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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자

종친(왕실 친척) 이었던 하성군 이균(선조)이 왕위에 올랐는데

하성군 이균은 중종의 아들 덕흥군의 아들로서

중종의 손자인 종친이었습니다

(중종은 12명의 부인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는데

이러한 많은 부인과 자식들은 왕실에서는 후사를 잇게한다는 명분으로

한 것이었지만 중종 사후

중종의 배다른 자녀 세력들[인종 vs 명종] 의 다툼을 보면

역시 피비린내나는 정권투쟁의 불씨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성군이 종친으로서 명종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는 명종이 덕흥군의 세 아들

이정 , 이린 , 이균(하성군 이균=훗날 선조)

을 불러서 왕실의 우애를 다졌는데

조카들을 이뻐하던 명종은 자신이 쓰던

익선관(조선국왕의 왕관이었던 검은 매미 모자) 를 재미삼아

써보게 했고

이균의 두 형은 시키는대로 그대로 썼습니다

 

조선 국왕의 왕관 '익선관' ,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영친왕의 익선관

 

그러나 이균은 진지한 얼굴로 명종의 앞에 꿇어앉아서

 

<이균>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자(臣子 신하)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말했고

명종은 감탄하며

 

<명종>그렇다 이관을 너에게 주겠다

(혹은 이 관은 이제 네것이다)

 

라고 말했고

영특한 조카가 신기해 보였던 명종은 또다시

이균에게 물었습니다

 

<명종>임금과 아버지중 누가더 중하냐 ?

 

이균은 대답했습니다

 

<이균>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과 효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

 

이에 명종은 더욱 이균을 기특히 여겨

그가 크자 하성군에 봉했고

명종의 세자가 죽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명종 역시 시름시름 앓자

명종은 옛날 총명한 조카 이균이 떠올라서

이균을 불러 자신을 간호하게 했고

왕실 인물이 왕을 간호한다는 것은 곧

후계자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고

이후 명종은 다시 일어났지만 또다시 위독해졌고

이에 하성군은 후계자가 되었고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 이균은 왕위를 이어

조선 14대왕 선조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암울하고 혼란한 시대의 조선국왕을 지냈던

조선 14대왕 선조 !

그는 임진왜란때 일본군을 피해 백성들을 버리고 수도 한양을 탈출했고

충신이자 구국의 명장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시기하고 질투해

오늘날 한국사의 역적급 이미지로 남게 된 인물이지만

명종대에 이야기 같이 당시 왕실 친척중에서는 가장 총명한 인물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나름 전쟁만 없었으면

조선 중기의 정조급 인물은 됬을 인물이라

생각되는 인물입니다

 

일단 선조는 종친으로 왕위에 올라 세력이 약했고

곧바로 왕실 어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인순왕후는 선조의 영특함을 눈여겨보고

1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즉위하자마자 윤원형을 끝으로 망해가던 훈구파대신

사림파를 더욱 끌여들여서 선비들을 위한 왕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가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며

정계를 장악했습니다

 

세자수업도 딱히 없이 궁궐이 아닌 바깥에서 자란 인물이었지만

나름 사림파들이 조정을 장악하자 사림파들간에 상호견제를 시켜

왕권을 공고히하려했고 이에 이때부터 조선은

훈구파들이 사라지고 사림의 세상이 됬지만

사림파끼리 세력이 나뉘는 붕당이 시작됬는데

선조 8년 이조전랑직 임명문제 갈등으로

서인과 동인으로 사림은 나뉘게 되었고

기성관료 , 신진관료 , 학파와 지연 등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조선 정국은 옛날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린것 처럼

또다시 여야 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붕당 정치의 전개
조금더 간단한 버전의 붕당정치 전개

 

일단 당시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여러 정치적 정쟁이 있기는 했지만

외부적으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오랫동안 평화로운 편이었고

세종시대대부터 이어진 평화였기에

이를 팍스 코리아나 ('로마에 의한 평화' 라는 뜻의 팍스 로마나를 빗댄 표현) 라고도

비유하기도 합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오랫동안 살육의 시대였던 전국시대가 있었던

일본과 달리 오랫동안 번영과 안정을 누리며

비교적 외세와의 큰 전쟁 없이 내부적으로 정쟁만 좀 많이 있었을 뿐이고

당시 조선백성들은

일본전국시대로 매일같이 전쟁이었던 일본백성들과 달리

전쟁을 잘 모르고 관가의 병장기들은 녹슬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다이묘(영주) 와 사무라이들의 다투던 시기인 '전국시대'

 

선조대에 이르러 분열의 시기라 불리는 전국시대였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이 나와서 일본을 거의 통일했는데

일본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방심하다가

부하의 배반으로 허무하게 사망했습니다 (혼노지의 변)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분열의 시기 '일본 전국시대' 를 통일했고

일본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층민 출신이었고

몸도 왜소하고 얼굴도 원숭이같이 못생겼지만

(욕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겼다는 평가가 있음)

무언가 야망이 컸고 눈빛만은 총총해 주변 사람들을 압도했다 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어 온갖 잔일을 도맡아 했는데

노부나가의 변소지기를 했을때에도 변소에 아무 냄새가 없이

청결하게 했고

추운날 노부나가가 신발을 신어보니 따뜻해서

왜그러냐 물어보니 히데요시가

신발을 가슴속에 품어 따뜻하게 데워났다거나

평소 차를 좋아해 맛없는 차를 끓이는 시종들을 곧바로 칼로 죽여버린

잔혹하고 성격이 급했던 노부나가였는데

히데요시는 몇달간 무리없이 노부나가의 차 시중을 들었고

어찌 이리 맛있는 차를 끓였냐 묻자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헤헤 ~

사람의 입맛은 다 같지 않습니까 ? 

제가 먼저 맛을 보고 뜨거우면 식히고

너무 진하면 물을 탓기 때문입니다 헤헤 ~

 

이에 자신이 차를 마시기전에 미리 차를 마셨다는 것에

분노한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을 치려했지만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또다시 재빨리 말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소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사오나

다만 천하를 통일하실 주인의 차 속에 누가 독약이라도 혹시 넣었는가 싶어서 ,,,

 

라고 말했고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흡족해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아꼈고

평소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는 꽃길만 걷게 하고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의 행동대장이 되어 온갖 굳은일을 다하며

성격이 급하고 항상 전쟁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노부나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출세길이 열리게 되었고

노부나가 사후 그의 심복으로서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인물이 되었으며

한국인들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백성들과 이순신 장군을 괴롭힌 악인으로 이야기 되지만

일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처세술의 대가이자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영걸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일본 3대영걸은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의 3대영걸을 풍자한 그림으로 오다(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찧고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을 앉은 채로 먹은 건 도쿠가와(도쿠가와 이에야스) , 출처 : 에도 시대 말기 화가 우타가와 요시토라의 작품

 

나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만큼은 진정으로 충심으로 모신 인물로 보여지는데

일단 그 역시 일본을 통일하고 정권을 잡고나자

다른 영주(다이묘)들을 잔혹하게 견제하려 했고

일단 오랜 일본전국시대의 전쟁으로

무기들이 관가에서 녹슬어가고 관군들은 장부상에서만 존재했던

조선과 달리 일본 내에서는

무기와 무사(군인)들이 엄청나게 많아져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이 역시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에는 새로운 불만세력이나 위험세력이

되었다 할 수 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외국으로 눈을 돌려

조선과 명나라 , 더나아가 인도를 정복해

정복지의 백성과 땅들을

무사들에게 나누어준다는 망상을 퍼트렸고

점차 외국을 공격할 전쟁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전쟁 직전 조선의 상황을 보기 위해

일본이 통일됬다며 조선에 사신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선조와 조선 정부는 당시 통일된 일본 상황을 엿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떤 인물인지도 보기 위해

1590년 3월

황윤길과 김성일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보냈는데

이듬해 그들이 조선에 돌아와 보고했는데

서인이었던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서로 다른 의견을 말했습니다

 

<서인 황윤길>반드시 왜군(일본군)의 침입이 있을 것입니다 !!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자이름) 은

눈빛이 반짝반짝하며 담과 지략이 있어보였습니다

 

<동인 김성일>아닙니다 !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

 

그렇게 두 사신이 말한 보고가 다르자

조선 조정도 뒤숭숭한 분위기였고

조정은 별일 없겠지라는 생각과 대비하자는 생각들로 나뉘다가

형식적인 대비만 갖추고 적극적인 대비가 없었던 상황으로 이어졌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충 대비했다는 말도 있지만

임진왜란 초기 상황과 같이 결과론적으로는 대비에 허술히 했음)

 

결국 전쟁준비에 열심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랜 전쟁으로 불만에 쌓여있었던 일본 무사들을 선동 , 지휘하며

고니시 유키나가 , 가토오 기요마사 , 구로다 나가마사 등 장수들에게

15만 9천여명을 주어 조선을 침공했고

왜군이 쳐들어 올지언정

이렇게 대규모로 쳐들어올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정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명을 정벌할거니깐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데 앞장서라는 말도안되는 편지를 써서

조선에 국서로 보냈지만

조선과 일본의 중간외교를 담당하던 대마도주는

이게 조선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 생각해 국서를 온건하게 돌려바꾸어서

명을 치러가는데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의미의

 

'정명가도 征明假道'

 

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보냈고

조선은 당연히 단호히 거절했고

이것을 빌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대군을 조선에 보내는

'임진왜란(1592)' 을 일으킨 것입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들은 정명가도를 외치며

몰려왔고

적은 수로 부산을 수비하던 부산진 첨사 정발은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훈련도 제대로 안된 600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녹슨 무기들을 가지고

밀려오는 일본의 대군에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임진왜란 시작을 알리는 부산진 전투 그림 , 출처 :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조선 후기의 화가 변박

 

당시 일본군은 조총(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조선을 침략했고

당시 신무기였던 총은 오랜기간 훈련해야하는 활과 달리

배우기가 빠르고 쉬워 일본군은 이미 양에서 조선군을 압도하고 있었고

큰 화약소리가 나서 조선군들의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부산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올라오려하자

당황한 선조와 조선정부는

여진족을 물리친 '북방의 맹장' 신립장군에게 대군을 맡기는데

자만감에 빠져있었던 신립장군은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을 무시하고

전국시대를 거치며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일본군을

옛날 조선을 침략한 왜구(일본해적)정도 수준으로 우습게 여겼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검을 하사받고 충청북도 충주로 출진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총)

 

신립 장군

 

한양으로 올라오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의

18000여명의 일본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당대 조선 최고 명장 신립이 이끄는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4만여명의 조선정부군은

충청북도 충주의 탄금대에서 맞섰고

김여물은 신립장군에게 원래는 험준한 조령에서 싸우라 권했지만

신립장군은 평원에서 싸워야 기병을 쓸 수 있다며

고집을 피워 탄금대 평야를 전장터로 선택했고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던 일본군은 조선 관군을 무너트리며

신립군을 전멸시켰고 자존심 강했던 신립장군은

홀로 탄금대에 올라가 활을 당기며 일본군을 쏘아죽였고

하도 활을 쏴서 손에 열이나서 남한강에 뛰어들어 손을 식히고

다시 올라가 활을 쏘아 수십 명의 일본군을 죽였고

이것을 9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화살마저 다 떨어지자

신립장군은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 이 활약했던 탄금대 전투

 

조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신립장군마저 충주에서 무너져버리자

일본군은 조선수도 한양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올라왔고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있었던 조선정부는 어찌할 대응도 하지 못하다

결국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가기로 했습니다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한양을 버리고 초라한 행렬로 북으로 몽진(왕이 피난) 했고

왕이 수도를 버리자 분노한 조선민중들은

선조의 도주행렬을 가로막는 등 반발했고

한 백성은 통곡하며 말했습니다

 

<징비록 기록>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삽니까 ?

 

(선조의 임진왜란때 백성과 한양을 버린 것은

한국전쟁때 국민과 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과 비슷하다고

이야기 되고 있는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어두컴컴한 밤중의 비내리는 피난길의 침울한 모습의 선조일행은

피난길에 오르며 백성들의 동요와 민심의 이반을 목격했고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목격했습니다 부끄러운 선조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아예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려다

신하들의 만류로 국경은 넘지 않고

명나라의 원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록이자 반성문인 '징비록' 을 토대로 만든 임진왜란 이야기를 다룬 대하드라마 '징비록' , 출처 : KBS 1TV 대하드라마 징비록 (2015) 懲毖錄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

 

선조가 한양을 버리자마자 노비 문서 보관소인

방예원이 가장 먼저 분노한 조선민중들에게 불타버리고

분노한 조선 백성들은 수도를 약탈하고

궁궐들을 불태웠고

임진왜란 시기 조선 정궁 경복궁이 완전히 불타

없어졌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비어있다가 200년만에 흥선대원군대에 재건된 오늘날의 경복궁

 

곧 들이닥친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했는데

당시 일본인들의 관습에

다이묘(영주)들이 항복하면

전투가 끝나고 승리해서 복종하거나 자결하는게

암묵적인 룰이었기에

일본군은 한양만 점거하고 선조의 항복만 받으면

조선과의 전쟁은 끝나고 이후 조선에서 물자와 병력을 생산해

명나라를 침공한다는 생각으로 무서운 속도로 북진해서

한양을 점령해버린것이었는데

왠걸 선조는 항복은 커녕 이미 북으로 몽진간 상태였고

일본군에게 이러한 상황은 명예와 신의를 중요시해

할복자살하거나 패배를 인정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일본의 풍습과 달라 전혀 이런 것을 예측하지 못해

뻥져있었고

일본군은 그렇게 지친 상태에서 다시 북진해

평양성을 점령하고 조선 곳곳을 짓밟았고

거대한 전쟁의 참화속에 조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임진왜란 전쟁으로 학살당한 백성들 , 출처 : KBS 1TV 대하드라마 징비록 (2015) 懲毖錄

 

<라봉봉>역사를 배우는 이유의 가장 기본적으로 이야기 되는 말은

 

'좋은 것은 배워 모범으로 삼고

나쁜 것은 되풀이 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시기는 한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며

처참한 시대였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진 시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수도 서울(=한양) 을 버린 일은

이후에도 반복되 한국전쟁(=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라는 녹음방송을 틀어놓고 서울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고 도망쳤고

이를

 

'역사에서 배운게 없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망조가 든 집안은 대부분 아니 모두가 역사를 무시하고

잘되는 집안은 역사를 잘 아는 집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임진왜란 이야기로는,,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여러 면에서 역량적으로는 후진적인 상황이었기에

초반에는 빠른 속도로 조선 수도 한양을 함락시키고 조선을 유린했지만

점점 그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쟁은 흘러가게 됬고

명나라의 파병군과 바다를 지키는 조선 이순신 장군과

조선 백성(의병)들의 불굴의 저항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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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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