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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현세자 사후 소현세자의 동생이자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어

인조 사후 왕위를 이어 조선 17대왕 효종이 되었습니다

 

반청주의자였던 인조와 갈등이 많았던

실리주의자인 첫째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곧바로 숙청당했고

효종은 이름에 붙은 효도 효 孝 자 처럼

반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의견과 같았던 인물이었고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반청정책을 시행했고

청을 공격해 청에 원한을 씻자는 '북벌정책' 을 시행했습니다

 

효종은 유약했던 형 소현세자와 달리 신체도 건강했고

조선 역사에서 건국자 태조 이성계에 이어

모처럼만에 군인이미지의 국왕이었는데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청에대한 치욕을 씻고자 노력했습니다

 

드라마 '화정' 속의 봉림대군(왼쪽) 과 소현세자(오른쪽) , 출처 : MBC 월화 특별기획 : 화정 (2015)

 

국왕이 된 효종은 먼저

청을 배척하는 송시열 등의 대신과 손을 잡고

친청세력들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효종은 재위기간중 송시열과 독대(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 , 모든 사람을 물리고 단둘이서만 회담)

해서 송시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효종>저 오랑캐들은 이미 망할 형세에 있다

10년을 기한으로 군사훈련과 군장비 , 군량을 비축하여 

조선과 국민들이 일치단결하고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여 틈을 타서 명과 내통하여 기습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서인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

 

그러나 당시 청나라는 매우 강력했고

효종의 북벌의지는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조선 내에서도

거의 효종 한명만 주창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고

신하들 역시 효종의 의지에 적당히 맞춰주는 느낌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효종은 북벌을 적극적으로 주창했고

인조의 비호를 받았던 인조대의 간신이자 친청파였던

대신 김자점은 청과 화친을 주장했기에

효종 즉위 후 탄핵을 받아 곧바로 실각되었는데

당시 애초에 북벌의지를 보이며

청에 원수를 갚을 생각이었던

효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효종>자점은 아바마마가 승하하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멀뚱히 있었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

 

결국 귀양가게된 김자점은 궁지에몰리자

청나라에 효종이 김상헌등과 함께 북벌을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몰래 알렸고

이에 청나라는 조선 국경쪽에 군사를 배치하고 이 사실을 추궁했는데

이에 조선은 외교를 통해 어찌어찌 청의 침공을 면하게 됬고

김자점이 청에 보고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김자점은 다시 유배됬고 반역죄로 사형당했습니다

 

희대의 역적이자 간신이라 불리는 인물 '김자점'

 

이후 효종은 청에 대한 북벌을 하기위해

군사를 키워야 했고

군사를 키우려면 돈이 들어갔기에

경제를 발달시키려

조세제도인 대동법을 확대시켰고

특별 무과시험인 '관무재' 를 열어서

우수한 장수들을 등용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 했습니다

 

또 효종 4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원이었던 유럽인 하멜 일행이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서 제주도에 표류했다

한양으로 압송된 사건이 있었는데

효종은 서양인들의 기술력이 뛰어난 것을 알고있었기에

하멜에게 서양 군사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지만

항해사였던 하멜은 총만드는 방법을 잘몰랐는데

당시 일본은 기독교도들을 탄압하고 사형시켰기에

조선정부에서는 하멜일행을 일본으로 보내주기도 어려웠고

잡아두었는데 결국 하멜은 겨우겨우 조선을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에 돌아갈 수 있었고

조선에서의 오랜 기간동안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 책을 '하멜 표류기' 라고합니다

 

하멜 동상

 

하멜표류기

 

하멜은 자신을 오랫동안 붙잡고 부려먹은 조선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기에 기록에는 조선을 안좋게도 남겨놨지만

의외로 조선정부는 하멜을 후하게 대접해주었고

조선의 '정' 을 느끼고 간 하멜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일지 '헬조선' 일지는 ,,)

 

당시 동양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서구세계 사람들에게

하멜의 이야기는 낯설고 신비롭게 느껴졌고

그의 13년동안 조선에서 지내온 청춘이 담겨있는 책

하멜표류기는 유럽에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이외에도 효종은 무기에도 큰 관심을 보여

여러 무기를 개량해 청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 했고

짧은 검을 긴 검으로 바꾸게 하고

활과 조총들을 개량하고 양산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력 양성에 힘썼고

점차 초기에는 북벌을 찬성하던 많은 신하들도

현실적 , 군비 부담등을 이유로 효종에 반대하기 시작했지만

북벌을 향한 효종의 의지는 그가 죽을때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효종대의 조선 화포들

 

효종은 북벌을 실제로 시행하기 위해

충직하고 뛰어난 인물이었던 이완 장군을 적극 등용했는데

야사(민간 이야기)에 의하면

효종은 이완의 담력을 시험하고자

밤중에 이완장군을 불렀고

이상하게 느낀 아내의 조언으로 이완 장군은

관복이 아닌 갑옷으로 입고 효종을 뵈러 갔고

이완 장군이 대궐에 들어서자 화살이 날라와

장군의 가슴에 꽂혔지만 이완장군은 늠름하게 걸어가

효종을 뵈었고

이완장군을 시험했던 효종은 이완장군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이완 장군을 북벌의 총책임자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효종의 '북벌'과 함께 이야기되는 '이완 장군'

 

이완 장군이 나오는 조선 효종시대대를 배경으로 한 조선사회 한문풍자소설 '허생전'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적극적인 북벌의지를 보였고

강력한 군대를 기름과 더불어 민생안정에도 힘써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황폐화된 조선 복구사업에 힘썼던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이외에도 효종대에는

모피를 찾아 서양 유럽에서 시베리아를 넘어

동양인 아시아까지 온 러시아인들은

청나라 국경지대까지 왔고

결국 청나라와 충돌하게 됫는데

청나라는 청나라군이 러시아군의 무기보다 뒤떨어짐을 알고

임진왜란 이후부터 오랫동안 조총병을 양성했던

조선에 조총병의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효종은 길러온 조총병들의 능력 시험 + 북벌 예행연습 등을 위해

2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조총병을 지원했고

조선군은 두만강을 건너서 용감하게 싸워 러시아군을 물리쳤는데

 

결국 이로인해 청은 러시와와의 영토분쟁을 끝내게 되었고

조선 포수들의 위력에 크게 놀랐음에도

조선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조선군의 간청에 의해 노획(전투에서 적의 물품등을 획득) 한

러시아 총 수백정중에서 딱 한자루를 내주었고

조선군은 서양식 기술이 들어간 러시아 신식총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고

효종은 이 총을 복제하게 했습니다

 

하여튼 청에 요청에 의해 당시 '나선' 이라 불린

러시아를 정벌하게 된 이 사건을 '나선정벌' 이라 하고

정벌이라는 거창한 수식어에 비해 조선이 얻은 이익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지만

일단 조선군은 러시아의 남하 저지를 해냈고

또 두만강을 넘어 북방지대를 돌아다니며

여러 실전경험을 쌓았다는 의의 정도는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선정벌 지도와 조선 조총병(포수) , 당시 조선 포수들은 재래식 무기와 전술이었지만 사격실력이 매우 뛰어나 러시아군을 상대로 활약했습니다

 

이렇게 재위기간 내내

군사력 강화 및 실질적인 북벌을 준비했는데

오랜기간동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지내며

청제국의 발전과 강성함을 두눈으로 직접 본 봉림대군 효종이었기에

더욱 철저히 준비를 기해 북벌을 진행하려 했던 효종이었지만

뜬금없이 효종의 얼굴의 난 종기를 치료하려

침으로 피를 빼내다가 의원의 수전증(손이 떨리는 증상) 으로

침이 혈맥을 범해버려서

효종의 얼굴에서는 피가 계속 쏟아져 나왔고

북벌을 준비하던 조선의 중흥군주 효종은

그렇게 허무하고 급작스럽게 사망해버렸습니다

 

야사에서는 북벌 원정 하루전날 효종이 급사해

북벌이 취소됬다고도 하나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만큼 효종의 북벌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나타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효종은 조선사에서 강력한 개혁군주의 급작스러운 사망이라는

안타까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군주입니다

 

<라봉봉>북벌정책을 추진했던

당시 효종은 조선 강경파이자 주전파의 가장 선두에 있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왕자시절 직접 볼모로 오랫동안 청에서 생활하며

당시 조선에서 가장 청에 대해 잘 알고있던

인물이었기에 그는 북벌정책을 매우 은밀하고 비밀리에 추진했던 인물이고

막상 당시 신하들과 백성들은 비현실성 , 무리한 부담 등으로

이러한 효종의 모습을 좋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며 북벌을 현실화시키려

전란으로 무너진 조선경제건설에도 열심이었던 인물이라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중흥군주였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정벌하려했던 청나라의 땅은 고구려의 영역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효종의 북벌정책은 더욱

큰 의미와 아쉬움을 남긴 사건이라 이야기되며

실제 북벌에 대해 공식적으로 큰 발언을 하지는 않았던 효종이었지만

실제 내정 , 군사개혁으로 안보를 튼튼히 하려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효종은 많은 야사(민간 이야기) , 설화들로 사랑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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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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