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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 이라는 치욕적인 사건을 겪었고

청태종 홍타이지는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인질)로 끌고갔습니다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

 

드라마 '화정' 속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 출처 : MBC 월화 특별기획 : 화정 (2015)

 

두 인물은 성격부터 달랐는데

소현세자는 조선이 힘이 없는 현실적인 이유를 판단하고

강력한 힘이 있는 청나라를 '배우자' 는 입장이었고

청나라에 들어온 서양문물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청같이 이런 문물들을 조선에 도입해 국력을 키우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영특한 인물이었고

조선의 세자로서 인질로 끌려간 먼 타국땅에서도 품위를 지키며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 내는 등

유연하고 훌륭한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그에 비해 둘째아들이었던 봉림대군은

속으로 청나라에 복수해 원한을 풀어야겠다 다짐했고

청나라를 정벌할것을 다짐했는데

일단 인질생활시절에는 나름 처신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적극적으로 조선국 세자로서 청과 교류하고

조선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소현세자는 특히나 조선이나 청에서

크게 부각되었고

청나라 역시 완강한 아버지 인조에 비해

청에 유연하고 영특한 모습을 보인 소현세자를 좋아했기에

친명배금 정책을 했던 인조를 길들이기 위해

인조가 말을 듣지 않으면

왕위교체론등을 언급하며 인조를 긴장시켰고

 

결국 패전의 아픔과 분노심이 컸던 인조는 급격히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아들 소현세자에 대해 큰 위기감을 느꼈고 (친아들 맞는지 싶은데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관계나

선조 역시 임진왜란시기 부각된 아들 광해군을 견제하는 등

권력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특히나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청에 유연했던 아들 소현세자를

왕위에 올려 친청정부를 세우는 것이 아닐까 등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인조였습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조선과 청의 관계를 중재하며

청나라가 조선을 많이 핍박하거나 수탈하지 못하도록

노력했고

몽골어를 배워 청의 서역원정에도 출전하고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만나 예수회 선교사와도 친하게 지냈고

그들에게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도 접했는데

소현세자는 아담 샬 신부에게

 

<소현세자>신부님의 동료들 가운데 한 분을 제가 모시고 가서 

저와 제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없다면 

이 환관이 그 대신 어떤 모양으로든 대행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여러 문제들로 불발되었고

이외에도 소현세자는 서양 신문물들을

조선에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하려했습니다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아담 샬' 신부

 

그러나 그럴수록 먼 곳에서 소현세자의 활동들에 대한

소식을 받아들은 인조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져 갔고

이에 인조의 마음을 알아챈 세력들도

인조에게 소현세자의 행동을

친청행위라 크게 모함했습니다

 

결국 인질생활 9년만에 청의 허가를 받고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인조는 먼 나라에서 오랫동안 고군분투했던 소현세자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

귀국 축하 연회도 하지 않았고

이런 인조의 눈치를 보던 조선 조정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고국에서 자신을 반겨줄줄 알았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냉대와 무관심속에서 아버지를 뵜는데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게

각종 서책과 과학기기나 청나라의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와서 바쳤는데

이중에서는 청황제에게서 받은 벼루(먹물내는 도구)도 있었고

인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집어던졌습니다

 

소현세자가 가져온 시계 , 출처 : KBS

 

먹갈때 쓰는 벼루 (맞으면 매우 아픔)

 

 

인조가 오랫만에 본 아들 소현세자에게 원하는 '모범답안' 은

비록 현실성이 없을지언정

 

'청나라 오랑캐에게 치욕을 씻고 북벌해 복수해야한다'

 

였지만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청나라 '사람' 들도 알고보면 실용적인 모습이 있고

그런 모습을 배워서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현실적' 인 답안을 제출했고

이에 벼루를 집어던질 정도로 더욱 분노한 인조였다 할 수 있습니다

(벼루 집어던지기는 야사지만 두 부자의 관계가 크게 악화됨을 의미)

 

그에 비해 신체 건강했던 둘째아들 봉림대군은

아버지와 신하들이 원하는

복수의 의지를 표출해서

새롭게 부각됬고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죽이고 봉림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소현세자 독살설)

소현세자는 오랫동안의 인질생활속에서 이미 여러 스트레스 속에서

잦은 기침과 호흡곤란등이 있었는데

여독을 풀 틈도 없이 무관심과 냉대속에서

병을 얻고 귀국한지 3달도 못되어 죽었는데

실록에서는 죽은 소현세자의 온몸이 모두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구멍에서는 모두 피가 흘러나왔고

주변 사람들도 마치 약물에 중독되 죽은 사람 같았다고 기록되있고

결국 인조의 독살이나 방관에서 나온 죽음이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인조실록 23년 4월 26년>세자(소현세자)는 사냥만 즐겨하고 학문은 전페한 채 

오직 돈벌이에만 열중하는등 청나라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해 인망을 크게 잃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신체 건강하고 청에대해 복수심을 표출했던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에 올렸고

 

소현세자 아내 강빈은

임금의 수라상(밥상)에 독을 넣었다는 모함을 받고

사약을 받아 죽었고

이에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 역시

죄인의 아들이 되어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됬고

첫째와 둘째는 유배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연이어 어린나이에 사망했고

셋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유배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소현세자 사후 시기부터 조선은 청나라 및 외부세계에 대해

극도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며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폐쇄주의적 국가로 바뀌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사후 피비린내나는 정치권력투쟁속 혼란속에 도망치는 노비들이 속출하자 이들을 추격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인 추노꾼들이 많아졌다는 소현세자 사후 조선시대 민초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 '추노' , 출처 : KBS 2TV 수목 드라마 : 추노 (2010)

 

<라봉봉>역시 이순신 장군과 선조의 선악구도같이

어린이 서적이나 보통 이야기에서는

외국문물에 유연했던 소현세자와 완강했던 인조에 대한

선악구도가 있는데

인조의 분노를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소현세자는 패배를 인정하고 우수한 오랑캐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36년간 고통스럽고 잔학했던 식민지배 경험이 있었던

일본에 대해 일본을 알고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말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다소 국익이나 자국민에 대한 피해를 배제하고 친일파적 모습만을 보인다거나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그런 주장만을 한다면

매우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가 있는데

 

소현세자의 청나라에 대한 배움 , 오늘날 세계 3위 경제대국인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틀린말은 아니지만 결국 민도를 고려해야 한다거나 처신을 잘해야 하는 문제였다 할 수 있고

(외교 문서에서도 오타 하나하나까지 고려해야할 정도인데

국가의 차기 임금이 너무 자국 정서를 외면하지 않고

너무 유연하기만 한 모습만을 보인다는 것은 좋지 못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수십만명이 청에 노예로 끌려가고

이러한 반청정서가 극대화된 시기 소현세자의 행보는 인조에게 충분히

의심될 행보를 보이기도 했고

또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시절에

소현세자는 조선 백성들을 구출한 모습도 보였지만

틈만나면 인조에게 편지를 써서

돈좀 보내달라 했는데

이로 인해

소현세자의 인질생활비용을 메꾸느라

가뜩이나 전쟁으로 피폐해졌는데

세금을 바쳐야했던 평안도, 함경도의 피해가 극심했고

 

이에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결국 적대시하는 청나라에서 청나라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수많은 돈을 쓴 소현세자에 대해 돈문제도 엮여있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소현세자는 청에 대해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신체건강을 유지했던 동생 봉림대군에 비해

건강관리를 잘 하지 못했고

결국 봉림대군 역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세종의 두 아들인

문종과 수양대군 세조와의 관계처럼

유약한 모습의 소현세자였고

특히 소현세자는 결정적으로

외국 생활중 사치스러운 모습들을 보이다

인조와 조선 신하들의 눈에 단단히 나버려 조선 사회에서

매장당했다고 보여지고

단순히 실리적인 개화파 소현세자와 무능한 수구파 인조의 대결에서

인조가 승리해 조선이 폐쇄의 길을 걸었다고만 볼 수도 없고

대신 이러한 의견 불화로 조선은 외국경험이 풍부하고 유연한

새로운 세력을 잃고 서구와의 교류가 더욱 늦어져

개화가 늦어져 결국 일찍부터 서양과 교류해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일본과 달리 부국강병에 실패해

나라가 망했다고도 이야기 되고 있고

소현세자는 안타까운 비운의 세자라 이야기 되는 인물입니다

 

임진왜란 선조와

병자호란 인조는

오늘날 조선사에서 암군의 투탑을 달리는 인물로 이야기 되는 인물로

엄청난 비판이 있는 인물이지만

왕실에서 보통 시호를 올릴때 종을 사용하고 (인종 , 명종 등)

조는 잘 사용하지 않는데

'조' 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것은

전란으로 정통성이 손실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더욱 높인 감도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신하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정치 고단수였던 인물이고

당시 상황이나 시대상등이 무시되고

단순히 선악구도 , 무능 이미지만 씌워지는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특히 학교나 주입식 교육등에서 이런 흑백논리나 선악구도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역사를 깊게 보지 않고 시험을 치기위한 용도로만 사용하다보니

당시 시대상들을 외면한채 빠르게 역사를 외우는 용도로 사용하니

입체적인 역사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받을 수가 없기에 그렇게 단순한 선악구도식으로만 이야기 되는 것으로 보여지고

역사에서 , 오늘날 사회에서도 사람은 공과 과도 있는 사람들도 있기에

함부로 재단해서도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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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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