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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괄의 난(인조 2년)' 이 우여곡절끝에 진압됬으나

이괄은 북방을 지키던 장수로서 모든 조선 북방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기에

이괄의 난 이후 조선 북방에는 구멍이 뚫렸고

 

원래 북방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동시에 관리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이 모두 북방에 신경을 쓰지 못하자

임진왜란으로 만주에서 성장해 세력을 키웠던 여진족은

후금을 건국하고

대륙(중국)을 집어삼키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괄의 난 이후 조선 북방에 구멍이 뚫리자

중국 명나라의 든든한 동맹이자 후방이었던 조선을 먼저

공격해 제압해 놔야겠다 생각한 후금이었습니다

 

함부로 명을 침공하다가는 조선에게 후방이 털릴가능성이 농후한 후금(만주)의 위치

 

왜 중국을 공격하는데 한국을 먼저 공격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시간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 (예 :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삼국시대)

등을 해보면 만주같은 지역에 자리잡을 경우에는

빠른 기동력으로 풍부한 자원이 있는

중국을 침략하기가 쉬운 지형이지만

대신 중국을 공격할때 한국지역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을 경우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 지형이고

후금 내부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더욱 두터워진 조선과 명의 관계를

경계했는데

 

그나마 광해군 시기에는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하며

후금과 명 사이에서 적당히 유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적극적인 '친명배금(명과 친하고 후금을 배척한다)'

정책을 시행하였고

한창 강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후금을

'오랑캐' 라고 크게 무시했습니다

(여진족 역시 고구려와 발해에서 나왔고

조선 초에는 여진족은 조선인들을 존경하고 부모같이 받들었는데

여진족을 포용하기도 했던 조선 태조 이성계 같이

한편으로는 한민족이 포용해

만주를 수복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름 광해군때 길러놓은 북방 정예군은

이괄의 난으로 모두 사라져버렸고

이에 결국 1627년(인조 5년) 음력 1월 8일

3만 후금군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

 

라는 명분으로

포로로 잡은 조선인들을 길잡이로 삼아서

압록강을 건넜고

차근차근 조선 북방을 점령하며

유목민족 답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하해

15일만에 평양성까지 도달합니다

 

후금의 정묘호란 진격로

 

결국 평양까지 함락되

조선군은 개성으로 후퇴했고

인조와 신하들은 옛날 고려의 대몽항전 시기처럼

 

'유목민족=해전에 약함'

 

이라는 경험을 토대로

강화도로 피난갔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조정을 나누는

'분조'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평안북도 용천군의 이립은

의병을 모아서 후금군의 후방을 교란했고

(하여튼 조선시대 '의병' 은 일본이나 후금도

예측하지 못한 큰 변수였습니다)

 

이에 고립될 위기에 몰린 후금군은

조선 정부에 명나라와만 교류하지 말고

후금과도 교류할 것이며

후금과의 '형제의 맹약' 을 맺고

후금이 형 , 조선이 동생을 한다는 조건 등으로

조선과 조약을 맺고 물러갔고

이 사건을 '정묘호란(정묘년의 오랑캐들의 난)'

이라 합니다

 

평소 오랑캐라 무시했던 후금군이

명나라를 격파하며 이미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조선조정이었지만

후금과 명의 전투를 멀리서 구경한 것보다

직접 당해보니 그 아픔이 더 컸는데

(그럼에도 역시 정신은 못차림)

 

더욱 세력이 강성해진 후금은

이후 1632년 '형제의 맹' 을

'군신의 맹' 으로 바꾸자 요구해왔고

이는 후금이 형 , 조선이 동생하던 양국관계를

후금이 임금 , 조선이 신하로 하는 관계로서

이미 형제의 맹도 굴욕적이라 여기던 조선 내부 분위기였고

군신의 맹을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형제의 맹과 군신의 맹의 차이 , 라봉봉 고퀄그림 ㅇㅈ ?

 

결국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청나라)'이라고 고치고

칭제건원(황제를 칭함) 했는데

칭제건원 직전인 1636년 2월에

후금사신들은 조선의 반응 떠보기 위해

조선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명나라만을 황제국으로 모신 조선 정부가

이에 후금 사신을 홀대하고 후금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성균관 유생들은 후금 사신들의 목을 베라 촉구하고

사신들이 지나갈때 조선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돌아다니거나

조선 백성들이 후금 사신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등

후금 사신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 급하게 조선을 탈출한 후금 사신들은

본국에 돌아가 이 사실들을 보고했습니다

 

 

1636년 4월 후금 청태종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청나라) 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했고 '여진족' 이라는 이름을

'만주족' 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때 청태종은 즉위식에 방문한 조선 사신들에게

황제에게 신하가 행하는

삼궤구고두례 (세번 무릎 꿇고 절을 하며 아홉차례 머리를

조아리는 예) 를 요구했는데

조선 조정의 지시에 따르던 조선 사신들은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목숨을 걸고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했고

결국 청나라 관리와 무장들이 달려들어

조선 사신들을 구타하자

조선 사신들의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졌고

 

청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들의 목을 베자는 제안을 내치고

조선 사신들에게 선물과 조선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담은

국서를 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평소 명나라를 정복할 꿈이 있었던 홍타이지 역시

후방지대인 조선을 너무 자극하지는 않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청태종 홍타이지

 

그러나 이 사건들로 인해 조선 조정 내부에서는

반청감정 및 주전론(전쟁을 하자는 의견) 이 매우 강해졌고

조선은 결국 양국간의 관계파탄은 청의 책임이라는 국서를 보내고

청과의 전쟁을 준비했는데

 

당시 인조정권 및 조선조정 내부에는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시기 활약한 뛰어난 장수들도 사망해갔고

이괄의 난으로 정예 군사 및 우수한 지휘관이 사라졌다는 점

등에 실전 경험자들은 대부분 사라져갔고

딱히 무언가 군사적 태세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청나라 내부에서도 넓어지는 정복지 등에

점차 만주지역 인구는 불어가는데

명과의 관계 악화로 중국에 모피나 인삼판매를 못해

경제적 , 식량자원적으로 고립되가던 상황이었고

결국 청나라는 대륙을 침공하기로 결심하고

후방의 조선을 먼저 제압해놔야겠다는 생각으로

청태종 홍타이지는

대청질서를 거부한 조선에 대한 침공을 강행했습니다

 

병자호란 침입로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태종 홍타이지는 장수 용골대 등을 보내

청나라의 모든 병사들을 쥐어짜서

만주족 , 몽골인 , 한족(중국인) 혼성부대 1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했고 (병자호란 발발)

조선을 벼르고 있던 청나라는

이전 정묘호란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기 전에 빠르게 수도 한양을 점령하려 계확했고

의주 백마산성에서는

조선 장수 임경업의 정예부대가 있었지만

청나라군은 임경업군 및 조선의 산성들을

모두 우회하거나 무시하고 빠르게 남하했고

이는 이괄의 난으로 조선 북방군들이 모두 사라지자

조선 북방 경계선이 모두 뚫려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임경업 , 인조 시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로 소설 '임경업전' 의 실제 주인공

 

결국 급보를 접한 인조는

왕자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급히 피난가려 했지만

이미 청군은 한강을 도하해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김포에 도착해버렸고 결국 인조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으로 피난갔고

조선 수도 한양은 병자호란 개전 8일만에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청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국서>

,,,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 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조선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 주는지 보고 싶다 ,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구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난간 인조 및 조정대신들은

산성안에서 1만 2천군사와 함께 방어태세에 돌입했는데

미처 남한산성 외부 식량고에서 식량을 운반하지 못했고

쌀 1만 4천여 섬 , 간장 100여독 즉 50일분의 식량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남한산성 내부 장병들은 굶주림에 전의를 상실하고 위축되었고

군 지휘권자였던 도원수 김자점은

혼란속에서 지휘권을 놔버려

지방의 조선군사들 역시 어찌할 줄을 몰랐고

청나라군의 남한산성 포위속에

45일째가 되자 추위와 배고픔속에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지쳐갔고

군사들 역시 기력을 잃었고

결국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 내부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싸우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

 

남한산성 고립된 공간속 나라의 운명을 걸고 맞선 주화파 대신과 주전파 대신의 이야기와 병자호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한산성' , 출처 : 남한산성 (2017) 南漢山城, The Fortress/Namhansanseong

 

더이상의 항전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인조는

결국 항복을 하기로 결정했고

신하 최명길을 보내 항복 문서를 보냈고

최명길은 청태종에게 최대한 항복한 인조에 대한

배려를 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결국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항복의 예를 하기로 하고

삼전도(오늘날 서울 송파구 삼전동의 나루텃가)

에서 청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례(3번 무릎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를 행했고

한겨울 추위속에 조선 국왕 인조가

청태종과 청나라 군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맨바닥에다가 청태종 앞에 절하며 머리를 찧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 청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은 조선인조

 

청태종앞에서 머리를 찧는 인조인데 실제로 머리를 찧었는지 , 피가 날정도로 찧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있으며 굴욕적 사건이라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청태종도 인조의 자존심을 굽히게 하려는 목적이지 이렇게 잔혹하게 항복의 예를 표하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이덕화 배우는 전두환같은 무골형 인물 연기가 갑인데 좀 쫌생이 캐릭터를 인조에 해야 됬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극적인 연출은 맞다고 봅니다 :: 출처 JTBC 주말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2013)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인조는 단에 올라서

청태종이 주는 차를 마시고 잔치를 했으며

청나라 장수 용골대에게 청나라 의복(모피옷)을 받아 갈아입고

청과의 군신관계를 맺어 조선은 신하국이자 청의 조공국이 되었는데

삼전도에서 청태종에 항복하는 조선 인조의

무기력하고 굴욕적인 모습이 나타난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

 

이라 합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태종은

삼전도에 전승을 기념하는 삼전도비를 세우게 했고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태종은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및 수많은 조선 양민(일반 백성) 들을

인질로 잡아 청으로 돌아갔습니다

 

삼전도비(대청황제 공덕비)

 

청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백성들에

대한 기록으로는,,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 

 

'우리 임금이시여 ,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 (청으로 인질, 노예 등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이름) 가 만 명을 헤아렸다

 

청나라에게 병자호란은 조선 정복이 아닌

후방 안정이었기 때문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인조를 폐위시키지는 않았지만

삼전도의 굴욕으로

'문명국의 왕(인조)' 이 오랫동안 자신들을 오랫동안 모셔오던

'오랑캐들(청태종 홍타이지)' 에게 머리를 찧자

많은 조선 백성들은 전쟁으로 인한 큰 피해 및 정신적 충격을 입었고

(조선은 건국 초부터 여진족을 틈틈히 조져왔음)

 

오랫동안 모셔오던 명과는 단절된 상황까지 갔고

청에 바쳐야 하는 조공량은 엄청나게 커졌고

청은 인질로 잡아간 조선백성들을 돌려보내려면

돈을 바치라 요구해서

많은 백성들이 청에 잡혀간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오려면

청에 많은 돈을 내야 했는데

결국 조선 권력자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빨리 구하려

많은 돈을 지불해 데려왔고 ('속환' 이라고 함)

이에 점차 조선 포로들의 몸값이 엄청나게 오르게되자

돈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랄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시대였고

결국 청나라 수도 심양에 있는 조선인 포로는 60만명이나 됬고

끌려간 조선 여인들은 청나나 군사들에게 강간당하거나

첩으로 쓰이다 남편이나 본처의 학대등으로 장애인이 되거나 죽었습니다

 

그나마 집안에 돈이나 힘이 있어

우여곡절끝에 청에서 조선에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고향으로 귀향한 여자)' 라고 불렀는데

권력가 집안의 환향녀들에게도 역시

많은 주홍글씨(보이지 않는 낙인)가 씌어졌고

조선 정부나 백성들 역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여인들을 포용하지 않고

 

'자살해 절개를 지키지는 못하고

오랑캐들에게 순결을 잃고 돌아왔다'

 

는 꼬리표를 씌어 차별을 해

환향녀를 욕했는데

환향녀은 '화냥년' 이라 변하게 되었고

화냥년은 음란한 여인을 욕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에 환향녀들은 절망하다가

나무에 목을 매거나 강에 몸을 던지는 경우들이 늘어났고

이에 골치 아파진 조선 정부 및 인조는 여러 의논을 하다가

조선 지역 여러 주요 강들을 '회절강' 으로 지정해서

이곳에서 몸을 씻은 여인들은 절개가 회복된 것으로

국법으로 정하기도 했는데

결국 전쟁의 아픔에 대한 웃지못할 미봉책 및 헤프닝같은 사건들이었는데

그럼에도 조선 사회는 이 여인들을 냉대했고

환향녀들의 자식을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뜻의

'호로자(오랑캐의 자식)' 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를 배운데 없고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한국에서 욕하는 말인

'호로자식' 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은 7년동안 길게 이어진 임진왜란에 비해

속전속결로 3달만에 끝나게 된 전쟁이었고

오늘날에도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여러 조선인들의 활약 이야기거리가 많은

임진왜란이 주로 이야기되지만

그 충격과 피해는 임진왜란 못지않게 컸고

많은 조선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기에

그 피해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이에 조선 백성들은 임진왜란 못지않게

엄청난 비극이었던 이사건에 대한 굴욕감과 패배감이 컸고

이에 그러한 것에 대한 자존심을 정신적으로나마 회복하기 위해

'임경업전' 이나 '박씨부인전(=박씨전)' 같은 소설들이 출판됬고

특히나 박씨부인전은 한국 한글 고전소설의 명작중의 명작으로서

박씨부인이 초능력으로 청나라 장수 용골대등을 물리친다는 이야기지만

당시 시대상과 이야기가 잘 구성되있어

한국 국문학사의 문학적 가치가 높은 한글고전소설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씨부인전 , 무의미하고 수준낮은 퓨전사극 열풍이 부는 요즘시대에 차라리 이런 국문소설 고증에 충실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 더 나을거 같습니다

 

한편 오늘날에도 병자호란시기의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창작 작품들이 나타나고 흥행했고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드라마 추노나 영화 최종병기활 등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혼란한 시기 민초들의 삶을 그려 크게 흥행한 작품 '추노' , 출처 : KBS 2TV 수목 드라마 : 추노 (2010)

 

병자호란 시기 활 하나를 들고 청나라에 끌려간 여동생을 구출하는 이야기가 담긴 무협액션사극영화 '최종병기 활' 로 짜릿한 액션 외에도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라는 명대사가 있음 , 출처 : 최종병기 활 (2011) War of the Arrows

 

또 병자호란으로 청의 유목풍습들이 조선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만주에서는 콩농사가 활발했는데

만주족(여진족) 들은 이동생활을 하며 말에 음식들을 싣고 이동했고

이때 삶은 콩을 볏집에 넣어 말에 매달아놓고 다니며 발효시켜 먹었다는데

이로 인해 '청국장' 이 한국에 들어왔다고도 하고

이미 한국은 이전부터 발효된 콩을 먹었기에 그전부터 청국장은 있었다고도 하나

청나라식 유목적 장만들기 풍습등이 한국에도 전래됬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국 전통음식 '청국장' 으로 일본 낫토와도 비슷하나 청국장은 국으로 먹고 낫토는 생으로 먹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외에는 이미 조선에는 고려시대 몽골간섭기를 거치며

이미 유목풍습이 많이 들어오기도 했기에

청의 문화유입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청역시 중국인들에게 유목민 풍습인 변발을 강요하며

엄격히 통제하며 지배할때와 달리

조선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조선에 대해 별다른 간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동아시아의 중심이나 완충지 역활을 했던 한국이라

당장 조선이 사라지면 일본때매 골치아파지기도 함)

 

그럼에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인들은

병자호란의 치욕속에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적대했던 것 처럼

청을 상국으로 모셨음에도 청에대한 적대감과 북벌로 치욕을 씻자는 의견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 못지않는 대격변이 있었고

동아시아 세계는 청나라를 중심으로 힘이 움직여지고 있었고

당대 병자호란때는 임진왜란같이 여러 외국이 참전하는

국제적 전쟁으로 발달하지는 않았고

조선과 청 사이에서만 끝나게 되었지만

여러 나라들의 반응도 있는데

 

먼저 명나라는 조선에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라고 했고

 

일본 에도막부는 조선에게

'군대를 보내 도와줄까요?'

 

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던 조선정부는

아무리 급해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는 없기에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다굴(은어로 몰매를 뜻함)당하기 쉬운 조선의 위치

 

또 청나라가 인조를 폐위시키거나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먼저 청나라 역시 병자호란때 명나라를 맞설

군사력 일부만 냄겨두고 모든 군사를 조선에 보낸 것이었기에

나름 청태종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조선과의 전쟁을 오래 끌기에는 부담이 컸고

조선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까지도 없었고

또 완충지대였던 조선이 멸망하면 일본과 맞서야하기에

조선을 냄겨두는 것이 전략상으로 유리했고

굳이 조선에게 청나라의 복식이나 문화들을 강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것은

연암 박지원 선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이것이 청 태종이 관대해서가 아니라 

조선이 기마와 전투에 편한 청나라 의복을 입게 되면 

군사를 길러 청나라에 복수할 것이니 

허례허식이 가득한 명나라 의복을 유지하게 해서 

조선을 계속 문약하게 만든다라는 

청 태종의 계획이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라고 날카롭게 말씀하셨고

과연 정말 그랬는지는 추측이 난무할 뿐이지만

전통적으로 혹은 오늘날까지도 북방지역의 옷이 더 간소하고

효율적인 옷들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하여튼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은 크나큰 굴욕 및 패전의 상처를 입었고

오랫동안 명을 모셔오며

중국을 중화라 부르며

자신(조선)들을 중국 다음에 버금가는 문명국이라며

소중화(작은 중화)라 부르던

조선의 '중화사상' 이 붕괴했습니다

 

중국 사방은 모두 오랑캐이고 가운데 중국만이 문명국이라 여기는 중국인들의 배타적 사상 '중화사상'

 

당시 청나라 역시 명나라의 압박속에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조선을 제압해 놔야했던 시기였고

병자호란으로 조선 공격이 성공하자

곧바로 중국 대륙으로 말발굽을 돌리게 되었고

당시 중국 명나라 내부에서는 여러 도적들의 봉기 및

내부혼란이 컸고 청나라의 위협속에

1644년 '이자성의 난' 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의 혼란을 틈타 중국을 노리고 있었던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정복합니다

 

청제국 최대 영토

 

<라봉봉>과연 인조는 유연하게 중립외교를 주장했던

광해군에 비해 무능하고 아집고 고집에만 가득찬 무능한

임금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거는 오늘날 기준에서만 보면 그렇다 할 수 있고

실제로 임진왜란 선조와 더불어 병자호란 인조는

오늘날 조선 역사 무능한 임금 투표등에서

순위권을 다투는 임금이기는 하지만

 

광해군시대대에도 광해군 역시 임금으로서 여러

실정과 폭정들을 했던 전례가 있었고

친명배금정책을 주장한 인조와 서인세력들을 단순히

무능한 사대주의자라고 볼수만도 없는게

일단 명나라는 국고를 탕진하면서까지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고려천자' 라는 명나라 조정 내부의 비웃음을 받아가면서까지

조선에 엄청난 원조를 했었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청을 배척하자는

주전파와 청과도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주화파의 다툼 논쟁은

여러 이야기 되는 이야기거리이기는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에게 명나라는 그냥 중국 국가가 아닌

임진왜란 시기

'재조지은(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 의 나라였기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문화들이 엄청나게 수입되고

중국 삼국지 인물인 관우가 왜군을 물리쳤다고

조선에 관우 사당이 세워질 정도였고

 

단순히 조선 내부의 친명분위기는 분위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의리에 대한 문제였기도 했고

명은 멸망전까지도 세계 최강대국이었고

결국 청의 직접적 공격보다는 내부반란등으로 무너진것이었기에

조선 입장에서는 함부로 크게 도와준 경험이 있었던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라는

청의 요구도 무리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어서

광해군 역시 청이 일어나는 상황 이외에도

명에대한 의리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할 수 있기에

이도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명나라는 미국이었고

오늘날 대한민국(남한) 사람들에게

미국이 위기에 빠졌는데

 

'도울것인가 vs 돕지 않을 것인가'

 

라고 의견이 나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고

한국전쟁때 수만명의 미국군이 한국을 지키다 죽은 상황에서

그것을 무시하자는 의견이 나타난다면

그 역시 공공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고

오늘날 보기에는 인조가 무능하다고만 여겨질 수 있지만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입니다

 

하여튼 인조 역시 선조같이 전란에 대한

큰 책임이 있었고

병자호란 이후에도 어찌할 방안을 내놓다기보다는

청나라에 대한 분노감을 가지고 지냈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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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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