ 정도가 떨어지는 소빙하기 기후가 나타났는데

지구기온이 1도씨정도가 떨어지는것만 해도 지구 환경에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다 하고

조선 뿐만 아닌 전세계적인 대기근이 현종시기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같이 농업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여서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피해와 사상자가 나왔고

현종시기 조선은 대재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폭우 , 홍수  , 가뭄 , 전염병 , 메뚜기떼 천만마리 , 강풍 , 태풍 , 해일 , 대기근 등

온갖 재앙같은 기상변화가 일어났고

조선에는 곡식생산이 안되 생지옥이 펼쳐져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고 전국적으로 갓난아이들은 버려지고

늙은 부모가 버려지고 부모는 어린 아이들을 죽여 고기를 먹는 등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워낙 참혹한 대기근과 재앙의 시대였기에

사회적으로 용인됬던 시기였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뿌리라 비유되는데

뿌리가 죽어가던 시기였고

결국 지배층인 양반세력도 경신대기근의 대재앙을 피해갈 수 없었고

재상이나 명문가같은 고위직 인물들도 10여 명이나 사망했던 시기였고

조선시대 초기부터 엄청난 권위가 있었던 양반들도 귄위를 잃게 되었고

그렇게 조선시대 후기 현종대를 거치며 많은 양반들도 몰락해갔습니다

 

당시에는 농업기술도 발달하지 못해

조선 백성 , 양반 할 것 없이 어떠한 대책도 없이 죽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사 최악의 대재앙 '경신대기근(1670~1671)'

 

<경신대기근 당시 노인들의 발언>임진년 병란도 이것보다 참혹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피폐해진 재정을 위해 조세제도에 대대적인 칼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전부터 시행되며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대동법은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며 지지받게되

현종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됬습니다

 

또 조선백성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

유민이 되어 사람이 없고 풍요로운 편이었던 만주로 이동했는데

이곳을 향하는 조선백성들이 늘어나며

청나라와 영토분쟁이 생겨났고

결국 숙종대 이르러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저 간도문제가 생겨나게 됬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현종시기는

1,2차에 걸친 예송논쟁과 경신대기근 이게 주요사건인데

예송논쟁은 권력자들의 아귀다툼에 의한

당파싸움이자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야기되고

백성들이 대기근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양반들은 파벌싸움에만 몰두했다고도 이야기되지만

실제 1차 예송논쟁은

기근 10년전에 , 2차 예송논쟁은 현종 말기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경신대기근기간동안에는 양반들도 어떠한 대책없이 죽어가던 시기라

실제 백성들이 죽어가는데 권력다툼만 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송 논쟁이란

1차 예송논쟁과 2차 예송논쟁으로 나뉘는데

1차 예송논쟁은 1659년 효종 승하 후

인조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 이자

효종의 의붓어머니 자의대비가 죽은 아들 효종을 위해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에 대한

신하들의 논쟁이 벌어졌는데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논쟁)

서인(여당)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은 둘째아들이니

1년상을 치러야 한다했고

남인(야당)들은 효종은 둘째아들이지만 국왕이 되었으므로

3년상을 치뤄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조선후기 서인 노론의 영수이자 조선의 성리학자로 '송자' 라고도 높여진 인물인 '송시열'

 

당시 조선 조정 및 조선 전체가

이 상복문제를 두고 여러 의견들이 난무하며

불가사의한 토론이 펼쳐졌고

결국 신하들의 다툼을 지켜보던 현종은

신하들 견제등을 위해 서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년상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

 

그렇게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1674년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사망했는데

이때도 자의대비는 살아있었고

이번에도 자의대비는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냐고 논란이 벌어져

2차 예송논쟁이 시작됬는데

맏며느리(첫째며느리)는 1년 ,

둘째며느리는 9개월 정도만 하면 됬고

이에 송시열 및 서인들은 효종은 첫째아들이 아니니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는 첫째며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9개월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 주장했고 (쓰면서도 참 귀찮고 복잡합니다)

남인들은 1년상을 주장했는데

슬슬 국왕경력도 오래 생기고 정국을 장악하고

큰 권위를 가진 서인 및 송시열등에 부담을 느낀 현종은

자신의 아버지 효종이 왕이었음에도

둘째 아들 취급을 받는 것에도 불만을 느끼기도 했고

결국 이번에는 1년상을 주장한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2차 예송논쟁

 

그렇게 2차에 걸친 예송논쟁은 끝이 나게됬고

 

그러한 예송논쟁이 무엇을 남겼냐 함은

조선 조정의 의미없는 당파싸움 및

유교 및 성리학의 진실된 이해와 탐구가 아닌

제사나 허례허식에 집중한 조선 기득권 세력의 무능함을 이야기하는데 이야기되며

오늘날 예송논쟁은 이상한 것으로 다투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고

'당파싸움' 의 대표적 사례라 이야기되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차 예송논쟁 이후

얼마후 현종은 사망하게 됬고

현종은 나름 신하들 사이에서 균형자적인 역활을 했고

성품이 착했는데

딱히 신하들을 괴롭히거나 했던 임금은 아니었기에

무능한 이미지는 있으나 어질고 나름 여러 개혁도 실시한 임금이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현종과 숙종대가 배경인 말을 고치는 마의 馬醫 에서 시작해 왕을 치료하는 어의에까지 올랐던 남자 백광현의 이야기를 다룬 메디컬 사극 '마의' , 출처 :  MBC 월화 특별기획 : 마의 (2012년 10월 1일 ~ 2013년 3월 25일)

 

<라봉봉>현종대에는 무슨 일들은 있었는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여러 이야기를 남긴 그의 아들 숙종에 비해

현종은 딱히 뚜렷한 이미지는 없는 인물이고

그의 재위기간동안 예송논쟁이라는 조선사 희대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기에

유약하고 안좋은 이미지도 있는 임금이지만

그의 아들 숙종이 절대왕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나름 아버지로서 탄탄한 왕권을 남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역사는 유명하고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위주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나름 그들의 선대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면

노력하고 고생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현종은 경신대기근 등 어려운 시기에 왕이 되어

나름 유능한 모습들을 보이며 민생안정에 노력해

아들의 빛나는 길을 열어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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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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