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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사후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 인종이 왕위를 이엇는데

인종이 태어난지 7일만에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중종의 세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가 인종을 돌봤지만

문정왕후는 권력욕이 강해서

인종보다는 자신이 낳은 아들(훗날 명종)을

왕위에 올릴 생각이 있었습니다

 

중종의 두 아들 인종과 명종

 

그러나 인종은 계모 문정왕후를 친어머니라 생각하고

극진히 효성을 다했는데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권력욕에 불타는 야망의 여인이었고

일단 인종은 아버지 중종에 뒤를 이어

정쟁으로 희생된 조광조의 억울한 죽음의 원통함을 풀어주려 했고

사림파들을 대우하고 어머니 문정왕후를 깍듯이 모셨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그러한 의붓아들 인종을 경계하며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적극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이에 인종의 외가쪽의 윤씨세력과

문정왕후 윤씨의 남동생 윤원형을 필두로한 윤씨세력의 대립이 있었는데

이를 '대윤(인종의 외갓집) 과 소윤(문정왕후 윤씨와 그녀의 남동생 윤원형) 의 대립' 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도 인종은 현실을 파악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문정왕후에게 계속해서 정성을 다하기만 했는데

어느날 인종에게 포악스럽게만 굴던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웃으면서 무지개떡을 권했고

인종은 드디어 생각했습니다

 

<인종>어마마마께서 드디어 나의 효심에

감탄하셨구나 !

 

그러나 웃으며 떡을 먹은 인종은

그날 갑자기 쓰러져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이는 야사(민간 이야기) 라고 하지만

재위 9개월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승하한 인종의 배후에는

야심에 불타는 문정왕후의 비밀스러운 공세가

있었을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뭬이야 ?!' 라는 유행어를 남긴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이야기가 있는 시대를 풍미했던 2000년대 초반 한국 대하드라마 '여인천하' , 출처 :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 (2001) 女人天下, Ladies in Palace

 

하여튼 조선 12대왕 인종 사후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이었던

경원대군이 조선 13대왕 명종이 왕위에 올랐고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왕이 어릴경우 왕의 어머니나 대비등이 하는 정치)을 진행하는데

문정왕후가 바라던대로 문정왕후 윤씨와 그녀의 친정인

소윤 윤씨들의 세상이 왔습니다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은 조선 실권자가 된 누나의

권세를 뒤에 업고

소윤의 영수(대장)으로서 명종 1년에

대윤 세력들을 모조리 귀양보내거나 사형시키거나 사약을 내리는등 숙청했고

이 사건을 조선 4대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의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을사년의 선비들의 재앙)' 라고 합니다

 

반대파가 사라지자

윤원형의 전횡(권세를 혼자 쥐고 제 마음대로 함) 은 시작됬고

모든 나라 권력이나 관료임명등이 윤원형의 손으로 시작됬기에

윤원형 집안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의 집 창고에는 뇌물들이 썩어갔습니다

한편 윤원형 옆에는 그의 첩 '정난정' 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정난정은 윤원형이 을사사화로 권세를 잡자 역시 부창부수(그남편에 그아내) 라고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실부인이 되어

윤원형과 호의호식을 했고 (끼리끼리의 법칙 ?? ;;)

역시 윤원형같이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며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조선의 악녀로 유명)

 

문정왕후는 불교를 신봉해

철저한 유교국가로 숭유억불(유교를 높이고 불교를 탄압한다) 정책을

시행하던 조선이었지만 승려 보우와 불교계를 밀어주었고

이는 점차 시대를 지나며 지나치게 힘이 강해진 유교에 철저했던 사림파를 견제하고

여러 사상에 개방적이었던 훈구파들을 등용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미 커질대로 커저버린 사림파들은 문정왕후가 살아있을때는

조용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가

문정왕후 사후 유학자들과 사림파들에게

미운털이 박힐대로 박힌 승려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됬다가

제주목사(오늘날 제주도지사) 에게 사형당합니다(사형은 임금만이 내릴 수 있지만

이미 문란해진 나라였고 사림파들의 견제에 그냥 불법적으로 제주목사가 죽임)

 

그렇게 나라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에게 움직여지자

(윤원형은 마지막 훈구파라는 이야기도 있음)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곳간은 썩어나나

조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에 도적들이 일어나는데 가장 대표적 명종대에 도적이

'임꺽정' 입니다

 

임꺽정은 백정출신이었지만

명종대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심해지자

황해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며 도망다녔고

점차 규모가 커져 국가적인 규모가 되었는데

관군을 물리치거나 도망칠때 눈길에서 신발을 거꾸로 신어서

골탕먹이기도 하고

 

임꺽정은 오랫동안 잡히지 않다가

그의 참모 서림의 배신으로 잡히게 되었고 처형당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의적으로 유명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털보이미지의 '임꺽정' , 그의 이야기는 영화 , 드라마 , 만화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명종때 사관(역사 기록관리) 들은 임꺽정을 무조건적인

역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종실록 사관의 생각>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가혹한 세금 , 수탈)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

 

한국 민간설화에서는 임꺽정이 폭군 연산군 시대에 활동한 홍길동과 더불어

관가를 농락하며 욕심많은 관리나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의로운 도적)' 으로 이야기 되고있고

 

'연산군대 홍길동 ,

명종대 임꺽정 ,

숙종대 장길산'

 

은 '조선 3대도적(3대의적)' 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매화 한가지를 남기고 간다는

일지매는 중국 설화가 조선에서 삼국지 유행하듯 유행한 것임)

 

실제 그 인물들이 어떤 인물인지는 야사나 민담으로나 자세히 이야기 되지만

한국의 '로빈후드(영국 전설적 의적)' 같은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명종은 20세가 되서야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했지만

20세가 넘어서도 문정왕후의 회초리를 맞거나 일거수 일투족을

문정왕후의 명령을 받은 궁녀들에게 감시되었다 하고도

평생 조울증과 홧병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명종시기인

1555년에는 왜구(일본해적) 들이 대규모로 침입한 '을묘왜변' 이 일어나서

왜구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조선 해안가들이 크게 당해 한국과 일본에게는

임진왜란의 시뮬레이션 모델이 되었고

 

이에 명종대부터 조선정부는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특히나 판옥선을 도입하고 총통과 화포를 개량하고

수군을 정비하는 등 나름대로 수군력을 강화시키려 노력했고

훗날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나오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565년 문정왕후 사후부터는

명종은 문정왕후의 그늘에서 벗어나 외삼촌 윤원형의 힘은 쪼글아들었고

한때 조선을 장악했던 윤원형 · 정난정 부부는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는 말처럼

좌절하다가 독약을 마시고 최후를 맞았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오늘을 마지막처럼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진짜 막나가는 자들은 경계합니다

 

이후 명종은 뭔가를 직접 해보려다가

2년만에 34세의 젊은나이에 후사없이 사망합니다

 

명종 시기에는 이전부터 있어온 조선 정부의

적극적 훈구파 견제와 사림파 우대정책에 더불어

여러 선비들과 유학자들이 조정과 향촌(지방) 에서 활동하던 시기였고

조선의 대학자이자 대정치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퇴계 이황은 한국의 성인이라며 이자 (李子) 라고도 높게 받들여졌고

두 인물 모두다 성리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조선 사림파와 유학의

절정을 찍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고

두 인물은 관직에 나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과 임금을 향해

아낌없는 충언을 남기며 오늘날 한국의 위인으로 이야기 되고 있으며

1000원 지폐(퇴계 이황) 와 5000원 지폐(율곡 이이) 에 오르게 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대한민국 1000원 지폐의 퇴계 이황
대한민국 5000원 지폐의 율곡이이

 

<라봉봉>어렸을때 티비에서 방영해주던 여인천하 드라마에서는

'아 ~ 아아 !~~~' 하는 ost로 드라마가 시작되며

무언가 여자들의 암투가 벌여지고 대비는 화내며 '뭬이야 !' 이러던게 기억나는데

하여튼 인종과 명종시대는

정말 여자들의 권력이 매우 강했던 '여인천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윤원형 · 정난정 부부에 의해 조선이 어지러워 도적 임꺽정이 활동했던 시대지만

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같은 한국사의 큰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기고

점차 이시기를 기점으로 윤원형을 마지막으로 조선 훈구파의 계보는 맥이 끊기고

사림파들의 시대가 시작되는데

결국 사림파들도 자신들을 견제하던 훈구파들이 사라지자

거대 권력과 고인물이 되어 사림파들끼리 다투기 시작했고

사림파는 '붕당' 이라고 분열하게 됩니다

 

제가 정치인들을 잘 믿지 않는게

누구는 진보다 누구는 보수다 누구는 중도다 하며 다투지만

결국 민생적인 대안을 내놓거나 실행한 적은 없었고

자신들의 이익에 몰두하고 권력을 잡아 반대파를 몰아내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고

어짜피 권력을 잡아봤자 한쪽 세력이 없어진다 해도

또 그 세력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로

공산주의 국가 중국 정치계에서도 같은 공산당 내에도 파벌이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훈구는 악이고 사림은 선이다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은 조선시대 훈구파' 라며 극도로 비판했을 정도로

'훈구=구악' 을 상징하는 언어로 이야기 됬지만

요즘에는 훈구파들 역시 의의가 있던 세력으로 이야기 되고 있고

엄연히 세종대왕과 활약한 조선초기 관학파 신하들도 훈구의 명맥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으며

자유롭고 진취적인 기풍이 있었던 훈구세력이

성리학과 유교적 질서에 충실했던 사림세력에 밀려났던 시기라 보면 되고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조선은 점차 중국을 더욱 높게 여기고

여진이나 일본 세력을 더욱 낮게 여기고

고인물이 되어갔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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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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