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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왕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전란을 수습하고

새로 일어난 후금(청)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실시하고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줄여주는 대동법을 실시하는

뛰어난 모습들을 보였지만

 

형 임해군을 죽이고

대북파(북인)와 결탁해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모살제를 일으켜

관료와 선비들의 인심을 잃었고

 

결정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나라가 크게 피폐해졌음에도

거대한 궁궐공사를 하는 기행을 벌여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궁궐공사비용 뇌물을 수탈해

백성들의 인심을 크게 잃어

결국 서인 세력들은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을 필두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해 귀양보냈고

능양군을 왕위에 옹립했는데

능양군 , 이 인물이 조선 16대왕 인조입니다

 

광해군은 도중에 폐위됬기에

연산군처럼 조나 종같은 시호를 받지 못했고

이에 왕자신분 이름인 연산군으로 남게 되었고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

이 사건을 '인조반정' 이라 합니다

 

한편 성공적으로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능양군 인조를 옹립한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및 공식 세력들은

논공행상(공로를 조사하여 상을 줌) 을 하며 서로 다투었는데

이괄은 인조반정때 군대를 이끌고 큰 공을 세웠음에도

반정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1등공신이 아닌 2등공신이 됬고

수도지역 벼슬도 받지 못했고

북방 지역 후금의 침입을 우려해

당시 한직이었던 북방(평안도) 지역을 지키는 벼슬을 받게 되어

추운 평안도로 갔는데 유능한 장수였으나 다혈질에 성격이 급했던

이괄은 내심 속으로 분노했습니다

 

사실 이괄 역시 충분히 높은 공신 대우를 받은 것이었고

조선 최정예 군사들이 있는 북방 지역을 담당하는 것은

사실상 인조가 당시 조선 군권을 전부 맡긴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기에

결코 대우가 작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이곳에서 이괄은 일단은 불만을 참고 군사들을 기르며 훈련시키고 있었고

 

그러다 점차 인조반정 공신들의 자리다툼은 커져

내부적으로 엄청난 암투들이 있었는데

이괄의 아들역시 이곳에 말려들어 역적으로 몰렸고

인조에게는 이괄을 체포하라는 말들이 올라왔고

인조는 이괄을 감싸다가 결국 계속되는 탄핵에

이괄의 아들만 체포하라 했지만

결국 참다못한 이괄은

 

<이괄>역적의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느냐 !

 

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북방을 지키던 이괄의 최정예 조선병사 1만 2천명은

조선수도 한양(서울)으로 남하했고

인조는 이괄과 북방군에게 한양을 내주고

공주로 피난했고

이괄은 한양을 점령했지만 막상 어찌할 지를 모르다가

이괄군을 진압하러온 정충신의 2000명의 관군과 맞섰습니다

 

이괄의 난 전개도 ,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관군에 비해 훈련도도 힘도 강했던 이괄군이었지만

단순히 내부적 기득권들의 논공행상,  파벌다툼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었기에 이괄군 내부에는 결속도 잘 안됬고

이미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 조정에 대한 인심이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권력다툼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괄군이나

인조의 관군이나 백성들은 '그놈이 그놈' 이라는 느낌이어서

백성들에게 이 반란은 '높으신 분' 들이 '그들만의 리그' 에서 싸우는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일 뿐이었고

이괄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급조된 소수의 정충신의 2천 조선 관군은 북방에서 단련된

이괄의 조선 최정예 군사들을 대적할 수가 없었지만

명분없는 권력다툼에 다들 그러려니 하는 판에

일단 대치하다

바람이 이괄군쪽으로 불자

관군들은 고춧가루를 뿌렸고

이괄군은 고춧가루가 눈에들어가 눈을 뜰수 없게 되자 크게 당황했고

멀리서 꾕가리 소리가 들리며

 

<관군이 부르는 소리>이괄이 패했다 !

 

라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자

이괄의 부하들 역시 강력한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고

결국 이괄군은 무너집니다

 

평소 이괄을 잘 알고있어 이괄의 난을 진압했던 정충신 , 노비출신으로 태어나 임진왜란대 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을 진압해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인물로 한국사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신이자 덕장이었던 인물

 

수도 한양을 점령했고

양 , 질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이괄군은

그렇게 내부결속이 잘 안됬기에

결국 관군의 선전에 쫄아서(속어) 크게 흩어지게 됬고

이괄군과 관군의 싸움구경을 하던 한양 백성들은

이괄군이 흩어지자 성문을 잠궈버렸고

이괄이 도망쳐 경기도 이천에 도착하자

그에게 남은 부하들은 6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 여섯사람은 이괄이 잠들때 이괄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바쳤습니다

 

결국 이괄이 한양까지 점령했던 '이괄의 난' 은

그렇게 허무하게 종결됬고

수도 한양이 점령된 것은 엄청나게 큰 일이었지만

애초에 이괄은 이성계같이 부하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거나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도 못했던 인물이었고

단순한 내부 권력다툼에 의한 싸움이었기에

백성들에게는 전혀 공감도 안되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권력자들의 싸움구경일 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무하게 끝난 이괄의 난이었지만

이 사건은 조선사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는데

바로 이괄이 관리하던 북방지역에 구멍이 뚫리고

인조와 조선조정은 이괄의 난으로 북방 최정예 병사들을 전부 잃게되

가뜩이나 힘을 키워가며 대륙을 노리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 국경지역에 구멍이 뚫린것을 파악하고

야심을 키워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보통 이괄의 난으로 조선 북방 군사들이 와해되어

북방 경계선이 뚫려 후금의 침입을 받아

정묘호란 ,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후금(청) 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나

 

이미 조선 군사력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러

북방지역 병사들로 구성된 18000여명의 군사를 파병했을때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 7천명이 전사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어

북방 정예군은 와해됬던 상황이었고

그나마 남은 병사들 +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에서 징집된

백성들이 북방군으로 갔을 때

이괄의 난으로

조선은 이 병사들마저 전부 날렸다고 보면 됩니다

(이젠 북방군도 , 남방에서 더이상 병력 차출도 불가한 상황)

 

이미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패전의 상처가 너무커서

농경지도 대부분 잃어버리고

경제가 무너진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중립외교때 파병으로 인한 손실 + 인조반정 + 이괄의 난 등

여러 혼란들이 겹쳐 국력이 급격히 악화되다

후금의 침입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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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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