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뒤를 이어 19세에 왕이 된 조선 8대왕 예종 이황은
세조시절 공신들을 견제하다 청렴하고 유능했던 장수 남이를 죽였고
(남이의 옥)
나름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다가
발에 종기가나서 재위 1년 3개월만에 갑자기 죽었고
결국 세조의 손자가 뒤를 이어 조선 9대왕 성종이 됬는데
성종은 어린시절 왕이 되어 할머니이자 세조의 부인이었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성인이 되어 현명한 정치를 해서 많은 이들의 우러름을 받았고
세조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던 조선의 법인
'경국대전' 이 성종대에 완성됬습니다
성종은 본격적인 왕권강화정책을 하되 신권과 조화된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세력이었던 훈구파들을 견제하려 훈구파와 대척점에 있던
사림파를 적극 등용했습니다
성종대에 등용된 대표적 사림파 인물은 김종직입니다
훈구파는 서울에 큰 세력기반이 있었던 조선 초 개국공신 + 세조를 도운 인물들로
이루어진 공신들이었고 유학적 소양보다는 기술과 예술 , 과학과 역사 , 경제분야에 밝았던 인물들이어서
조선 초기 개혁을 이끈 대표적 세력이었지만 점차 권력이 강해지며
부패하던 실정이었고
사림파는 고려말 조선건국에 반대해 지방에 숨어있었던 세력들로
지방 중소지주들이 주된 부류였고 충과 효 , 성리학을 연구하던 세력들이었고
오랫동안의 훈구파들의 권력다툼에 진저리를 느낀 성종은 사림파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훈구파 : 서울 유력 권신들 , 개국공신이나 세조를 도운 세력 , 기술과 예술과 과학과 역사와 경제 통틀어 '잡학'에 밝아 조선초기 관학파 들로 조선초 개혁 중심세력 , 관학 중심 (집현전 , 성균관) , 단군중심 , 중앙집권 중시 (부국강병) , 자주적 , 법치주의 |
사림파 : 지방 중소지주 , 조선 건국에 반대해 지방에 숨었던 세력 , 성리학과 유학에 밝았음 , 사학중심 (서원 , 지방 교육) , 기자중심 , 향촌자치와 왕도정치 중시 , 사대주의적 , 왕도주의 |
사림파는 부패한 훈구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청렴한 '이미지' 가 있었고
(문제는 이미지일뿐 사림파도 훈구파를 밀어내고서는 똑같이 썩음)
점차 조선 국왕들도 사림파에 주목하며
부패한 훈구파보다 사림파들을 밀어주기 시작했고
조선은 점차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훈구파의 기풍보다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사림파의 기풍으로 점차점차 바뀌어 갑니다
(옛날 역사책들에서는 훈구파=부패한 구악 , 사림파=청렴하고 충실한 선 이런 식의
이미지가 강했던거 같은데 오늘날은 훈구파 역시 의의가 있는 세력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성종은 사림파를 등용하고 적극적인 문치주의 유교정책을 시행하려 했고
이에 훗날 조선 사림 선비들에게 칭송받는 왕이 됬지만
덕분에 조선에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은 점차 줄어들고
국방력이 크게 약화됬습니다
성종에게는 윤씨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왕비(공혜왕후 ,한명회의 딸)가 죽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되었고
곧 왕자까지 낳아서 더욱 왕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자는 바로 조선의 폭군이라 불린 '연산군' 입니다,,
일단 연산군 이야기는 뒤로하고,,
성종이 연산군을 낳은 왕비 윤씨를 두고도 자주 후궁의 침소에 드나들자
이를 질투한 윤씨는 주술로 저주하는 글이나 독약묻은 곳감을 방안에 넣어놨는데
이게 성종에게 발견됬고
혹은 성종과 다투다가 성종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거나 (독약사건 2년뒤)
식사도중 화를 참지못해 국그릇을 엎어 성종의 옷을 더럽히는 등
여러 분노조절장애 같은 행위를 일삼았고
끝내 폐위됬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의 성종의 발언>내 눈앞에서 비상(독약)을 가지고 있고
내 발자취를 깎아버리겠다고 욕을 하질 않나
다짜고짜 처소로 쳐들어오질 않나
도저히 중궁과는 못 살겠다 !!
사실 오늘날 보기에는 다른 여인들과 잠자리를 가진
남편 성종에 대한 부인 윤씨의 분노도 이해가 되나
당시는 왕정국가였고 왕에게는 여러 후궁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하여튼 폐비가 된 윤씨는 다시 궁에서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가게 됬고
점차 폐비 윤씨가 낳은 세자 연산군이 성장하자
신하들 사이에서도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가 논의됬고
결국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친정에 간 2년 뒤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연산군은 세자시절에도 딱히 좋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유학 배우기를 싫어해서 누군가 배우라고 타이르면
<연산군>이제 그런것은 잡기 雜技 (잡다한 기술) 이다
라고 배우려 하지 않았고
이외에도 동물을 매우 사랑하고 좋아했던 성종이
연산군에게 임금에 도리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성종이 아끼던 사슴 한 마리가 연산군에게 다가와
손과 옷을 핥았는데 연산군은 옷을 더럽힌 사슴에 분노해
사슴을 발로 걷어찼고
이를 본 성종은 화가나서 연산군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다 연산군은 왕이 되자마자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조선 폭군의 시작)
하여튼 성종은 폐비윤씨와의 갈등으로 어린 연산군에 대해
제대로된 교육을 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불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종은 동물을 좋아했던 왕으로도 유명하고
또 성종은 남만주 일대를 개척하자는 신하의 주장에 기뻐해
남만주지역 고구려 장성들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당시 언론기관인 삼사를 장악한 사림파들은 성종에게 크게 반대해
남만주 개척시도는 중단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종의 남만주 개척시도)
당장 성종이 수복하려 했던 옛 고구려땅인 두만강 너머 훈춘 지역은
비옥한 평야지대였고 이에 조선정부는 또다시 고토수복을 계획하나
결국 군사적 상황이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됬습니다
성종은 말년에는 나름 자신들이 등용한 사림파들이
언론기관인 삼사를 장악해 말도안되는 억지 간언들을 올리는 것에
골치가 아팠지만
그의 유교적 소양 등으로 참고 인내하며 신하들과 잘 지내려 했고
나름 오늘날에도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학문을 좋아해 유교적 정치를 구현한 왕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성종시기 활동한 조선을 홀린 여인 '어우동' 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어우동은 양반가문 여인이었지만 남편에게 버려진 후
양반 , 평민 , 노비들과 닥치는대로 간통을 문란하게 하다가
교수형 당해 죽는 인물이고 여러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사실 성종 역시 여색을 밝혔던 인물이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는 말처럼 집단의 지도자가 문란해 폐비윤씨 사건들을 일으켰는데
사실 그 백성들도 정상일리는 없습니다
(성종이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한 왕이었음에도
남존여비사상[남자가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는 말]이 심했고 집안문제는 좋지 않았음)
<라봉봉>성종 역시 문치주의에 집중해 여러 군사적 공백이 생기고
문약해진 나라가 됬다는 비판이 있지만
인물됨으로는 학문을 좋아하고 백성들의 삶을 자주 살피려 했고
신하들과의 사이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해
조선 초기의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한 좋은 임금으로 이야기 되는 인물입니다
나름 전형적인 유교적 군주의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고
폐비 윤씨사건으로 인해 연산군의 광기의 시대가 시작됬다는 점으로 인해
가족관계가 아쉬운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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