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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임진왜란이 휴전 논의들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휴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은 조선 침략의 가장 두려운 적이었던

이순신을 제거하려 첩자를 보내는 등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었고

결국 일본의 농간과 조선내 이순신을 시기 질투하던 자들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평소 선조는 이순신이 전략상의 이유로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고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떠나서

평소 함부로 지는 싸움에 나서

개죽음으로 가는 전투를 하려하지 않았음)

백성들 모두가 이순신만을 찾기에

이순신에 대한 깊은 열등감 및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흥분한 선조는 이순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조>(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일본군 명장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선조는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했고

50대의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고문했는데

정강이를 맞는 고문을 당했다 하고

이덕형의 '한음문고' 에서는 이순신은 고문으로

거의 죽게 됬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순신 장군 , 출처 : KBS 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李舜臣 (2004)

 

이순신은 출옥하자 마자 크나큰 고통에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곧바로 고향 아산으로 돌아갔는데

이순신의 어머니는 이순신이 한양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병으로 사망했고

그는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에 대해

고문과 파직으로 화답한 군왕 선조에 대한 배신감과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 엄청났고

이순신은 엎어져 몸부림을 칠 정도로 슬퍼했습니다

 

또 이순신의 뒤를 이어 수군 대장이 된 원균은

이순신이 오랜 기간동안 모아놓은 실전경험이 풍부했던

조선 최정예군대를 믿고 공을 세우기 위해

군사들을 협박해 억지로 출전해서

일본군에 크게 패배했고

분노한 도원수 권율장군은 원균을 직접 불러 곤장을 때리며 말했습니다

 

<곤장을 치는 권율 장군>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선조와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는 인물 '원균'

 

결국 곤장에 맞고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원균은

'홧김에' 이순신이 고생고생해서 모아놓았던 전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버렸고

칠천량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크게 패퇴했고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되던 원균은 땅으로 도망치다

늙어서 걷지도 못해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있다가

칼을 들고 달려든 일본군 6~7명에게 사망했고

지휘관이 도망쳐버리자 군대는 와해되서

이순신 장군이 오랫동안 모아놓은 조선의 300여 척의 함대 및

조선 수군 전부는 궤멸됬고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상실했습니다

(지도자의 중요성)

 

선조는 크게 놀라며 어찌할까를 생각하다가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수군대장) 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이순신 장군에게,,

 

<선조>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 ! ,,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겨우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온갖 슬픈일을 겪었던 와중에도

다시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조선 수군을 복구하려 노력했고

자신을 의심하고 공격했던 선조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순신>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 전선이 비록 적으나 ,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이 파직당했을때 다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대침공을 준비했고

한창 전쟁이 휴전상태였던 와중 다시금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고

이를 '정유재란' 이라고도 부르고 임진왜란과 구분해 부르기도 하나

보통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모두 통틀어 임진왜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1597년 8월 27일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켜 14만 군대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했고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이순신이 없음에 안심한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켰는데

이미 임진왜란 시기 곡창지대 전라도 점령을 못한 것을 크게 아쉬워하며

재침략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던 일본이었고

일본은 정유재란대에는 애초에 이번엔 임진왜란대와 달리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삼남지방을

완전히 정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너지지 않을것만 같았던 전라도 역시 무너져서 결국

일본군의 대학살이 있었고

정유재란부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공을 논할 때

부피가 큰 머리 대신에 부피가 작은 귀나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오라 했고 각자 벤 수에 따라 포상을 내리겠다 했는데

당시까지 나름 치밀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오랜 전쟁의 패전으로 크게 흥분하고 미쳐있었던 상황이었고

 

결국 이에 정유재란대에는 임진왜란대보다 더 잔인하게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학살했는데

전라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전라도의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남원성 전투 이후 일본군 장수들은 소금에 절여 나무통에 담아

일본으로 바친 코 숫자만 3500개가 넘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귀걸이 차는 게 유행이었는데

일본군들은 조선인들의 귀를 베며 귀걸이들을 약탈했고

조선인들을 구분하려

귀의 뚫린 자국을 찾아봤고

이외에도 일본에 실려간 조선인들의 귀나 코들은

처치하기가 곤란해 대충 묻어버렸고

이를 '귀무덤' 혹은 '코무덤' 이라 부르게 됬습니다

 

오늘날 일본에 위치한 조선인 '귀무덤(=코무덤)'

 

일본 장수들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에 점차 지쳐가고

이미 조선에서 전쟁에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예감했고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조선 백성들을 죽이지는 않고 코만 베기도 했고

이에 조선백성들은 우는 아기를 달래려

 

'(두렵고 빠른 말투로) 에비 ~ 에비 ~'

 

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됬는데

여기서 에비는 이비 즉 귀 (耳 귀 이) 와 코 (鼻 코 비) 를 뜻합니다

 

점차 잔혹해지는 전란속에

일본 장수들은 어짜피 전쟁이 오래 못갈거 같아서 전쟁 비용을 메꾸려고

노예 장사를 하려

조선 백성들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수군은 서해의 제해권과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려 진격했는데

모진 고문을 받고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다시 궤멸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고

그에게는 고작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대수군을 맞서야했기에

많은 병사들이 두려워 하는 기색이 가득했습니다

이에 장수들을 불러모은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순신>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일부당천 족구천부 一夫當逕 足懼千夫) 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이날 밤 이순신의 꿈에는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고

결국 이순신 장군은 고작 12척(혹은 13척) 의 배로 일본군 전선 133척을

거친 물살의 울둘목으로 유인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이 일본 대수군을 향해

전속력으로 정면으로 직접 돌격해 포탄과 화살을 퍼부으며 일본전선들을

격퇴시키고 있었고 명량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망금산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조선 백성들은 포위망을 좁혀오며 몰려오는 수많은 일본 전선들을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홀로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하며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이 탄 전선들 역시

엄청나게 몰려오는 일본 수군에

두려워해서 물러나서 관망만하며 배를 돌리려 했고

분노한 이순신 장군은 뿔피리를 불르고 깃발을 걸어서

부하들의 배들을 불러모았고 결국 조선 장수(부하)들이 탄 배가 슬금슬금 이순신이 탄 대장선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거제현령 안위가 탄 배가 이순신의 대장선 앞에 도착했고

부하들의 관망에 분노한 이순신은 그를 향해 외쳤습니다

 

<이순신>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

 

결국 정신을 차린 안위는 두려움을 떨치고 황급히 전장에 뛰어들었고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호통쳤습니다

 

<이순신>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

 

결국 이순신의 부하들 역시 전장에 뛰어들었고

거친 울둘목 물살에 일본 전선들은 뒤엉켜 이도저도 못하다가

이순신 수군의 함선들의 포격으로 격파당했고

조선 수군은 명량 바다에서

12(혹은 13) vs 133(혹은 330~500) 이라는 말도안되는 승리를 이끌어 내게 됬습니다

 

정유재란 승기가 다시 조선으로 기울게 된 역사적인 사건

'명량대첩' 이 또다시 이순신 장군에 일어나게 됬고

임진왜란대 '한산도 대첩' 과 더불어

이순신 장군의 승전은 패퇴하던 조선인(특히 육군)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명량대첩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그린 영화 '명량' , 출처 : 명량(鳴梁) (2014) Roaring Currents

 

결국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패하자

일본 육군은 보급선을 끊길 것을 우려하고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여러 교착전을 벌였는데

임진왜란의 스트레스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 악착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그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시>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 꿈 속의 꿈이로다

 

(공수래 공수거 , 허망함)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일본 내에서는 조선과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극비로 부친 후 조선 내의 모든 군사의 철군을 명령했습니다

 

일본군이 하나하나 고국으로 돌아갈 짐을 싸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조국을 침탈하고 유린한

일본군을 곱게 돌아가게 내버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고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던 일본군을 총공격하라 명령했습니다

 

<노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맹세>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선군의 총공격에 일본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일본군 역시 고향으로 도망치려고 죽기살기로 저항했고

그러다가 일본군 전선에서 날아온 총탄 한발이 전두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의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죽어가는 와중의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죽음이 군사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순신>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결국 이순신 장군은 54세의 나이로 1598년 음력 11월 19일 ,

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전사하셨습니다

 

한산도 제승당의 노량해전도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도 모른채

남은 일본군을 섬멸하려 계속해서 전투를 했고

조선은 도망치던 일본군들을 궤멸시키며 노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7년간에 길고 길게 이어졌던 동아시아 국제전쟁 '임진왜란' 은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끝나게 됬습니다

 

노량해전 승전 후 뒤늦게 이순신의 죽음을 안 그의 부하와 병사들은

그의 죽음에 통곡했고

그는 임진왜란 조선군 승리의 시작이자 끝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그는 마치 임진왜란을 막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하늘이 내려보낸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남도의 백성들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했고

시장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고향에 그를 제사지낼때에도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와 제사했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해 고을 경계까지도 통곡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 한국인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

 

대한민국 100원 동전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과 영화 '명량'

 

이순신 장군의 삶과 생각 , 태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 김종대 지음' , 글 하나하나에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 이외에도 그의 고심과 그의 어깨의 무거운 무게와 책임감과 고뇌가 느껴집니다

 

제가 어릴적 어린이들에게 유행했던 '불멸의 이순신 게임' , 당시 일본의 독도도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장군 이순신 장군이 당시 일본총리 고이즈미 총리 캐릭터등을 물리치고 독도를 지킨다는 내용입니다 (아 순진하고 순수했던 옛날이여)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와 일본 ,

한중일 모두에게 엄청난 대격변을 가져온 전쟁이었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 판도가 크게 바뀌고

세나라 및 주변국들은 기존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먼저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기존 백제 후손들이거나

나쁜 해적무리정도로만 여겼던

일본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고

전쟁 이후 남성들이 많이 죽자

'남존여비사상(남자가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 은 더욱 커져가서

임진왜란 전까지 대체로 남녀가 평등한 편이었던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위주 사회로 재편되었고

많은 노비들도 전쟁에 공을세워 노비 신분에서 나오기도 했고

조선에서는 나라에 곳간이 비자 신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공명첩' 을 발행해

부족한 국가재정을 보충하려 했고

이에 돈많은 양인들은 양반신분을 돈으로 사기도 했고

여러 신분의 활발한 이동이 있었습니다

 

즉석에서 벼슬을 주려 이름쓰는 곳을 비워둔 신분 구매 증서 '공명첩'

 

임진왜란 이후 급격히 늘어난 양반들(지배층[양반]이 피지배층보다 많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패전이나 후계 문제 등으로 몰락하게 됬고

이전부터 꾸준하게 조선정벌에 반대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군사를 내놓지 않았던 일본 최대 다이묘(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병사들을 아끼고 조용히 힘을 기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군사를 일으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승리해 일본 지배권을 잡게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가 시작됬고

에도막부는 '메이지 유신' 전까지 번영한

도쿠가와 가문이 이끈 일본 근세시기로서

일본의 조선시대같은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전국 3영걸' 이라 불리는 인물로

3영걸은

 

1. 오다 노부나가

2. 도요토미 히데요시

3. 도쿠가와 이에야스 

 

을 말합니다

숫자별로 시기순이고

흔히 일본인들은 이 인물들의 성격을 토대로

그들이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찌할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오다 노부나가 (성격 급함) : '새가 울지 않으면, 새를 죽여버리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성격 치밀, 간사함) : '새가 울지 않으면, 새가 울게 만들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성격 느긋 , 인내력 강함) : '새가 울지 않으면, 울때까지 기다리겠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고

이것을 '울지않는 두견새' 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은 임진왜란대에 비록 패전으로 끝났지만

나름 오랫동안 상국으로 모셔왔던

조선과의 격차를 거의 따라잡았음을 체감할 수 있었고

조선인 도공(도자기 기술자)과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끌고와서

일본에 도자기 기술과 활자기술을 발전시켰고

특히 일본은 그동안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나무그릇을 사용하고 있고 지배층만 조선 등 외국에서 수입해온

도자기를 사용했는데 특히 조선의 일반 민중들까지 사용하던

평범한 도자기들도 일본에서는 엄청난 고가였고

조선의 평범한 막사발은 일본에서 '이도다완' 이라 불리며

성 하나와 같은 가격의 엄청난 가격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조선 도공들을 끌고갔고

특히 조선인 포로 '이삼평' 이라는 인물은

일본에서 도자기의 원료인 양질의 고령토를 찾아내는데 성공해

도자기를 구워내는데 성공했고

에도막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켰고

이는 일본과 교역하던 유럽에 팔리게되서

일본이 세계적인 도자기 강국으로

거듭나게 되게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일본은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이라고

나름 낭만스러운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하는데

실상은 동아시아 세계 사람들 모두에게 참혹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일본 아리타 석장 신사의 이삼평 조각상과 이삼평 영혼을 모신 도산신사의 도조 이삼평 비

 

한편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막대한 군사지원을 하느라

국고가 크게 손실됬고

조선과 명나라는 서로 만주지역 여진족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여진족들을 신경쓰지 못하게 되자

여진족 족장 '누르하치' 를 중심으로 여진족은 통합해서

큰 힘을 키우게 됬고 이에 임진왜란 이후 여진족들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됬습니다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아이신기오로는 성)

 

한편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서양과 꾸준히 교역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도 조총기술이 들어와

조선은 임진왜란 패전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조총연구에 힘써 조총군을 만들었고

또 임진왜란 이후 다시 일본과 교류하며 서양에서 들여온 작물들인

감자 · 고구마 · 호박 · 토마토 · 고추 등 여러 아메리카 대륙 작물들이 조선에도

들어왔습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으로 동서양에 유입된 옥수수 , 감자 , 고구마로 쌀농사에 적합하지 않는 지역에서도 자라 조선의 구황작물이 되었음

 

선조시대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대격동기가 있어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조선전기(임진왜란 이전) 와 조선후기(임진왜란 이후) 로 나뉘게 되었고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구국의 영웅들이 나와 활동하던 시기였고

많은 이름없는 이 , 신분이 미약한 이들이 가릴 것 없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조국의 안녕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매우 커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의 국력이 엄청나게 약해졌고

이에 한국인들에게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 시대였기에

많은 역사영화 , 사극 드라마 , 역사소설 등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소설 '임진록'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기를 다룬 게임 '임진록'

 

아픈 굴욕의 시기에 만약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더라면 ? 이라는 물음은 예로부터 여럿 있어왔고 어려운 시기 초인적 힘을 지닌 주인공이 나타나는 판타지소설같은게 여럿 있어왔는데 고전소설로는 병자호란을 물리치는 박씨부인전이 대표적인 예이고 이런 소설류를 '대체역사소설' 이라 합니다 . 현대 시대에 사는 주인공이 선조 이균의 몸으로 환생해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임진왜란을 예방하고 조선을 개혁하고 부강하게 만든다는 소설 '환생군주' 로 저는 판타지소설은 잘 안봤는데 15~16살쯤 이런 대체역사소설류는 엄청나게 많이 읽었고 역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거 같습니다 , 출처 : 환생군주 곽정민 지음

 

<라봉봉>하여튼 임진왜란은 한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무언가 한국사에 대한 퀴즈같은 것을 낼때

임진왜란이 몇년에 일어났냐 ? (1592년) 라고 물을 정도로

대표적인 한국사의 사건이 되었고

한국사에서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의 나타남과 죽음의 시기는 너무나도 절묘해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나 삶에 여러 의문을 가질 정도였고

그는 죽은 뒤에 더욱 높여졌고 그에대한 영웅적인 일화들은

더욱 널리 퍼졌지만

인간 이순신은 전쟁 기간동안 여러 사건을 겪으며

고통의 연속이었기도 하고 오늘날 한국 정부나 여러 집단에서

 

'이순신 띄우기를 하는 사회'

 

의 풍조는

어려운 시기 이순신 같은 청렴하고 훌륭하고 능력있는 인물이

나타나주길 바란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가 있고

이순신 장군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당대의 구국의 명장이지만

개인적으로 난세의 영웅 띄우기는

그만큼 현재가 혼란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난세의 영웅을 띄워 정신승리하려는 생각보다는

현재 환경을 개선하고 보다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후진국 특징이 현재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돈쓰는데 인색하고

죽은 영웅 기리기에는 돈을 엄청씀)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과 더불어 비판이 금기시된 인물로

한국사의 명장중의 명장이라 할 수 있지만

하여튼 인간으로서는 고통으로 미치지 않고 살기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고 지휘관으로서 그런 상황을 통제하려 했던

그의 정신력 또한 엄청났기에

당대 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의 그에 대한 인간적인 모습에서까지의

찬사와 존경이 있다 할 수 있고

한국 역사에서는

삼국시대 을지문덕(고구려) , 계백(백제) , 김유신(신라)

고려시대 강감찬

조선시대 이순신

으로 이어지는 구국의 명장이라 불리는 인물이고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위에서 쓴바와 같이

한국 조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의 판도가 바뀐 엄청난 대사건이었고

한일전쟁이 아닌 국제적 전쟁으로 봐도 무방한 사건입니다

 

근데 요즘 한일무역갈등을 보면

계속해서 한국 일본 기성세대 인물들은

임진왜란이나 이순신 장군을 끌여들이며

반외국감정등을 부추겨 국민들에게 경제 '전쟁' 에 참여하라 동참하는 것 같은데

실제 한일 젊은이들은 양국 우호도가 높고 (물론 일본 젊은이 역사인식 부재는

워낙 유명하지만 요즘은 한국 젊은이들도 요즘말로 '일뽕[일본 우월사상]'

에 빠지는 문제가 심각하다 봄)

 

갈등은 굳이 안일으켜도 될 문제로

기성세대 , 정치인들이 일으켜놓고

왜 젊은이 , 힘없는 국민들에게 싸움을 독려하려는 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또 저는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이야기를 봤고

역사글을 쓰며 전쟁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지만

저는 전쟁이던 경제전쟁이던 전쟁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경제전쟁 일어나면 당장 망할 가족 , 집안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 )

 

이것은

'공포심을 통해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

이라는 매우 사악한 방법이라 할 수 있고

그렇다고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을

지지해준다면 너무나 80년대 스러운 생각같고 ('북풍' 과 비슷)

한국과 일본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인터넷에서도 극도로 일본을 싫어한다거나

극도로 좋아한다거나 하는 부류들이 대부분 글을 올리는 것으로 보이고

역사왜곡을 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라고 초빙된다거나

이상한 망상이 담긴 역사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와중의 시대를 살고있는 저는

제대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알려는 사람을 별로 못본거 같아 아쉽습니다

(또 역사왜곡을 하는 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

역사를 잘 모르고 가난한 사람들 같은데 [진정 지식인이나 부자가 그런 자를 지지하지는 않음]

없는 형편이면서도

그런 사람들에게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움)

 

최근에 일본역사책을 되게 많이 읽었는데

조만간 일본역사도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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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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