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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사후 그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문종 이향이 조선 5대왕이 되었고

문종은 세자시절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정치를 했을 정도로

실무 경험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드디어 조선에도 적자승계 원칙이 지켜지기도 했고

문종은 어질고 학문을 좋아해

세종시대를 이어갈 차기 국왕으로 무리가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단지 문종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유약하고 건강이 약했다는 것인데

고작 2년을 재위하고 곧 사망합니다,,

 

문종은 죽기전 세종대부터의 원로신하인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어린 아들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고

이는 당시 왕실에 수렴청정을 할만한 여성 어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 시절 4군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

 

김종서와 황보인은 고명대신(죽기전의 왕의 부탁을 받은 신하)이 되어

단종시대부터 조선의 국정을 운영할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단종은 어려서 인사권을 행할 능력이 부족했기에

의정부에서 여러 인재들이 적힌 종이가 올라오면

김종서와 황보인은 그 종이에 노란 표식(황색 표식)을 찍어 단종에게 올렸고

어린 단종은 노란점이 찍힌 인물을 등용하게 되었고

이를 '황표정치' 라고 합니다

 

영화 '관상' 에 나오는 '황표정치(황표정사)' , 출처 : 영화 관상 (2013) 觀相, The Face Reader

 

비록 김종서와 황보인은 청렴한 신하였지만

나라 권력이 권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자

이를 고깝게 보는 신하나 세력도 있었고

대표적 인물로는 바로 세종대왕의 둘째아들이었던 '수양대군' 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라는 인물과 어울렸는데

서로 뜻이 잘통했고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참모가 되어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짰고

한명회는 공신들 중에서

살릴 공신과 죽일 공신들을 책에 적어내렸는데

이를 '살생부' 라고 합니다

살생부 첫머리에는 김종서가 있었고

결국 수양대군은 군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를 철퇴로 찍었고 김종서는 잠시 기절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나

도망치다가 수양대군에게 다시 잡혀 죽습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수양대군역 배우 이정재의 '내가 왕이될 상인가 ?' 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계유정난을 다룬 영화 '관상' , 출처 : 관상 (2013) 觀相, The Face Reader

 

수양대군은 곧 경복궁을 장악한 후 살생부에 적힌 신하들을 죽였고

정권을 잡아 조선 7대왕 세조가 되었고

이 사건을 '계유정난' 이라고 합니다

 

발견된 실제 세조어진을 도색한 그림

 

계유정난 이후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밀려난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종>할바마마(세종대왕)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수양대군의)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

 

비운의 소년왕 단종은 이후 숙부 세조에 의해 유배됬고

세조가 사약을 보내왔는데 마시기를 거부하다가 살해당했고

세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을 뿐입니다

 

<세조실록>노산군(단종)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당연히 조작기록)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조선 6대왕 단종 이홍위의 상상 어진

 

한편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조선 고종때 야사(민간 이야기) 인 '금계필담' 에는

세조의 맏딸 이세희는 아버지가 조카 단종을 죽이려는 것에 반감을 품다가

궁궐에서 쫓겨났고 결국 세희의 어머니 정희왕후는

그녀를 유모와 함께 충청북도 보은으로 피신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는데

결혼후 알고보니 그 총각은 계유정난때 멀리 유학하고 있어 살아남은

김종서의 손자였고

이 사실을 알게된 세조는 두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두 사람은 세속을 떠나 동굴에 숨어 함께지냈다고 합니다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자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 '공주의 남자' (배경과 OST가 아름다웠던 드라마로 기억합니다) , 출처 : KBS 2TV 특별기획 드라마 공주의 남자 (2011) Princess's Man

 

한편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에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않아 있었는데

집현전 학사로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았던 대신들이었고

한때 세종대왕시절에는 젊은 관료로서

집현전에서 조선을 이끈 유능한 관학파 관료들이었지만

이제는 중년의 대신들이 되어 단종을 보위하고 수양대군의 야심에

나라를 지키려한 충신이 되어버린 인물들이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여섯 신하들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세조)이 정권을 잡자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다가 곧 걸려 세조의 심문을 받았고

그들의 재능이 아까운 세조는 특히나 집현전의 큰 인물이었던

성삼문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조선 초기 충신 성삼문

 

심문 과정에서도 성삼문은 끝까지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불러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분노한 세조는

 

<세조>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

 

라고 말했고

이에 성삼문은

 

<성삼문>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급여)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보라

 

과연 성삼문의 집을 수색해보니

세조 즉위때부터 받은 녹은 전부 보관되어있었습니다

 

그를 회유할 수 없음을 느낀 세조는 화가나서

쇠를 달구어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는데

성삼문은

 

<성삼문>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오라

 

라고 말했고

끝내 처형되어 충신이자 선비로서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성삼문의 절의가(절개와 의리를 주제로 한 노래) 현대어 번역>

수양산(수양대군을 비꼼)을 바라보면서

백이와 숙제를 한탄하노라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먹어서야 되겠는가 ?

비록 푸성귀라 할지라도 그것은 누구의 땅에서 났던고 ?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먹으며 연명했지만

나는 수양대군이 준 녹봉도 받지않고 굶어죽었다는 의미)

 

성삼문과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사망한 6명의 신하들을 사육신이라 하고

죽지는 않았지만 수양대군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해

벼슬을 버리고 떠나 귀머거리나 장님인채 하며 단종을 추모하며

일생을 보낸 6명의 신하들을 생육신이라 하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육신과 생육신' 이라 합니다

 

사육신 :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생육신 : 김시습 , 원호 , 성담수 , 남효온(혹은 권절) , 이맹전 , 조려

 

또 수양대군의 편이 되었던 신하들도 있었는데

성삼문과 같이 세종대왕 시절 집현전 학사 출신인 신숙주가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신숙주는 세조의 편을 들어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었고

이에 사람들은 신숙주를 욕하며 그를 변절의 대명사로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잘 쉬어버린다는 나물 '숙주나물' 의 유례가 되었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백성들의 미움을 받아 변절의 아이콘이 된 신숙주 초상화 :: 보물 제 613호

 

녹두의 싹인 콩나물과 비슷한 '숙주나물' , 숙주나물은 금방 쉬는 나물입니다

 

세종대왕 시절 유능한 집현전 동료들도 세종대왕 사후 파가 갈려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고

수양대군 지지파와 수양대군 반대파의 대결은

수양대군 지지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선 초기 관학파와 세종대왕 시절 유능한 인재풀은

반토막이 나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왕정이 아닌 민주정이나

현실적으로 볼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왕이 나라를 운영할 수는 없었고

이는 혈연으로 세습되는 군주제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각으로 봐도 그전부터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여러 공을 세웠으나

단순히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뒤로 밀려나게 된 세조의 불만이 이해가 될만 하고

당시 계유정난은 표면적으로는 비판받았지만 심층적인 면에서는

이러한 심리들이 깔려있어 성공한 정변이 되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 세조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역시 조카를 살해하고 신하들을 죽인 정권찬탈 과정이 정당하다고만 볼 수도 없고

왕정, 군주제의 모순등에 세종대왕 시절 빛나는 유산들이 반토막 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봉봉>계유정난은 여러 논란이 있는 정변이고

수양대군의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형제의 난' 진행 양상과 매우 비슷한 정변입니다

 

혈연으로 능력이 없음에도 지도자의 자리에 간다는 것은

분명 공동체의 이익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개인 스스로까지도

불행해질 수 있는 매우 좋지 않은 일이고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왕 단종 역시 그러한 세상의 흐름속에

휘말려 죽었던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적어도 세종대왕은 셋째아들이었음에도

순수 능력으로 신하와 부왕 태종임금에게 인정받아

왕위에 올라 권력을 양보한 형을 도우며

유능한 지도자의 자질을 보인 인물이지만

한국 역사에서는 세종대왕같은 인물만 있던게 아니고

태종이나 세조같은 피를 흘린 찬탈자형 인물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조선은 건국초부터

 

1대왕 태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고려멸망] , 쿠데타)

3대왕 태종 이방원 (형제의 난 , 쿠데타)

7대왕 세조 이유 (계유정난 , 쿠데타) 까지

 

대대로 쿠데타가 일어났고

중간에 낀 세종대왕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임에도

홀로 평화로운 느낌입니다,,

(물론 그 평화와 백성들을 지키려 엄청난 노력을 한 인물입니다)

 

하여튼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악이고

단종과 김종서 , 사육신과 생육신들은 선이다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혹은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애초에 너무 어려 판단을 하기도 어려운 

어린 소년왕이 수백 수천만명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도 혈연위주의 군주제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숙부나 형제의 찬탈 사건은 역사적으로 자주 있어왔고

정권 찬탈과정이 분명 잘못됬기에

반대로 수양대군이 선이고 단종과 충신들을 악이라 봐서도 안되지만

하여튼 누구는 선이고 누구는 악이라 하기도 어렵고

인류는 역사에서 오랫동안 군주제를 유지해왔고

민주공화정을 유지해온 역사가 최근에 들어 짧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적자생존의 원칙과

사람들 내면에 민주정치의 기본적 시스템은 작용했다 할 수 있기에

능력이 없으면 밀려나게 되고

능력중심 사회였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사건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한국사의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양대군 세조 역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고

아버지 세종대왕이 워낙 기초를 잘 다져놔 무난한 정치를 이어갔지만

그럼에도 조선초 평화시대의 많은 것들이 파괴된 사건이 '계유정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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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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