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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임진왜란 초기 부산포에 상륙하고

파죽지세로 북진해오며 10여일만에 수도 한성을 버리고

몽진(왕의 피난) 한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명나라와의 국경지대였던

압록강이 있는 의주까지 피난갔습니다

임진왜란 시절 선조는 왕자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삼았고

혹시라도 자신이 사로잡히면 뒤를 잇게 하기위해

광해군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 소조정을 이끌게 했고

자신은 원조정을 이끌었는데

이를 '분조' 라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급하게 세자에 책봉되 분조를 이끌게 된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대립군' , 출처 : 대립군 (2017) WARRIORS OF THE DAWN

 

왕이 수도를 버리자 백성들은 통곡했고

조선은 혼란에 빠졌는데

나름 조선 조정에서도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려 했고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려 했고 의병(백성들이 자진해서 일어난 향토군대) 의 봉기를 촉구했고

나라에서는 의병부대의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며

의병부대를 국가 정식부대로 인정했습니다

(조선은 병농일치 사회여서 당연한 절차였음)

 

임진왜란 시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수많은 의병과 인물들

 

1592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로 배를 학같이 펼치는

'학익진'을 펼쳐 일본군을 격퇴했고

1592년 7월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했는데

이 승리로 이순신 장군은

지기만 했던 조선인들에게 이길수 있다는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산도 대첩 민족기록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또 제해권은 바다지역의 권리를 의미하는데

당시 조선은 상공업을 천시했기에 나라에 도로가 발달하지 않았고

또 적들이 쉽게 수도를 공격하지 못하게

군사적인 이유로도 일부로 나라에 도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선은 지방의 세금수송도 결국 바다와 강을 이용해 수송했는데

일본군 역시 군량 물자 등을 보급하려면 바다를 이용하는게

가장 빨랐지만 이순신 장군에 패퇴해 제해권을 내주자

쫄쫄 굶주리게 됬고 언제 조선수군의 침공을 받을 지 몰라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뒤늦게 무과에 들어가 낮은 관직을 전전하다

친구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로 파격승진했고

평소 수군 훈련과 정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부지런한 훈련과 무예 공부 및

청렴하고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많은 군사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고

조선의 다른 곳은 텅텅뚫렸음에도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계속해서 승리해갔습니다

 

세종대왕과 더불어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물 이순신 장군의 관복을 입은 모습
군복을 입은 이순신 장군

 

특히나 이순신 장군이 부하 나대용에게 시켜 개발한

'거북선' 은 세계 최초의 철갑함으로서 일본의 총탄에도 끄떡이 없었고

밖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는 구조라 바다위의 움직이는 요새격으로

일본군의 공포의 대상이 됬습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주력함선이었던 거북선과 판옥선

 

또 조선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향토지리에 밝아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일본군들을 농락하고 도망치는 등 괴롭혔고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한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제자로

원래 문과 대과 급제자였지만

선조를 비판한 답안지를 내서 선조에 의해 합격이 취소되어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과 낚시를 하며 세월을 보내던 인물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재산을 모두 팔아 식량과 무기를 사서 의병들을 조직했고

신출귀몰한 모습으로

일본군의 공포의 대상이 됬는데

그의 용맹성에 일본군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었습니다

 

곽재우는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백마(흰 말) 을 타고 다녔기에

그의 이름을 모르던 병사와 백성들까지 모두 그를

'홍의장군(붉은 옷의 장군)' 이라 불렸으며

오늘날은 그를 외세의 침략으로 부터 나라를 구한 '홍의장군 곽재우'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곽재우와 의병들의 활약

 

또 육지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1592년 11월 8일(혹은 9일) 일본의 2~3만대군이 전라도의 관문인

진주성(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을 공격했는데

전라도는 조선왕실의 본고장이자

이순신 장군의 기반지역이자

조선의 매우 중요한 곡창지대였고

이곳이 뚫리면 곧 이순신 장군의 수군의 괴멸을 의미한다 할 수 있었기에

조선의 멸망을 의미한다 할 수 있었고

이에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진주성을 방어하려했고

진주목사 김시민(실제로 진주목사는 지리산으로 도망쳐서

김시민은 진주목사를 대리했음) 은 의병장 곽재우등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고을안에 사는 백성 남녀노소를 전부 성으로 모으고

여자들에게는 모두 남장을 하라 명령을 내렸고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철통보안을 유지하며 7일간의 격전끝에

일본군을 무찌르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1592년 11월 12일 마지막 날 전투를 끝내고

전장을 둘러보던 김시민 장군은 시체속에 숨어있던

한 일본군의 총에 왼쪽 이마를 맞고 39세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이 사건을 임진왜란 삼대대첩 (한산도대첩 , 행주대첩 , 진주대첩)

중에 '진주대첩' 이라 부르고

김시민 장군의 승전으로 결국 전라도의 곡창지대는 안전하게 보호되

이순신 장군이 마음껏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반이 되게 되었습니다

 

김시민 표준영정 , 출처 : 충민사

 

진주대첩 민족기록화

 

이외에도 묘향산의 서산대사(이름은 휴정)와 그의 제자였던

금강산의 사명대사(=사명당 , 이름은 유정) 은

스님들을 모아 승병을 조직했는데

기존 조선정부의 불교 탄압도 있었고

원래 살생을 하면 안되는 스님들이었지만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한국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이었던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보위해야 한다는

'호국불교' 사상으로 대동단결해 무기를 들고

일본군에 맞서게 되었고 큰 활약들을 했습니다

 

임진왜란 승병들의 활약

 

임진왜란과 임진왜란 전후수습의 숨은 주역이자 한국의 위인 '사명대사'

 

또 의주에 피난간 선조의 지속적인 요청에

명나라의 지원군도 도착했는데

명나라는 이웃국가중 가장 정상적인 나라였고

충실히 신하국의 예를 갖추었던 조선에 대한

의리를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짜 목적은

명나라를 침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자국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더 큰 피해를 입기에

전장터를 조선 내로 한정하려 하는 의도도 있었고

(한국 지역[한반도]은 이전부터 대륙세력[중국] 과 해양세력[일본] 의

이후에도 중간에 위치해 있었기에 여러 열강들의 전쟁터가 됬습니다)

 

결국 명나라군이 도착하자 조선 · 명나라의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을 물리치며 남하하기 시작했고

평양을 수복했고

일본군은 남쪽으로 밀려 한양으로 퇴각했는데

이 즘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해서 함경도에서 철수하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연합해서

권율장군이 지키고 있던 행주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임진왜란시기 일본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 , 무서운 인상인데 조선군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인물이고 당시는 천지신명을 굳게 믿는 사회였기에 요상한 장식이나 공포스러운 분장은 심리전으로 큰 효과가 있었음

 

권율은 화차라는 신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부녀자들까지 전투에 의연하게 나서

부녀자들은 행주산성의 돌들을 모아서

치마에 돌을 담아 산위로 날라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향해 던졌고

그때 사용하던 부녀자들의 치마를 '행주치마' 라고 부릅니다

(한국의 야사)

결국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 패퇴했고

2개월 후 조선 수도 한양에서 철수하게 됬고

조선은 수도 한양을 수복합니다

 

권율장군 표준 영정 , 출처 : 행주산성 충장사

 

행주대첩 민족기록화

 

이 사건을 '행주대첩' 이라 불리며

행주산성은 오늘날에도 고양시의 일출 명소이자

행주대첩은 고양시의 자랑스러운 사건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결국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지자 일본군은 조선 ·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진행하려 했고

그 와중에도 진주대첩의 한이 있었던 일본군은

결국 9일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진주성을 함락시켰는데 (2차 진주성전투)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진주성의 촉석루라는

남강변의 절벽근처 누각에서에서 큰 잔치를 벌였고

이때 진주의 관기(관아의 기생) 였던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있었고

일본군은 그녀를 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홀로 당당하게

그녀 앞으로 나왔고

논개는 요염한 미소를 띄우며 그를 맞이했고

일본군 장수가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그를 힘껏 끌어 안더니

곧바로 낭떠러지 아래로 같이 떨어졌고

두 사람은 모두 물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의기(의로운 기생) 이라 불린 '논개' 표준영정

 

임진왜란 시기에는 관 , 군 , 민이 모두 결사항전으로

일본군을 막아냈던 시기로서

조선에서 차별받는 계층이었던 스님 이외에도

기생출신 논개 역시 예외없이 일본군에 맞섰고

사람들은 그녀를 의기 (의로운 기생) 이자

한국을 빛낸 인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천대받는 계층이었던 조선 노비들도 전쟁에서 활약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논개의 활약 및 조선군의 큰 항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로 가는 요지였던 진주성을 겨우 함락시켰음에도

피해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했고

전라도는 이로써 임진왜란 내내 일본군의 침입에서 안전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현덕승이라는 인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편지>만약 호남(전라도)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전라도는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식량창고역활을 했던 지역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전라도 지역감정 일으키는 자들에게

뼈있는 소리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군과 휴전협상을 제의했고

조선과 일본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협상을 했습니다

 

<라봉봉>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은 이순신 장군에 있다고 할 정도로 과언이 아닌 전쟁이었고

(물론 일으킨 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인들)

그는 한국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서

단순한 명장이나 영웅이라 불리지 않고

'성웅(성스러운 영웅)' 이라 불리는 인물로서

그는 군사적 지략 이외에도 백성을 사랑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승전에 다시 조선인들은

희망을 얻어 일본과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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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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