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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행보는

별다른 행보는 없었고

굳이 선조의 이야기를 더 하자면

과연 선조는 단순히 이순신을 질투하던 요즘말로 '찌질이' 임금 이었냐인데

선조는 즉위 전부터 왕실인물들 사이에서는 가장 총명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이었고

선조시기 수많은 인물들이 나왔다는 점은 선조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선조와 비슷하다고 이야기되는

이승만 대통령 역시 한국전쟁시기 수도 서울과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홀로 도망쳤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독립운동가 출신에

국제 정세에 밝아 미국과 우호관계를 확립해 한국의 이익을 꾀한

인물이였다 할 수 있는데

조선 선조와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문제는

결국 전쟁에 대한 수습실패가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은 것이었고

일단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질투하기는 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무명시절일때 인물됨을 보고 파격승진 시킨 인물로

이순신 장군을 발굴해 낸 인물은 선조가 맞습니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쓰며 문득 든 생각은

백성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북방으로 도망간 선조임금이 아닌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며 백성을 보호한 이순신 장군만을 따르고 찾았다는 점에서

선조가 단순히 이순신 장군을 인간적으로 질투만 했다기 보다

전란의 와중에 피난길에도 백성들의 질타를 받으며

무너질대로 무너진 임금과 조정의 권위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선조였다 할 수 있고

그런 와중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군권 이외에도 민심까지 몰리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이 군권과 민심을 얻었던 옛날 태조 왕건이나 태조 이성계와 같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에 대한 국왕으로서의 큰 위기감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일단 특히나 어린이 서적에서는 선조=악 , 이순신=선 의 구도가 강하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되고 있고

결국 가장 큰 책임은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있었던 것이 맞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왕비가 죽자 51세의 나이로 19세의 인목왕후를 두었고

선조 말년즘 인목왕후는 갑자기 선조의 아들을 낳아버렸고

그동안 왕비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후궁들에게서만 아들을 얻은 선조였는데

이미 후궁에서 낳은 장성한 세자 광해군이 있었지만

적자의 아들 '영창대군' 이 태어나게 됬습니다

 

영창대군은 1606년에 출생했고

선조는 2년 후인 1608년에 사망하는데

사실상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정식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이라는 점을 빼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였을 뿐이었습니다

 

일단 선조의 다른 아들들 이야기를 하자면

선조가 후궁에게서 얻은 첫째아들 임해군은 취미로 사람을 죽이는 등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등을 돌린 인물이라

총명했던 둘째아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급하게 세자에 임명되

혹여나 선조가 죽거나 명나라로 도망가야 할 것을 대비해 후사를 잇기 위해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 를 해서

임진왜란기 조선조정은 선조의 원조정 이외에

광해군의 소조정(분조) 을 두어 비상시 대비하게 했고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지방 백성들의 민심의 동요를 현명하게 막아냈고

의병 활동을 독려하는 등

어질고 뛰어난 모습을 보여 전란의 수습을 잘 해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급하게 세자에 책봉되 분조를 이끌게 된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대립군' , 출처 : 대립군 (2017) WARRIORS OF THE DAWN

 

이에 영창대군은 적자지만

이미 세자 광해군은 장성했고

입지가 탄탄한 촉망받는 세자였기에

선조 사후 '조선 15대왕 광해군' 이 즉위합니다

 

광해군은 조선 10대왕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조나 종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 이름인 군으로 끝난 국왕이었고

이는 신하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왕임을 의미합니다

 

선조가 영창대군을 낳았을때에는

적자이기만 했고 어린 아기였을 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소북파' 와

전란을 수습하고 오랫동안 입지를 다져온 서자 출신 광해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대북파' 가 맞섰습니다 (소북파와 대북파는 북인의 갈래들)

 

조선 붕당정치의 전개
더 간단한 버전의 붕당정치 표

 

아무리 영창대군이 적자였지만

일단 나이도 너무어리고 명분도 딱히 없어

관료들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장성한 광해군을 밀어내기는 어려웠고

결국 대북파는 소북파를 밀어내고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했는데

광해군이 왕이 되기 전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는 치맛바람이 드센 인물이었는데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에게

 

<인목왕후>왕자를 세자로 불러야 합니까 ?

아니면 대군으로 불러야 합니까 ?

 

하고 물어보거나

영창대군에게 왕실 법도를 어기고

세자 옷차림을 입히는 등 늙은 선조의 어린 신부로서

권력욕에 불타 철없고 경솔한 짓을 했고

이는 권력욕에 임진왜란때 고생고생하며 백성들을 지킨

세자 광해군을 아예 무시하는 처신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인목왕후와 그녀를 지지하는 소북파의 행태들은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매우 안좋게 여겨졌고

결국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북파들은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조작해

9살(만 8세)의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몰아 강화도에 유폐시킨 후

방안에 영창대군을 가두고 방의 온돌에 불을 매우 뜨겁게 때게 한 후

음식도 끊었고

9세의 영창대군은 뜨거운 방바닥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밤낮으로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힘이 다해 떨어져 

옆구리 뼈가 다 타서 사망했습니다

 

혹은 또다른 기록으로는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된 영창대군을 몰래 빨리 죽이라했고

이에 영창대군을 지키던 사람은 영창대군 방안에 불도 안 때서

추운 영창대군은 장농위에만 앉아 지냈고

때때로 섬돌(문지방 앞의 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해 빌기를

 

<영창대군>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고 말했는데

이후 영창대군을 지키던 사람이

영창대군의 음식에 잿물을 넣어 올렸고

그것을 먹은 영창대군은 그것을 마시고 3일만에 죽었습니다

 

불을 떼워 죽였건 잿물을 먹여죽였건

9살의 어린 이복동생에게 잔인했던 광해군이었고

당대 강화도 사람들이 영창대군의 잔혹한 죽음에 슬픔에 목이 메었다고 합니다

 

이미 광해군은 적자가 아니라는 점만 빼고는

임진왜란 시절 세자가 되어 분조를 이끌며 백성들을 보호하고

의병들을 일으켜 정통성 면에서도 부족한 면이 없었던 인물이었고

임진왜란 시기 주전론(싸워야 한다는 의견) 을 주장하며

세력을 키워 조정을 장악한 북인들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기에

오히려 방계출신 아버지 선조보다 왕권이 탄탄했던 인물인데

항상 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에 이순신 장군까지 고문하거나

여러 정치적 쇼를 했던 선조에 비해

광해군은 이미 왕권이 강했던 인물이었음에도

굳이 아무것도 모르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잔혹하게 죽였고

이는 광해군의 명백한 실정이었습니다

 

영창대군 이외에도 광해군은

망나니 형 임해군 역시 독살시켰고

임해군은 생전 망나니짓을 많이 해 백성들의 원망을 샀던 인물이기에

많은 신하들의 요청이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왕이 된 이후에도 망나니 형 양녕대군을 죽을때까지 보호해줬던

동생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광해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종대왕이 너무 어질고 뛰어난 인물이었음)

 

하여튼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독살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를 궁에 유폐시켰는데

이를 '폐모살제' 라고 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시킨 광해군에게는 재위기간 내내

'패륜' 의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일단 광해군은 패륜을 제외하고는

역시 임진왜란을 수습해 백성들의 기대를 받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서 유능하기는 유능한 인물이었는데

광해군은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했고

당시까지는 나라에 세금을 내려면

지역 특산품(공물)을 내야됬는데 이를 '공납' 이라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생계인 농사를 포기하고

특산품만 찾아다닐 수는 없고

또 행정상 오류로 지역에서 나지 않는 특산품을 바쳐야 하기도 했기에

중간에서 관리들이 농민들에게 공납을 대신 해주고 대가를 받는

'방납' 이 성행했고

방납업자들은 농민들에게 높은 세금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국가에서는 조세수입이 감소하고 백성들에게 큰 폐단이 됬는데

 

방납의 폐단이 심해지자

특산품으로 바치던 공물들을 당대의 화폐격이었던

'쌀' 로 바치게 하는 '대동법' 이 광해군대 처음으로 실시됬고

나라에서는 조세 수입이 늘고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었습니다

 

물론 광해군대에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아니고

여러 중간상인 , 지주와 양반들의 반대로 100년에 걸쳐 차근차근 도입된

대동법이었지만 점차 조선에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개혁이 광해군대 일어났다고 보면 됩니다

 

대동법의 시행확대 과정 , 대동법은 '조선 최고의 개혁' 이라고도 불립니다

 

이외에도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려 하는

전후복구에 힘썼고

허준 선생님이 쓴 의학서 '동의보감' 이 광해군대에 발간되었고

동의보감은 당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쓰인 의학 서적으로서

전쟁후 고통받던 수많은 환자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중국과 일본같은 동아시아 세계로도 퍼져

중국에서 동의보감은 '천하의 보물' 이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위인이자 백성을 사랑한 의사였던 '허준'
허준의 동의보감

 

또 광해군대 명나라는 임진왜란대 조선을 지원하다

국고가 파탄이 나서 크게 쇠약해져 있었고

원래 만주지역 여진족은 명나라와 조선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명과 조선 모두 만주지역을 신경쓰지 못하자

만주에는 여진족 추장이었던 '누르하치' 라는 인물이 나타나

여진족을 통합하고 1616년 (광해군 8년) 나라 이름을 '후금' 이라 하고

명나라에 대항해 명나라에 전쟁을 포고 했고

이에 명나라는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에 1만 3천의 지원병을 보내고

강홍립 장군에게 정세를 파악하며 상황에 맞게 행동하라 지시했고

강홍립은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 후금과 휴전을 맺고

명나라에 식량을 지원하는 중립적 자세를 취했고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는 않으며 내치와 국방에 집중하는

실리적 외교방책을 수립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 라고 부릅니다

 

후금의 등장 , 광해군의 중립외교

 

그러나 광해군은 좋은 임금이었다고만 볼 수도 없는게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피폐해진 와중에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고

갑자기 거대한 궁궐공사를 해서 민심을 피폐하게 했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 로 선비들이 등을 돌렸다면

큰 궁궐공사로 인해 결정적으로 많은 백성들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리게 됬습니다

 

광해군의 문제점은

항상 잘가다가도 굳이 안해도 될 짓을 했다는 점이고

세자 시절 임진왜란 수습 공로와

임금 시절 여러 좋은 정책을 펼치며 나라를 안정시켰음에도

힘도 없는 영창대군을 죽였다거나

뜬금없는 궁궐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고

광해군을 좋은 임금(성군)이라고도 , 나쁜 임금(폭군) 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이유가 됬습니다

이에 광해군은 혼군(혼란스러운 군주) 이라고도 불립니다

 

결국 보다못한 서인 일파들은

광해군 및 대북(북인)을 몰아내려 반정을 계획했고

이에 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고 능양군(인조) 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이를 '인조 반정' 이라 부릅니다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됬다

제주도로 유배됬고 인조와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은 아예 연산군처럼 대놓고 폭군짓만 했던 임금은 아니었기에

사형당하지는 않고 폐위당하고 유배되는 선에서만 끝나게 했고

한때 세자로서 임진왜란을 수습하며 조선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인물이었고

조선의 국왕으로서 여러 굵직한 정책을 시행했던 광해군이었지만

궁궐에 살다 제주도에 유배되 작은 방에서 지내며

심부름하던 나인(혹은 계집종)이 '영감' 이라 부르며 무시해도

분노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이런면에서는 하여튼 폭군이라 보기도 그럼)

 

<나인>영감이 이전에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 

아랫사람들에게 음식까지 부탁해 김치판서 , 잡채참판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소 ? 

영감이 임금의 자리를 잃은 건 자업자득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오 ?

 

이에 광해군은 모든것을 달관한 듯 혹은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는 지

나인에게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절대왕권을 행사하던 조선 국왕에서

초라한 귀양지 늙은이가 되어

낚시도 하고 귀양지에서 조용히 지내다 귀양생활 18년만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 출처 :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Masquerade

 

<라봉봉>광해군은 여러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꽤 인기도 있는 편이기도 한데

다소 편향적으로 똑똑한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주장하다

사대외교를 주장한 인조세력에 밀려 억울하게 폐위되고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 졌다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라 볼 수 없고

 

이러한 특이한 점들은 그가 상당히 혼란스러운 인물이고

좋은점과 나쁜점들이 극명하게 두드러지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중산층' 들의 공감을 받을 인물 같고

특히나 임진왜란을 수습해야 하고

지는 해였던 명나라와

뜨는 해였던 청나라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해야했던

그의 고뇌 등은 오늘날에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및

세계 강대국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지정학적 위치의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공감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그는 여러 호감있는 이미지로도 비춰지지만

대신 폐모살제나 궁궐공사 등은 명백한 실정이기에

하여튼 인간적으로는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성군 소리를 들었을 인물인데 권력유지 측면에서는

오히려 전란 시기 교묘하게 왕권을 지켜나갔던 선조만 못했던 인물이었다 할 수 있고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도 아쉬움이 많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광해군의 성격이나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특히나

반도적 특성을 지녀 딱히 어떻다고 성향을 표현하기 어려운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도 특히 공감되고 의의가 있는 정책이라 할 수 있고

사실 광해군 이전부터 한국인들은 대륙과 해양의 교통로라는 지정학적 특색때문에

이러한 중립외교는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한민국(남한) 주변국가는 북한 , 미국 , 일본 , 중국 , 러시아 등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군사력 규모가 엄청나게 큰 나라들이고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와 특성 때문에 옛날부터 세계 국가들의

전쟁터가 되거나 번영의 중심이 되었다 할 수 있기에

오늘날에도 여러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때면

'광해군의 중립외교' 이야기는 본보기가 되는

거울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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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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